프리메이슨

우애단체, 비밀결사, 박애주의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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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메이슨
우애단체, 비밀결사, 박애주의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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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석공 길드에서 발전한 프리메이슨은 인도주의와 박애주의를 지향하는 우애단체입니다. 전 세계 약 600만 회원을 보유하며, 멕시코 독립운동과 러시아 혁명 등 주요 역사적 격변기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그 성격과 역할에 대한 논란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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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

[프리메이슨 조직의 발생]

16세기 말에서 21세기에 걸쳐 인도주의적 박애주의를 지향하는 우애단체이자 취미 클럽인 프리메이슨이 발생했습니다.

프리메이슨리(Freemasonry)는 16세기 말에서 21세기에 발생한 인도주의적 박애주의를 지향하는 우애단체 혹은 취미 클럽으로, 이 단체에 소속된 일원을 프리메이슨(Freemason)이라고 부릅니다. 초기에는 석공 길드에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650

[비밀 단체에 철학적 성격 부여]

1600년대 중반부터 프리메이슨은 노동자의 비밀 단체에 철학적 성격이 더해진 형태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1600년대 중반 또는 그 이전부터는 노동자의 비밀 단체에 철학적 성격이 더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프리메이슨이 단순한 직업 길드를 넘어 사상적 결사체로 변모하는 과정의 시작이었습니다.

1690

[영국 내 프리메이슨 반대운동 시작]

1600년대 말 영국에서 프리메이슨 반대운동이 일어나 '악마적인 반그리스도교 집단'으로 비난받기 시작했습니다.

1600년대 말에 영국에서 프리메이슨 반대운동이 일어나 '악마적인 반그리스도교 집단'으로 비난받기 시작하며, 조직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1700

[근대적 프리메이슨의 등장]

1700년대 초, 계몽주의적 경향과 비밀결사의 개념이 더해져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성격의 근대적 프리메이슨이 유럽에 등장했습니다.

1700년대 초에 영국에서 계몽주의적 경향에 비밀결사 등의 개념이 더해지고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성격이 부여된 근대적 프리메이슨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기존의 신비주의에 기초한 전통적 프리메이슨이 거의 사라지고 새로운 형태의 조직으로 변모했음을 의미합니다.

[국가 및 교회의 프리메이슨 탄압]

1700년대 초반, 유럽과 스페인에서 프리메이슨은 사회를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되어 국가와 가톨릭 교회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았습니다.

1700년대 초반 유럽과 스페인에서 프리메이슨은 사회를 크게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되어 국가와 교회로부터 탄압을 받는 대상이었습니다. 특히 가톨릭은 프리메이슨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종교재판을 통해 처벌했습니다. 이 점은 식민지인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717

[런던 로지 연합 및 총 로지 창설]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런던의 4개 로지가 총 로지로 연합하고 총 지부장을 선출하며 프리메이슨 조직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1600년대 말 반대운동으로 인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1717년 런던의 4개 로지(지부)는 총 로지(총 지부)로 연합하기로 결정하고 총 지부장을 선출했습니다. 이는 근대 프리메이슨 조직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723

[제임스 앤더슨의 프리메이슨 규약 발표]

'프리메이슨 역사의 아버지' 제임스 앤더슨이 프리메이슨의 철학, 역사, 법률, 의무, 활동을 집대성한 규약을 발표했습니다.

1723년에는 '프리메이슨 역사의 아버지'란 평가를 받는 제임스 앤더슨이 프리메이슨의 철학, 역사, 법률, 의무, 활동을 집대성하여 프리메이슨 규약을 발표했습니다. 이 규약에는 시민의 권리나 노동윤리와 같은 진보적 개념도 포함되어 이후 영국 프리메이슨이 크게 성장하고 전 세계로 지부를 확대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1789

[프랑스 혁명 참여]

프랑스의 프리메이슨들은 프랑스 혁명(1789-1794)에 참여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고, 일부는 나폴레옹의 친위대 활동도 했습니다.

프리메이슨은 프랑스 혁명(1789-1794)에도 참여하여 '활약'을 하게 됩니다. 당시 프랑스 프리메이슨들은 전반적으로 정치적 성향이 강했고, 많은 프리메이슨이 프랑스의 정치를 비판하고 대혁명에 몰두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는 나중에 나폴레옹의 친위대 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1806

[멕시코 최초의 프리메이슨 로지 조직]

멕시코시티에서 멕시코 최초의 프리메이슨 로지가 조직되었습니다. 이는 멕시코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멕시코 최초의 로지는 1806년 멕시코시티의 라스라타스(Las Ratas, 즉 볼리바르) 5번지 주택에서 조직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멕시코 독립의 선구자인 이달고 신부가 독립운동의 기반으로 프리메이슨에 관심을 가졌다는 정황이 많으며, 이는 멕시코만의 현상이 아니라 남미 독립 과정에서 프리메이슨 로지가 독립운동의 수단 또는 거점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았던 현상과 유사합니다.

1821

[이투르비데의 이괄라 계획 발표]

이투르비데가 이괄라 계획을 발표하며 군주제 독립, 가톨릭 인정, 사회 계급 통합을 주장하며 멕시코 독립의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1821년 2월, 이투르비데는 이괄라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이 계획은 군주제로의 독립, 가톨릭의 인정, 모든 사회계급의 통합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이 발표에 따라 이투르비데는 멕시코 독립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1822

[이투르비데의 아구스틴 1세 즉위]

이투르비데가 스스로 아구스틴 1세로 선언하고 즉위하여 멕시코의 군주가 되었습니다.

1822년 5월이 되자 이투르비데는 스스로를 아구스틴 1세로 선언하고 즉위하였습니다. 그 후 그는 자신을 반대하는 제헌 의회를 해산하는 등 중앙집권적인 통치를 시도했습니다.

[산타 안나의 반란 시작]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가 이투르비데 왕정에 반대하여 베라크루스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는 이투르비데 왕정에 반대하였고 1822년 12월 2일에 베라크루스에서 반란을 일으켜 이투르비데의 중앙집권주의에 저항했습니다. 이투르비데는 반란 진압을 위해 안토니오 에차바리 장군을 파견했으나, 오히려 에차바리 장군은 산타 안나와 동맹을 체결했습니다.

1823

[카사 마타 계획 발표]

이투르비데가 파견한 안토니오 에차바리 장군이 산타 안나와 동맹을 맺고 카사 마타 계획을 발표하며 새로운 의회 구성을 요구했습니다.

안토니오 에차바리 장군이 산타 안나와 동맹을 체결하였고 1823년 2월 1일에 카사 마타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이 계획은 새로운 의회의 구성과 지방의회의 권위를 인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고, 이투르비데가 중앙집권주의로 기울고 지방에 강제로 재정을 강요하던 상황이었기에 지방 세력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아구스틴 1세의 퇴위 및 망명]

아구스틴 1세(이투르비데)가 반란 세력의 압력에 왕좌에서 물러나 해외로 망명했습니다.

1823년 3월이 되자 아구스틴 1세(이투르비데)는 왕좌에서 물러나고 해외로 망명하였습니다. 이투르비데 축출의 일면은 의회에 다수 참여하고 있던 프리메이슨들이 이투르비데와 군주제를 반대하며 카사 마타 계획의 주동세력이 된, 프리메이슨 투쟁의 승리라는 성격이 있었습니다. 이로써 군주제를 상대로 공화주의가 승리했습니다.

[멕시코 공화정 선포 및 헌법 제정]

멕시코 의회가 다시 소집되어 공화정을 선포하고 새 헌법을 제정하며 가톨릭을 국교로 정했습니다.

이투르비데가 물러난 후 의회는 다시 소집되고 1823년 11월에 공화정을 선포하고 새 헌법을 제정하였습니다. 제정된 1824년 헌법에 따르면 가톨릭은 국교로 지정되었습니다. 그 후 멕시코 정치는 중앙주의와 연방주의가 대립하며 혼란이 계속됐습니다.

1824

[멕시코 초대 대통령 취임과 프리메이슨 분파 대립 심화]

과달루페 빅토리아가 멕시코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스코틀랜드 의례파와 요크 의례파 프리메이슨 간의 대립이 본격화되었습니다.

이투르비데의 군주제가 무너지자 초대 대통령으로 과달루페 빅토리아가 당선되었고 니콜라스 브라보가 부통령이 되었습니다. 과달루페 대통령이 재임한 4년(1824-1828)은 스코틀랜드 의례파와 요크 의례파라는 두 프리메이슨 분파 간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였습니다. 당시 정치인의 다수가 프리메이슨에 속해 있었으므로 프리메이슨이 정당과 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1825

[요크 의례파 프리메이슨 창설]

자유주의자 로렌소 데 사발라 등이 미국 대사 포인셋의 지지를 받으며 메스티조와 중산층을 규합하는 요크 의례파 프리메이슨을 창설했습니다.

로렌소 데 사발라(Lorenzo de Zavala)는 자유주의자였으며 1825년 요크 의례파 프리메이슨의 창설 멤버였습니다. 요크파는 미국 대사 포인셋의 지지를 받으며 메스티조와 중산층을 규합하여 연방주의적 정당의 기초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로써 요크파에는 미국식 자유주의를 선호하는 프리메이슨이 모였습니다.

[멕시코 의례파(RNM) 프리메이슨 창설]

외세가 아닌 멕시코 고유의 정치 시스템을 추구하는 민족주의적 로지인 멕시코 의례파(RNM) 프리메이슨이 창설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파와 요크파 모두에게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이 1825년에 민족주의적 로지인 멕시코 의례파(RNM) 프리메이슨을 세웠습니다. RNM은 자유주의 원칙을 주장하였고 외세가 아닌 멕시코 고유의 정치 시스템을 추구했습니다.

1826

[RNM의 독자 로지 결성 승인]

멕시코 의례파(RNM)가 요크파나 스코틀랜드파와 무관하게 독자적인 로지들의 결성을 승인했습니다.

멕시코 의례파는 1826년에 요크파나 스코틀랜드파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아나우악의 자오선', '평등', '폭군의 공포', '인디오의 무심', '멕시코의 비'과 같은 로지들이 결성하는 것을 승인하였습니다. 나중에 RNM은 요크파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1827

[호아킨 아레나스 신부 사건 발생]

호아킨 아레나스 신부가 스페인 왕정 복귀를 주장하며 반란을 계획했으나 발각되어 처형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반스페인 정서에 불을 지폈습니다.

호아킨 아레나스 신부는 멕시코의 혼란이 자유주의 때문이라 주장하며 1827년 1월에 스페인의 페르난도 7세의 왕정 복귀를 주장하며 이에 동조하는 사제들과 반란을 계획했습니다. 계획은 사전에 발각됐고 신부는 처형되었습니다. 당시 멕시코 사람들은 스페인의 재정복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고 이 사건은 반스페인 정서에 불을 댕겼습니다.

[스페인인 공직 금지령]

호아킨 아레나스 신부 사건 이후, 스페인인의 공직 및 사제직 취임을 금지하는 령이 내려졌습니다.

호아킨 아레나스 신부 사건으로 반스페인 정서가 격화되자, 1827년 5월에 스페인인은 공직과 사제직 취임을 금지하는 령이 내려졌습니다.

[스페인인 추방령]

스페인인 추방령이 내려졌습니다. 이는 멕시코 내 스페인 세력 약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1827년 12월에는 스페인인 추방령이 내려졌습니다. 이로 인해 멕시코 내 스페인인들의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이 크게 축소되었습니다.

[몬타뇨 계획 반란 발생]

브라보 부통령을 중심으로 스코틀랜드파가 몬타뇨 계획을 발표하고 반란을 일으켜 요크파 및 비밀결사 금지를 요구했습니다.

브라보 부통령을 중심으로 스코틀랜드파는 즉각 반발하였습니다. 이들은 1827년 12월 몬타뇨 계획(멕시코주의 오툼바에서 발표되었기 때문에 오툼바 계획이라고도 함)을 발표하고 반란을 일으켜 요크파 프리메이슨을 포함한 비밀 결사의 금지, 요크파 정치인 축출을 위한 내각 재구성, 포인셋 대사 추방, 1824년 연방 헌법 준수 등을 요구하였습니다. 결국 과달루페 빅토리아 대통령의 정부군이 승리하며 요크파의 세력이 인정받고 스코틀랜드파의 위세는 축소되었습니다.

1829

[스페인의 멕시코 재침공]

스페인이 멕시코를 재정복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 탐피코를 점령했습니다.

멕시코의 국가 재정 부족과 농업, 광업, 제조업 생산의 침체, 사회기반의 부실, 교회와의 마찰이 지속되던 중, 스페인의 재침공 가능성에 대한 대비가 거의 전무한 상황에서 결국 스페인은 1829년 멕시코를 재정복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 탐피코를 점령하였습니다.

1830

[부스타만테의 반란 및 대통령 취임]

탐피코로 파견되었던 부스타만테 부통령이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스페인의 탐피코 점령 당시 게레로 대통령은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Anastasio Bustamante) 부통령을 탐피코로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부스타만테는 반란을 일으켜 1830년에 스스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1831

[게레로 대통령 암살]

부스타만테의 계략에 의해 게레로 대통령이 암살당했습니다.

부스타만테를 상대로 게레로가 다시 봉기하였으나, 부스타만테의 계략에 당해 1831년에 암살당하였습니다. 이는 멕시코 독립 직후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1833

[산타 안나의 멕시코 대통령 취임]

산타 안나 장군이 부스타만테를 몰아내고 요크파의 지지를 받으며 멕시코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부스타만테에 반대하여 산타 안나 장군이 봉기하여 부스타만테를 몰아냈습니다. 이후 고메스 페르라사가 대통령 자리를 맡게 됐고 그는 차기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를 실시하였습니다. 산타 안나 후보는 요크파의 지지를 받으며 RNM 총회에 참석하여 자신의 정치 개혁 계획을 발표하였고, 선거에서 승리하여 1833년에 멕시코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1916

[러시아 프리메이슨 핵심 5인방 형성]

러시아 프리메이슨 조직 내에서 네크라소프, 케렌스키, 테레셴코에 코노발로프와 예프레모프가 더해져 핵심 5인방이 형성되었습니다.

세르게이 페트로비치 멜구노프에 따르면 러시아 혁명 전후 정치적 프리메이슨 단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은 건 네크라소프, 케렌스키, 미하일 이바노비치 테레셴코 3인방이었고, 1916년에 코노발로프와 예프레모프가 더해져 5인방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차르 전제정에 반대하는 포괄적인 정치적 목적을 공유했습니다.

1917

[러시아 2월 혁명 발발]

페트로그라드에서 사태가 발생하며 러시아 2월 혁명이 발발했습니다. 프리메이슨 단원들은 혁명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1917년 2월 하순 페트로그라드에서 벌어진 사태와 2월 혁명을 러시아의 프리메이슨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습니다. 갈페른은 "우리는 갑작스럽게 혁명을 맞이했다. 혁명 초기에 우리가 가진 당혹감은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었다. 우리는 심지어 2월의 사건들이 아주 심각한 양상을 띠기 시작할 때에도, 그 사건들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증언했습니다.

[볼셰비키 지도자들의 귀환 시작]

카메네프, 스탈린 등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유형지에서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로 귀환하기 시작했습니다.

2월 혁명으로 차르 정부가 붕괴된 이후, 유형 및 망명 생활을 하던 일급 혁명가들이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로 귀환하기 시작했습니다. 1917년 3월 중순에 카메네프, 스탈린 등이 귀환하며 프리메이슨단에 가입하고 있던 멘셰비키와 인민주의자들의 역할이 축소되었습니다.

[러시아 임시정부 구성 결정 및 승인]

러시아 임시정부 구성이 결정되었고, 다음 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와 국가두마 임시위원회 합동 대표회의에서 승인되었습니다. 임시정부 내각에서 프리메이슨의 영향력이 강력하게 드러났습니다.

1917년 3월 1일 저녁에 임시정부의 구성이 결정되었고, 2일 밤에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와 국가두마 임시위원회 합동 대표회의에서 승인되었습니다. 두마의 임시위원회와 소비에트 임시집행위원회 모두 프리메이슨 단원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프리메이슨 조직은 국가두마와 소비에트 양쪽에 자신들 파벌의 주요 인물들을 포진시켰습니다. 임시정부 내각에서 프리메이슨의 영향력이 강력하게 드러났습니다.

[레닌 등 볼셰비키 지도자 귀국]

레닌과 지노비예프 등 저명한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망명지에서 귀국했습니다.

1917년 4월 초에 레닌과 지노비예프 등 저명한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각각 유형지 및 망명지로부터 귀국하자 프리메이슨들은 더욱 위축되었습니다. 볼셰비키는 프리메이슨단과 연결을 거론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케렌스키 임시정부 총리 취임]

케렌스키가 임시정부 총리 자리에 오르면서 다수의 프리메이슨 단원들이 정부의 각종 직책에 임명되었습니다.

케렌스키가 1917년 7월 초에 임시정부 총리 자리에 오른 다음에는 다수의 프리메이슨 단원들이 정부의 각종 직책에 임명되었습니다. 스타르체프에 따르자면 1917년에 중요한 행정직에 임명된 단원들은 도합 148명이었으며, 프리메이슨 조직은 지방행정직의 인사 문제에도 긴밀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러시아 10월 혁명과 프리메이슨 영향력 상실]

볼셰비키가 정권을 장악한 10월 혁명 이후 프리메이슨은 러시아 정치에서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볼셰비키가 정권을 장악한 10월 혁명 이후 프리메이슨은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2월 혁명 이후 대중의 정치 참여가 확대되면서 엘리트 중심의 프리메이슨 운동은 한계를 드러냈고, 차르 체제 붕괴라는 정치적 목표 달성 후 내부 분열과 혁명 세력과의 괴리감으로 인해 활동을 지속할 필요성을 잃었습니다. 결국 러시아의 프리메이슨 운동은 소련 해체될 때까지 침묵했습니다.

1991

[소련 해체 후 러시아 프리메이슨 운동 재개]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에서 프리메이슨 운동이 다시 등장했습니다.

볼셰비키 정권 장악 이후 러시아에서 사라졌던 프리메이슨 운동은 소련이 해체된 1991년에야 다시 등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러시아의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상징하는 사건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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