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

국가 역사, 동아시아사, 문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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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한반도와 주변 지역의 역사를 다룹니다. 구석기부터 철기 시대를 거쳐 고조선, 삼국시대, 고려, 조선,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현대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국가 형성, 성장, 대외 교류, 독립, 민주화를 통한 역동적인 발전을 조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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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1m

[한반도 인류 정착의 흔적 발견]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구석기 유물인 뗀석기와 동물 뼈조각이 단양 금굴, 검은모루 동굴, 승리산 동굴 최하층, 공주 석장리 등에서 발견되어 한반도 인류 정착의 시초를 보여줍니다.

약 109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뗀석기와 동물 뼈조각 유적이 충청북도 단양 금굴, 평안남도 상원 검은모루 동굴, 덕천 승리산 동굴 최하층, 충청남도 공주 석장리 등에서 발굴되었습니다. 이는 약 70만 년 전부터 한반도에 인류가 정착하여 살기 시작했음을 시사하며, 한국 구석기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BC 90k

[한반도에 초기 인류와 현생 인류 출현]

약 10만 년 전 평양 역포인과 덕천인 등 초기 인류의 인골이 발견되었으며, 약 4만 년 전 현생 인류가 출현하여 3만 년 전 한반도에 도래하면서 작은 씨족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한반도에서 발견된 초기 인골로는 약 10만 년 전 평양 역포구역의 역포인, 덕천 승리산 중층의 덕천인, 기원전 3만 9천 년 경 단양 상시바위그늘의 상시인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호모 하이델베르켄시스로 추정됩니다. 약 4만 년 전 현생 인류가 출현한 후 기원전 3만 년 경 한반도에 도래하여 환경에 적응하며 소규모 씨족 사회를 형성했습니다.

BC 9k

[한반도 중석기 및 신석기 시대 시작]

약 1만 년 전, 한반도는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인 중석기 시대를 맞이했으며, 동시에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어 간석기와 빗살무늬토기가 등장했습니다.

약 1만 년 전 구석기 시대가 끝나고 신석기 시대로 이어지는 과도기인 중석기 시대가 한반도에 나타났습니다. 동시에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어 돌을 갈아 만든 간석기가 사용되었고, 빗살무늬토기와 덧무늬토기가 대표적인 유물로 출토되었습니다. 특히 빗살무늬토기는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되어 한국 신석기 문화를 대표하며,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신석기 시대 선사인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입니다.

BC 2k

[한국 최초의 국가, 고조선 건국 (전설)]

한국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이 단군왕검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해지며, 이는 기원전 2333년으로 계산되지만, 신화적 성격이 강해 그 정확성은 논란이 있습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요임금 즉위 후 50년에 평양성에 도읍하여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를 연도로 계산하면 기원전 2333년으로 약 4400년 전의 일이지만, 이 기록은 단군 신화와 함께 서술되어 있어 그 역사적 정확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단군이라는 칭호는 고조선을 다스리던 군장의 명칭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BC 1k

[청동기 시대 및 초기 국가 형성 시작]

기원전 약 2000년경부터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며 농경 발달과 청동기 사용으로 사유 재산과 계급이 발생하고, 족장 중심의 성읍 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기원전 약 2000년부터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농경의 발달로 잉여 생산물이 생기고 청동기가 사용되면서 사유 재산 제도와 계급이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부와 권력을 가진 족장(군장)이 출현하고, 이들이 세력을 키워 주변 지역을 아울러 성읍국가로 발전하면서 마침내 국가를 이룩하기 시작했습니다. 고인돌, 비파형 동검, 미송리식 토기 등이 대표적인 유물입니다.

BC 7C

[중국 기록에 고조선 첫 등장]

고조선은 기원전 7세기 제나라의 《관자》에 처음 등장하여 제나라와 교역했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기원전 6세기 공자도 '동방예의지국' 구이(고조선)로 망명하고 싶다고 언급했습니다.

중국 측 기록에서 고조선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7세기에 쓰인 제나라의 《관자》입니다. 이 기록에는 제나라와 고조선 사이에 교역이 있었음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기원전 6세기 무렵 공자가 동방예의지국인 구이(중국에서 고조선을 달리 부르던 이름)로 망명하고 싶다고 말한 기록도 있어, 고조선이 당시 주변국에 알려진 국가였음을 보여줍니다.

BC 5C

[한반도 철기 시대 시작]

기원전 5세기에서 4세기 무렵, 중국의 철기 문화가 한반도에 유입되면서 철기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철제 농기구와 무기가 보급되며 농업 생산량이 크게 증가하고 강력한 국가 형성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한반도의 철기 문화는 일반적으로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전 4세기 무렵 중국의 철기 문화가 들어오면서 형성된 것으로 파악됩니다. 주철 기술의 도입으로 만들어진 철제 농기구는 농업 생산량을 크게 증가시켰으며, 철제 무기 또한 강력한 무기로 활용되었습니다. 덩이쇠가 무덤의 부장품으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지배 계급이 철의 주조 능력을 중요하게 취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BC 3C

[부여 건국]

기원전 3세기경, 예맥족 부여계 사람들이 만주 쑹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부여를 건국했습니다. 북부여, 동부여로 나뉘어 성장했으며, 고구려에 흡수되기 전까지 연맹 왕국의 형태를 유지했습니다.

기원전 3세기경, 예맥계 부여족이 쑹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지금의 만주 일대를 지배한 부족 국가 부여를 건국했습니다. 부여는 동쪽으로는 읍루, 남쪽으로는 고구려 및 현도군, 서쪽으로는 선비, 오환과 인접했습니다.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북부여를, 해부루의 아들 금와왕이 동부여를 세웠다는 건국 신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국을 마가, 우가, 저가, 구가의 제가가 다스리는 사출도 체제로 운영되었으며, 엄격한 풍속과 영고라는 제천 행사가 있었습니다. 이후 북부여와 동부여 모두 고구려에 흡수되었습니다.

BC 2C

[위만조선 멸망]

한나라 무제의 무역 독점 중지 요구를 위만조선의 우거왕이 거절하면서 전쟁이 발발했고, 결국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은 한나라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위만조선의 우거왕은 한나라와 주변 소국들 간의 직접 교섭을 막고 중개무역을 독점했습니다. 이에 한나라 무제는 기원전 109년 섭하를 보내 무역 독점 중지를 요구했으나 우거왕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결국 한과 고조선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고, 위만조선은 기원전 108년에 멸망하게 됩니다. 고조선 멸망 이후 한 무제는 옛 조선 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했습니다.

BC 1C

[신라 건국]

신라는 기원전 57년 경 경주 지역에서 건국되었습니다. 삼국 중 가장 먼저 세워졌지만 국가 체제 정비는 늦었으며, 박, 석, 김 세 가문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는 형태였습니다.

신라는 기원전 57년 경 경주 지역에서 건국되었습니다. 삼국 중 가장 먼저 세워졌지만, 초기에는 박, 석, 김 세 가문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는 등 국가의 틀을 세우는 데는 가장 늦었습니다.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가 이사금으로 추대되고 각 집단이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는 연맹 왕국 형태였습니다.

[고구려 건국]

기원전 37년 주몽이 이끄는 부여족 일파가 압록강 지류 훈강 유역에 고구려를 건국했습니다. 초기부터 한족과의 투쟁을 통해 강대해졌으며, 태조왕 대에 중앙집권국가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주몽이 이끄는 부여족의 한 갈래가 압록강 지류인 훈강(비류수) 유역에 건국되었습니다. 고구려는 초기부터 한족(漢族)과의 투쟁 과정을 통해 강대해졌으며, 1세기 태조왕 대에 중앙집권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 동예와 옥저를 복속시키며 영토를 넓혔습니다. 고국천왕은 왕위 부자상속제를 마련하고 5부 행정구역을 설정하며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백제 건국]

기원전 18년 온조가 하남 위례성에 백제를 건국했습니다. 3세기경 충청도, 전라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성장했고, 중국 군현과의 갈등도 있었습니다.

백제는 기원전 18년 온조에 의해 하남 위례성에 건국되었습니다. 《삼국지》에는 백제가 마한의 일부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3세기경에는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으며, 북쪽으로의 진출은 고구려와 중국 군현 사이의 영토적 분쟁을 야기하기도 했습니다.

250

[전기 가야 연맹 형성]

2~3세기경, 김해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대가야, 성산가야 등 5개국이 연합하여 전기 가야 연맹이 성립되었으나, 고구려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2세기에서 3세기경, 한반도 남부에서는 김해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대가야, 성산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소가야의 5개국이 합쳐져 전기 가야 연맹이 성립되었습니다. 이들은 김해 지방의 질 좋은 철을 바탕으로 국력을 키우고 왜 등지와 교역했으나, 고구려의 공격으로 금관가야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427

[고구려, 평양으로 천도]

장수왕은 남하 정책의 일환으로 427년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하고, 중앙 집권적 정치기구를 정비하여 고구려의 세력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5세기 고구려 전성기를 이끌던 장수왕은 남하 정책을 추진하며 427년에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했습니다. 이는 중앙 집권적 정치기구를 더욱 확립하고,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475

[고구려, 백제 한성 함락]

고구려는 475년 백제의 수도 한성을 침공하여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죽였습니다. 이로써 고국원왕의 원한을 풀고 남쪽 아산만까지 영토를 확장하며 강력한 위세를 떨쳤습니다.

장수왕이 이끌던 고구려는 475년에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침공하여 함락시키고 백제 개로왕을 죽였습니다. 이는 고구려 고국원왕의 전사(371년)에 대한 복수이기도 했습니다. 이 승리로 고구려는 남쪽으로 아산만까지 지배하며 광대한 영토를 확보했습니다.

500

[후기 가야 연맹 재편성]

5~6세기경, 고구려 공격의 피해를 덜 받은 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 가야 연맹이 재편성되었습니다.

5세기에서 6세기경, 금관가야가 고구려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은 후 피해가 거의 없었던 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 가야 연맹이 새롭게 만들어졌습니다.

512

[신라, 우산국 정벌]

512년 6월, 신라 이사부 장군이 나무 사자를 이용한 계책으로 우산국(울릉도)을 정벌하고 복속시켰습니다. 우산국은 신라에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게 되었습니다.

512년 6월, 신라의 하슬라주 군주 이사부가 우산국(현재 울릉도와 부속섬)을 정벌했습니다. 이사부는 무력 대신 나무 사자를 배에 싣고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를 놓아 모두 밟아 죽이겠다"는 계책을 써서 우산국의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이로써 우산국은 신라에 복속되어 해마다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게 되었습니다.

538

[백제, 국호를 남부여로 변경 및 사비 천도]

백제 성왕은 538년 부여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국호를 '남부여'로 변경하고,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성으로 천도하며 백제 중흥을 모색했습니다.

침체에 빠졌던 백제는 무령왕 때부터 중흥을 시작하여 성왕의 치세에 이르러 더욱 가속화되었습니다. 성왕은 538년 부여를 계승하여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고, 수도를 웅진(현 공주)에서 사비성(현 부여)으로 천도하는 등 중흥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성왕은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협공하여 한강 유역을 되찾으려 했으나, 신라의 배신으로 실패하고 관산성에서 전사했습니다.

562

[가야 연맹 멸망]

532년 금관가야가 신라에 정벌되어 투항했으며, 마침내 562년 대가야가 신라에 항복하면서 가야 연맹은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신라와 백제의 위협 속에서 가야 연맹은 점차 무너져 갔습니다. 532년 수도인 금관가야가 신라에 정벌되어 투항하였고, 562년에는 대가야마저 신라에 최종적으로 항복함으로써 가야는 멸망의 길을 걸었습니다. 가야의 패망 원인으로는 삼국과 달리 제대로 된 중앙 집권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부족 국가의 연맹으로 남아있던 점이 지적됩니다.

612

[고구려, 살수 대첩에서 수나라 격퇴]

고구려는 612년 을지문덕 장군의 지휘 아래 살수 대첩에서 수나라 대군을 크게 물리치며 수나라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습니다.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는 고구려를 4차례에 걸쳐 침공했습니다. 고구려는 612년 을지문덕 장군이 이끈 살수 대첩에서 수나라의 대규모 병력을 대파하는 등 주요 전투에서 승리하며 수나라의 침공을 효과적으로 저지했습니다. 이는 고구려의 강력한 국방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660

[백제 멸망]

백제는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습니다. 의자왕의 실정과 국력 소모가 멸망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으며, 세련되고 섬세한 백제 문화는 일본 등지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백제 무왕과 의자왕은 부흥을 위해 노력했으나, 의자왕의 잦은 실정으로 국력이 소모되었습니다. 결국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백제의 문화는 대체로 세련되고 섬세한 것이 특징으로, 이러한 문화는 고대 일본 등지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668

[고구려 멸망]

고구려는 연개소문 사후 지배층의 분열과 국력 쇠퇴를 겪던 중, 668년 나당연합군의 총공격을 받아 멸망했습니다.

고구려는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공을 막아냈으나 국력이 크게 소모되었습니다. 특히 연개소문 사후 지배층이 분열되고 정치 상황이 혼란해지면서 민심도 동요했습니다. 668년 나당연합군은 이러한 고구려의 혼란을 틈타 공격을 감행했고, 결국 고구려는 멸망했습니다. 당나라는 고구려 옛 땅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고, 고구려 영토 일부는 신라에 편입되었습니다. 이후 고구려 부흥운동이 전개되었으나 모두 진압되었습니다.

670

[고구려 부흥 운동 발생 및 좌절]

고구려 멸망 후 670년 검모잠이 부흥 운동을 일으키고 고안승을 왕으로 추대했으나, 같은 해 고안승이 검모잠을 살해하며 내부 분열로 운동이 좌절되었습니다.

고구려 멸망 후 670년부터 검모잠은 군사를 일으키고 왕족인 고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추대하며 부흥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신라의 군사적 지원도 받았으나, 내분으로 인해 670년 8월 안승이 검모잠을 살해하면서 검모잠의 부흥 운동은 끝나게 되었습니다. 671년 당나라 장수 고간이 요동 지역의 잔당을 토벌하면서 검모잠의 부흥운동은 완전히 진압되었습니다.

676

[신라, 삼국 통일 달성]

신라는 나당 전쟁에서 당나라군을 몰아내고 676년 대동강 이남의 삼한 지역을 통일했습니다. 이후 9주 5소경 체제를 확립하고 중앙 집권 국가로서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7세기경 나·당 연합을 결성하여 660년 백제를,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는 당나라의 한반도 지배 야욕에 맞서 나당 전쟁을 치렀습니다. 676년 당나라 군대를 완전히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여 삼국통일을 달성했습니다. 통일신라는 9주 5소경을 설치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며 시중의 권한을 강화하는 등 왕권 전제화를 실현했습니다. 신문왕은 녹읍을 폐지하고 국학을 설립하여 유학 교육을 진흥했습니다.

698

[발해 건국]

696년 거란족 반란으로 당나라 세력이 쇠퇴하자, 옛 고구려 장수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 세력을 규합하여 영주에서 탈출, 천문령 전투에서 당군을 격파하고 698년 동모산 기슭에 발해를 건국했습니다.

696년 영주에서 거란족의 반란이 일어나 당나라의 세력이 쇠퇴하자, 옛 고구려 장수 걸걸중상과 그의 아들 대조영은 이 틈을 타 고구려 유민과 말갈 세력을 규합하여 영주에서 탈출했습니다. 대조영은 이해고가 이끄는 당나라 추격군과의 천문령 전투에서 승리한 뒤, 698년에 동모산 기슭에 발해를 세웠습니다. 제2대 무왕은 강력한 대외 정책으로 국토를 넓혔고, 제3대 문왕은 내치와 외교에 주력하며 발해의 수도를 여러 차례 옮겼습니다.

892

[후삼국 시대 시작 (견훤의 반란)]

신라 말기 극심한 혼란 속에서 892년 견훤과 궁예의 반란을 시작으로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었습니다. 이는 백제와 고구려 부흥운동의 결과였습니다.

9세기 말 신라 말기 사회가 극도로 혼란해지자 지방 호족들이 자립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중 군인 세력인 견훤이 892년 신라에 대한 반란을 일으켜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900

[후백제 및 후고구려 건국]

신라 말기 혼란을 틈타 900년 견훤이 후백제를, 901년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하며 후삼국 시대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신라 말기 지방 호족들의 자립 속에서 900년 견훤이 백제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후백제를 세웠습니다. 이어서 궁예도 901년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후고구려를 세웠습니다. 후고구려는 국호가 태봉으로 변경되기도 했습니다.

918

[고려 건국]

918년 왕건이 궁예의 태봉을 멸망시키고 송악에 고려를 건국했습니다. 이후 신라와 후백제를 통합하며 후삼국을 통일하고, 발해 유민까지 받아들여 더욱 포괄적인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918년 송악 지방의 호족 왕건이 궁예의 태봉을 멸망시키고 고려를 건국했습니다. 송악을 개경(현 개성)이라 이름 고치고 수도로 삼았습니다. 고려는 이후 신라와 후백제를 통합하여 936년 한반도를 재통일했으며, 멸망한 발해 유민까지 받아들여 신라보다 더 포괄적인 의미의 삼국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고려는 약 475년간 한반도를 지배하였고, '코리아'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926

[발해 멸망]

10세기에 세력을 확장하던 거란의 공격을 받아 926년 발해는 멸망했습니다. 15대 220년간의 역사를 남긴 발해는 고구려 문화를 계승하며 '해동성국'이라 불리었으나, 결국 거란에 의해 사라졌습니다.

발해는 제10대 선왕 대에 "해동성국"이라 불릴 정도로 국세를 가졌으나, 제15대 왕인 대인선 치세에 멸망했습니다. 10세기에 세력을 확장하던 거란은 926년 발해를 공격하여 15대 220년간의 역사를 끝냈습니다. 발해는 고구려 문화를 바탕으로 불교 문화와 당 문화를 수용한 문화국가였으나, 멸망 후 발해 귀족 열만화가 정안국을 건국하는 등 유민들의 부흥 운동이 이어졌습니다.

936

[고려, 후삼국 통일]

936년 고려는 신라를 흡수하고 후백제까지 멸망시켜 후삼국 시대를 끝내고 한반도를 통일했습니다. 또한 발해 유민을 받아들여 민족적 통합을 이루었습니다.

고려는 후백제와의 공방 끝에 신라를 먼저 흡수한 뒤, 후백제까지 멸망시켜 936년에 후삼국을 통일했습니다. 또한 멸망한 발해 유민을 받아들여 신라보다 더 포괄적인 의미의 삼국 통일을 이루었으며, 고려 초기 각 지방 호족에게 토성을 나누어주는 본관제를 시행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여 국가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993

[거란의 고려 침공 실패]

거란이 세운 요나라는 고려의 친송 정책에 반감을 품고 993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했으나, 모두 실패했습니다. 이는 고려, 송, 요 사이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거란이 세운 요나라는 고려의 친송정책에 반감을 품고 두 나라의 외교 관계를 단절시키고자 993년, 1010년, 1018년 세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그러나 고려는 서희의 담판, 강감찬의 귀주 대첩 등 방어에 성공하며 모두 물리쳤습니다. 특히 1019년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귀주에서 거란군을 크게 섬멸했는데, 이를 귀주 대첩이라 합니다. 결국 고려가 승리함으로써 고려, 송나라, 요나라 사이에는 세력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1022

[우산국 멸망 (고려에 편입)]

1018년 여진족의 침략을 받은 우산국은 고려의 원조를 받았으나, 1022년 여진족 약탈로 망명해 온 백성들이 고려 예주에 편입되면서 사실상 멸망했습니다.

930년 고려에 복속을 원하며 토산물을 바쳤던 우산국은 1018년(현종 9년) 동북 여진족의 침략을 받아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자 고려로부터 농기구를 지원받았습니다. 1019년 여진족으로부터 도망쳐온 우산국 백성들은 다시 돌아가게 되었으나, 1022년(현종 13년) 여진족에게 노략질 당하여 망명해 온 우산국 백성들이 예주에 거주하게 되고 호적에 편입되면서 우산국은 사실상 멸망했습니다.

1231

[몽골의 고려 침공 시작]

13세기 초 강성해진 몽골족이 고려에 지나친 공물을 요구하고 고려가 거절하자, 1231년부터 7차례에 걸쳐 몽골이 고려를 침공하는 고려-몽고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13세기 초 강성해진 몽골족이 고려에 지나친 공물을 요구했고, 고려가 이를 거절하자 결국 1231년부터 7차례에 걸쳐 몽골이 고려를 침입해 왔는데, 이를 고려-몽고 전쟁이라고 합니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수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으나, 당시 집권자 최씨 무신 정권은 몽골의 조공 요구와 간섭에 반발하여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방비를 강화했습니다.

1270

[고려, 몽골과의 전쟁 종결 및 개경 환도]

1270년 최씨 무신정권이 몰락하자 고려는 몽골과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며 오랜 전쟁을 끝냈습니다. 하지만 대몽 항쟁에 앞장섰던 삼별초는 반기를 들었으나 진압되었습니다.

1270년 최씨 무신 정권이 몰락하자 고려는 비로소 개경으로 환도하고 몽골과 강화를 맺어 장기간의 고려-몽고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고려 조정이 개경으로 환도하자 대몽 항쟁에 앞장섰던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 아래 반기를 들었으나, 이들의 항쟁은 모두 진압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팔만대장경이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방어하려는 마음으로 조판되었습니다.

1388

[이성계, 위화도 회군 단행]

1388년 이성계가 요동 정벌 중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공양왕을 폐위시키는 등 권력 기반을 다졌습니다.

1388년 고려의 무신 이성계는 요동 정벌 중 위화도에서 회군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이후 우왕, 창왕, 공양왕 등을 왕위에 올렸다가 폐위시키며 정권과 군권을 장악했습니다. 또한 혁명파 신진사대부의 경제적 기반이 되는 과전법을 단행하여 경제적 실권까지 확보했습니다.

1392

[조선 건국]

1392년 음력 7월, 이성계는 공양왕의 왕위를 물려받아 새로운 왕조 조선을 건국하고 태조가 되었습니다.

1392년 음력 7월, 정몽주가 제거된 후 이성계는 공양왕의 왕위를 물려받아 새 왕조 조선을 건국하고 태조가 되었습니다. 1393년에는 국명을 '조선'으로 정하고, 1394년에는 한양으로 천도하는 등 여러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1393

[조선 국호 제정]

1393년 새 왕조의 국명이 '조선'으로 공식 선포되었고, 이듬해 한양으로 천도하며 체제 정비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이성계가 새 왕조를 개국한 후 1393년 국명을 '조선'으로 공식적으로 고쳤습니다. 이어서 1394년에는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하는 등 새로운 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여러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1398

[두 차례의 왕자의 난 발생]

1398년과 1400년에 걸쳐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이 발생하여 태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실 내 권력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1398년과 1400년, 조선 초기 두 차례에 걸쳐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자의 난'이 발생했습니다. 이 난에서 승리한 이방원(후의 태종)은 왕위에 오르며 정당성 결여로 쇠약해진 왕권을 강화하고, 임금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육조직계제와 관제 개정 등 관료 제도를 개혁했습니다. 특히 사병을 혁파하고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1475

[사림 세력의 성장과 훈구파 견제]

15세기 말부터 지방의 사림 세력이 정계에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하여 훈구파를 견제하고 조정의 실권을 잡는 데 성공했습니다.

15세기 말부터 고려 말 온건 혁명파 신진사대부의 후예인 사림 세력이 정계에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김종직 등이 세조 대에 중앙 정계에 진출한 이래 꾸준히 영향력을 확대했고, 성종 대에 훈구 공신 세력을 견제할 목적으로 본격적으로 등용되면서 서서히 세력을 확대했습니다. 동시에 이들 사림은 향촌에서 향약과 소학 등을 보급함으로써 지역적 기반을 다져나갔습니다. 명종 때 비로소 훈구파를 몰아내고 조정의 실권을 잡았으며, 이후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붕당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1592

[임진왜란 발발]

1592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며 임진왜란이 발발했습니다. 조선군은 초기에 고전했으나, 이순신의 활약과 의병, 명나라의 지원으로 일본군을 물리쳤습니다.

1592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20만 병력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해 왔는데, 이를 임진왜란이라고 합니다. 미처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조선군은 대규모 조총 부대를 앞세운 일본군에 크게 고전하여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난을 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패배하지 않고 일본 수군을 대파한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에 의해 일본 육군은 보급이 끊기다시피 하여 곤란을 겪었고,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된 의병들의 활약과 명나라의 지원으로 조선군은 7년 만에 일본군을 몰아냈습니다.

1623

[인조반정 발생]

1623년 광해군을 지지하던 북인 세력에 의해 정계에서 배제된 서인과 남인이 연합하여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옹립했습니다.

조선 광해군은 임진왜란 후 피폐해진 국토를 정비하고 실리 외교를 펼쳐 중립 정책을 표방했습니다. 그러나 광해군과 그를 지지하는 북인에 의해 정계에서 배제된 서인과 남인은 권력을 획책하기 위해 연합하여 1623년에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옹립하는 인조반정을 일으켰습니다. 인조는 다시 명나라와의 친선 정책을 펼쳤으나, 이에 자극받은 청나라는 1627년(정묘호란)과 1636년(병자호란) 두 번에 걸쳐 조선에 침입하여 결국 조선은 청나라에 항복하게 되었습니다.

1627

[청나라의 조선 침략 (정묘호란, 병자호란)]

인조가 친명 정책을 펼치자 청나라는 1627년 정묘호란과 1636년 병자호란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조선은 병자호란에서 패하여 청나라에 항복하고 치욕을 겪었습니다.

인조반정 이후 인조는 명나라와의 친선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에 자극받은 청나라는 1627년 정묘호란과 1636년 병자호란 두 번에 걸쳐 조선에 침입했습니다. 조선은 이 전쟁에서 패하여 청나라에게 항복을 선언하고 청나라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전란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재정은 고갈되었으며, 백성들은 비참한 생활을 강요당했습니다. 이후 북벌론과 북학론이 대두되었습니다.

1680

[경신환국으로 붕당 정치의 균형 붕괴]

1680년 경신환국을 통해 서인이 권력을 장악하고 남인을 철저히 탄압하면서 붕당정치의 균형이 무너지고 대립이 심화되었습니다.

조선 후기의 정치는 붕당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17세기 중반의 예송 논쟁에서 남인이 권력을 잡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권력을 잡은 뒤 붕당 간의 균형이 무너져, 서인은 남인을 철저히 탄압했습니다. 이어 서인에서 분열된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는 등 당쟁이 격화되었습니다. 이에 영조와 정조는 탕평책을 통해 당쟁을 타파하고 왕권을 강화하려 노력했습니다.

1800

[정조 서거 및 세도 정치 시작]

1800년 8월 18일 정조가 갑작스럽게 서거하고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순조의 장인 김조순이 정권을 장악하며 60여 년간의 안동 김씨 및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1800년 8월 18일 정조가 갑작스럽게 서거하고 그의 어린 아들 순조가 즉위하자, 순조의 장인 김조순이 정권을 장악하여 안동 김씨 집안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순조, 헌종, 철종 3대에 걸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 외척 세력의 세도 정치가 60여 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세도정치는 온갖 부정부패와 삼정의 문란을 야기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어렵게 했고, 홍경래의 난, 진주민란 등 민란이 여러 차례 일어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1864

[고종 즉위 및 흥선대원군 집권]

1864년 1월 어린 고종이 즉위하고,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하여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왕권 강화 및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펼쳤습니다.

철종의 뒤를 이어 흥선군(흥선대원군)의 어린 둘째 아들 고종이 1864년 1월 즉위했습니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세도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중들의 원망을 사고 있던 조세 제도를 개정했습니다. 또한 서원을 철폐하고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회복시켜 왕권 강화를 꾀했습니다. 재정난에도 불구하고 경복궁 중건을 추진했으며, 프랑스와 미국의 통상 요구를 물리치고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유지했습니다.

1873

[흥선대원군 실각, 개방 정책 시작]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여흥 민씨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은 개방 정책으로 전환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1873년 실각하고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의 친정인 여흥 민씨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조선의 대외정책은 개방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이후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며 문호를 개방하고 서구 열강들과도 외교 관계를 맺게 됩니다.

1876

[강화도 조약 체결, 문호 개방]

1876년 2월 27일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며 문호를 개방했습니다. 이 조약은 불평등한 내용으로 조선이 제국주의 열강에 개방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873년 흥선대원군의 실각 후 여흥 민씨 정권이 들어서면서 대외정책이 개방되었습니다. 1876년 2월 27일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문호를 개방하였으며, 이후 미국 등 서구 열강들과도 외교 관계를 맺으며 조선은 국제 사회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 조약은 조선에게 불평등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일본의 침략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1882

[임오군란 발생]

1882년 구식 군인에 대한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은 군인들이 봉기한 임오군란이 발생하여 민씨 정권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1882년, 신식 군대와의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은 구식 군인들이 봉기하여 임오군란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으로 민씨 정권은 큰 위기를 맞았고, 청나라의 개입으로 진압되었습니다.

1884

[갑신정변 발생]

1884년 12월 4일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가 근대 국가 건설을 목표로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했습니다.

1884년 12월 4일,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는 급진 개화파가 개화 정권을 수립하려는 시도인 갑신정변을 일으켰습니다.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사상을 반영했으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만에 무너졌고, 일본에 지나치게 의존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1894

[동학 농민 운동 및 갑오개혁]

농민들의 사회 변혁 요구로 전봉준을 중심으로 동학 농민 운동이 발생했으나 우금치에서 좌절되었습니다. 일본은 이를 빌미로 청일 전쟁을 일으키고, 경복궁을 점령하여 갑오개혁을 강요했습니다.

농민층의 불안과 불만이 팽배해지고 사회 변혁의 욕구가 높아지자,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한 동학을 중심으로 대규모 농민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고부에서 일어난 동학 농민군은 전라도 지역을 장악하고 개혁을 실천했으나, 우금치에서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하여 좌절되었습니다. 일본은 이 동학 농민 운동을 빌미로 조선에 파병된 청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청일 전쟁을 일으키는 동시에,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협박하여 친일적 개혁인 갑오개혁을 강제로 추진했습니다.

1895

[명성황후 시해 (을미사변) 및 단발령 반포]

청일 전쟁 승리 후 러시아의 삼국간섭에 대한 일본의 반발로 1895년 10월 명성황후가 암살되는 을미사변이 발생했고, 일본의 강요로 추진된 단발령은 전국적인 의병 봉기를 불러왔습니다.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륙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으나,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간섭으로 요동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해야 했습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일본군 수비대와 낭인 등을 집합시켜 몰래 경복궁에 난입시킨 후 친러시아파인 명성황후를 1895년 10월 암살하는 을미사변을 자행했습니다. 일본의 강요에 따라 구성된 김홍집 내각의 개혁 정책 중 하나였던 단발령은 전국 유생들과 백성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반일 감정 고조와 함께 전국적인 을미의병 봉기로 이어졌습니다.

1896

[고종, 아관파천 단행]

1896년 2월 11일,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했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인해 조선에서는 반일 감정이 극도로 고조되었고,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선비들의 주도 아래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했습니다(을미의병). 한편 고종은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1896년 2월 11일에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했습니다. 이로써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지게 되었습니다.

1897

[대한제국 수립]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환궁하여 1897년 10월 12일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며 자주 독립 국가임을 선포했습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환궁한 후, 1897년(광무 원년) 10월 12일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여 자주 독립 국가임을 대내외에 선포했습니다. 대한제국 수립 전후로 독립협회의 입헌군주제 추진 운동과 민권운동이 활발했으며, 정부 주도의 근대적 개혁인 광무 개혁이 실시되었습니다.

1904

[러일 전쟁 발발 및 일본의 승리]

1904년 한반도와 만주 패권을 둘러싸고 러일 전쟁이 발발했고, 일본은 1905년 포츠머스 조약으로 승리하며 한반도에 대한 영향권을 확고히 했습니다.

1904년, 한반도와 만주의 패권을 둘러싸고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러일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일본은 1905년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전략적인 승리를 얻게 되었고, 이로써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영향권이 확고해졌습니다. 이는 이후 대한제국의 주권을 강탈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일본, 한일의정서 및 제1차 한일 협약 강제 체결]

1904년 2월 23일 일본은 대한제국에 한일의정서를 강요하고, 8월 22일 제1차 한일 협약을 강제 체결하여 외교, 재정 등 각 분야에 일본인 고문을 두어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습니다(고문정치).

일본은 러시아와 대립하며 한반도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1904년 2월 23일 대한제국에 한반도 내 영토, 시설 등 군사적 이용을 협조할 것을 강요하는 한일의정서를 체결했습니다. 이어 1904년 8월 22일에는 제1차 한일 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외교, 재정 등 각 분야에 일본인 고문을 두고 대한제국의 내정에 간섭하는 '고문정치'를 시작했습니다.

1905

[을사조약 강제 체결, 외교권 박탈]

1905년 11월 17일, 일본은 공포 분위기 속에서 제2차 한일 협약(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 통감정치를 시작하며 주권을 침탈했습니다.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여 한반도에 대한 영향권을 확보한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 일방적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제2차 한일 협약(을사조약)의 성립을 발표했습니다. 이 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강탈되었고, 한성(서울)에 한국통감부를 설치하여 통감정치를 시작하며 대한제국의 주권을 침탈했습니다. 이에 사회 각계각층에서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고 을사늑약 폐기를 주장하는 격렬한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1907

[헤이그 특사 사건과 고종 황제 강제 퇴위]

1907년 고종이 헤이그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알리려 했으나, 일본은 이를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 강제 체결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상황에서, 고종 황제는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빌미로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 순종을 즉위시켰습니다. 순종 즉위 직후 일본은 통감부의 권한을 강화하는 한일신협약을 체결하여 내정에 노골적으로 간섭하고,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했습니다. 이에 반발한 군인들이 의병과 합류하여 전국적인 의병 전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1909

[기유각서 체결, 사법·경찰권 강탈]

1909년 7월 12일 일본은 기유각서를 통해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경찰권을 강탈하고, '남한 대토벌 작전' 등으로 전국적인 의병 저항을 무력 진압했습니다.

고종 황제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 이후 일본은 1909년 7월 12일 기유각서를 통해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경찰권을 완전히 빼앗았습니다. 또한 전국적으로 확대된 의병의 저항을 '남한 대토벌 작전' 등 60일간의 무력 진압으로 철저히 탄압했습니다. 이는 대한제국의 주권을 완전히 빼앗기 위한 마지막 단계였습니다.

1910

[한일 병합 조약 체결 (경술국치)]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한일 병합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국권을 완전히 강탈하고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습니다(경술국치).

일본은 1904년 이래 고문정치, 통감정치를 거치며 대한제국의 주권을 단계적으로 침탈해왔습니다. 군대 해산과 사법·경찰권 박탈에 이어, 결국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을 강제로 체결당하며 국권을 완전히 강탈당했습니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의 특별 행정 구역으로 편입되어 식민지 시대인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습니다.

1919

[3·1 운동 발발]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적인 민족자결주의 분위기 속에서 한국인들은 대규모 민족 해방 운동인 3·1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했습니다.

일제의 무단 통치에 핍박받던 한국인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전개된 세계적인 민족 해방 운동의 조류에 편승하여 1919년 대규모 민족 해방 운동인 3·1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발표는 국내 독립운동가들을 고무시켰고, 이는 파리 강화회의에 신한청년당 대표 김규식을 파견하는 것과, 2·8 독립 선언, 그리고 3·1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3·1 운동 이후 일제는 무단통치 대신 '문화통치'를 시행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3·1 운동에서 드러난 민족의 독립 의지를 담아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3·1운동에서 드러난 조선 민족의 독립 의지를 담아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족되었습니다. 임시정부는 내부의 독립 운동 방법론 차이에 따른 분열과 일제의 방해 공작으로 인해 한동안 그 세력이 약화되었으나, 이후 김구를 중심으로 한인 애국단의 활약으로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습니다.

1926

[6·10 만세 운동 발생]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을 계기로 천도교와 사회주의 계열이 연대하여 6·10 만세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을 계기로, 천도교 계열과 사회주의자들의 연대가 이루어져 대규모 만세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이는 3·1운동 이후 가장 큰 항일 운동 중 하나로, 국내 독립운동의 활력을 불어넣고 민족 유일당 운동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1929

[광주학생운동 발발]

1929년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 운동은 일본인 학생과의 충돌을 계기로 전국적인 항일 운동으로 확산되었습니다.

1929년, 광주에서 일본인 학생과 한국인 학생 간의 충돌이 발생한 것을 계기로 시작된 학생 운동은 전국적인 항일 운동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일제강점기 가장 큰 민족단체였던 신간회의 지원을 받아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1930

[일제의 대륙 침략 본격화 및 한반도 병참기지화]

1930년대 일제는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며 한반도를 병참 기지로 삼아 인적, 물적 자원을 강제적으로 수탈했습니다.

1920년대 대공황에 시달리던 일제는 타개책으로 식민지 확보를 통한 블록 경제를 선택했습니다. 이에 따라 1930년대 일제는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대륙 침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한반도를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로 삼았습니다. 이 시기에는 국가총동원령을 내려 한국인 노동력을 착취하고, 학도 지원병, 징병제 등을 실시하여 수많은 젊은이를 전쟁에 동원했습니다. 또한 젊은 여성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여 군수 공장 등에서 혹사시켰고, 일부는 일본군 위안부로 삼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1941

[태평양 전쟁 발발]

1941년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고, 이는 한국 독립운동에 새로운 국면을 열었습니다.

1941년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선전 포고도 없이 불법적으로 기습 공격함으로써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로 인해 한국은 일제의 강제 징용과 국가총동원령 등 더욱 가혹한 식민 통치에 시달렸습니다. 한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9일 연합군에 가담해 일본과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발표하고 한국 광복군을 통해 연합 작전을 시행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대독 선전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9일, 연합군에 가담하여 일본과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발표하고 한국 광복군을 통해 연합 작전을 시행했습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9일 연합군에 가담하여 일본과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발표했습니다. 이와 함께 한국 광복군은 연합군과 연합 작전을 시행하며 미얀마와 인도 일대에서 영국군을 지원하고, 미국의 OSS 전략사무국과 함께 정진군을 편성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도중에 항복하여 국내 진공 계획은 무산되었습니다.

1945

[한국 광복, 일제강점기 종료]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이 연합군에 패망하면서 한국은 광복을 맞이하여 35년간의 일제강점기가 종료되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이 연합군에게 패망함으로써 한국은 광복을 맞이했습니다. 이로써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 35년간 이어진 일제강점기가 종료되었습니다. 광복 직후 한반도에는 미군과 소련군이 남과 북에 각각 주둔하면서 군정이 시작되었고, 좌우익 세력 간 대립이 격화되었습니다.

1948

[대한민국 정부 수립 및 남북 분단]

1948년 8월 15일 38선 이남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되었습니다.

1945년 광복 직후 한반도에 미군과 소련군이 각각 주둔하면서 군정이 시작되었고, 좌우익 세력 간 대립이 격화되었습니다. 결국 1948년에 38선 이남에서 총선거가 실시된 후 그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 수립되면서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되었습니다.

1950

[한국 전쟁 이후 경제 복구 시작]

1950년대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경제 원조를 받아 삼백산업(면방직, 제당, 제분)을 중심으로 전쟁의 폐허를 딛고 경제를 복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전쟁으로 인한 참상과 깊은 후유증 속에서, 1950년대에는 미국으로부터 경제 원조를 받으며 삼백산업(면방직, 제당, 제분 등)의 발달을 통해 전쟁의 참혹한 폐허의 상처를 딛고 경제를 복구해 나아갔습니다.

[한국 전쟁 발발]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한반도 전역을 휩쓸었고, 수백만 명의 희생자를 낳으며 남북 분단을 더욱 고착화시켰습니다.

1950년 6월 25일, 한반도 이남의 대한민국과 이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이에 한국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 전쟁으로 수백만의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당하였고, 국토는 대부분 초토화되었으며, 남북한 사이의 상호 불신이 더욱 깊어지면서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었습니다.

1960

[정부 주도 경제개발계획 시작]

1960년대 이후 한국은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계획을 통해 경공업을 육성하며 유례없는 고속 성장을 이룩했고, 1970년대에는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며 경제 발전을 가속화했습니다.

1960년대 이후 대한민국은 정부 주도의 경제발전 계획 아래 경공업 육성과 경제개발계획 등을 통해 유례없는 고속 성장을 이룩했습니다. 1970년대 들어서는 중화학공업 육성에 크게 기울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 수준을 추월하는 등 크게 발전해 나아갔고, 1980년대에는 '3저 호황'으로 경제 안정기를 맞아 첨단 산업이 발달했습니다.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 붕괴]

1960년 이기붕 부통령 선출을 위한 3·15 부정선거에 대한 시위가 4·19 혁명으로 번져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고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습니다.

이기붕을 대한민국의 부통령으로 선출하여 자유당의 영구집권 음모로 발생한 3·15 부정 선거의 후유증으로 부정선거 개표와 재선거를 촉구하는 시위가 4·19 혁명으로 번지면서 자유당 정권은 붕괴되고 허정의 과도 내각을 거쳐 대한민국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습니다. 이는 한국 최초의 정권 교체였으나, 제2공화국은 집권 민주당의 구파, 신파간 갈등으로 1년 만에 5·16 군사 정변으로 몰락하게 됩니다.

1987

[민주화 운동과 민주 정부 수립]

4·19 혁명, 5·18 광주 민주화 운동, 6월 항쟁 등 수많은 민주화 운동 끝에 1987년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민주주의 정부가 출범하며 권위주의적 정치 문화가 극복되었습니다.

4·19 혁명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6월 항쟁 등 수많은 운동이 일어나는 가운데 대한민국 제5공화국까지 이어지던 군사정권이 1987년에 물러나고 민주주의 정부가 새로 출범함으로써 권위주의적 정치 문화가 점차 극복되었으며, 사회의 민주화도 꾸준히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1997

[IMF 경제위기 극복]

1997년 11월 한국은 IMF 외환 위기를 겪었으나, 국민적 단합과 노력으로 2001년 8월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며 '한강의 기적'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습니다.

대한민국은 20세기 말 찾아온 1997년 11월 IMF 경제위기로 인해 경제가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원조 지원과 국민의 뛰어난 단합력으로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빠른 경제 회복을 맞았고, 2001년 8월 IMF의 위기를 무사히 넘겼습니다. 대한민국은 천연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나, 높은 교육열과 학생들의 뛰어난 학습력 및 공부에 대한 의지로 인적 가치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2002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

2002년 한일 월드컵을 통해 국민들은 단합의 기회를 가졌고, 이를 계기로 시민 의식 수준이 높아지는 등 긍정적인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통해 국민들은 단합의 기회를 가졌고, 그 이후 시민 의식 수준이 더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이 대규모 국제 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할 수 있는 저력을 보여준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2010

[2010년 서울 G20 정상회의 개최]

2010년 서울 G20 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며, 대한민국은 세계 무대에서 경제적, 외교적 위상을 인정받았습니다.

2010년 서울 G20 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면서, 대한민국은 세계 경제에 대한 기여와 국제 협력 능력을 인정받으며 국제 사회에서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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