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래

인권 변호사, 민주화 운동가, 사회 운동가, 문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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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7- 23:2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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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래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인권 변호사이자 민주화 운동가입니다. 그는 학생 시절부터 불의에 저항하며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습니다. '전태일 평전' 집필을 통해 노동 운동의 상징을 재조명했으며, '망원동 수해 사건', '부천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등 권위주의 시대의 주요 공익 소송을 변론하며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했습니다. 1987년 대통령 후보 단일화 운동에 헌신하는 등, 뛰어난 지성과 깊은 인간애를 바탕으로 사회 정의 실현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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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대구 출생 및 서울 이주]

대구에서 부모님의 일곱 자녀 중 넷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부유하게 자랐으나, 초등학교 2학년 무렵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고, 5학년 때 사업 재기를 위해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주했습니다.

1947년 대구에서 부 조민제와 모 이남필의 일곱 자녀 중 넷째이자 장남으로 출생했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화학공장을 경영하여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초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부터 아버지 사업의 어려움으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사업을 다시 일으킬 요량으로 서울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1964

[한일회담 반대 시위 주도]

경기고등학교 3학년 때 학생회 학술부장으로서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조직하고 주도하여, 학교에서 정학 처분을 받았습니다. 이는 당시로서는 최초의 대규모 학생 시위 중 하나였습니다.

경기고등학교 3학년에 학생회 학술부장이었던 그는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조직해서 학생들을 이끌고 국회의사당 앞을 지나 시청 앞을 돌아나오는, 그 당시로서는 최초의 대규모적 학생 시위를 주도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학교에서 정학처분을 받기도 했습니다.

1965

[서울대 법학과 수석 입학 및 학생 운동]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전체 수석으로 입학했습니다. 입학 후에도 한일회담 반대, 삼성재벌 밀수 규탄 시위, 6.7 부정선거 항의, 유신헌법 및 삼선개헌 반대, 교련 반대 등 다양한 학생운동을 주도했습니다.

1965년 서울대학교 전체 수석으로 법학과를 입학하였으나 정작 본인은 수석 입학에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재학 중 한일회담 반대, 삼성재벌 밀수 규탄 시위, 6.7 부정선거 항의, 유신헌법, 삼선개헌 반대, 교련 반대, 공명선거를 위한 학생운동을 주도했습니다. 대학시절 학과 공부보다 혼자 인문 사회 다양한 분야의 동서양 고전을 탐독했습니다.

1970

[전태일 분신사건과 인권 운동 시작]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중 전태일 분신사건이 발생하자,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알리는 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그가 인권 문제에 깊이 관여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1970년 사법시험 준비 중 전태일 분신사건이 발생하자 전태일 정신을 알리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였습니다.

1974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 및 <전태일 평전> 집필]

사법연수원 재학 중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되어 6년간 피신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피신 중에도 다양한 민주화운동에 관여했으며, 약 3년 동안의 준비 끝에 노동 운동의 상징인 <전태일 평전>을 집필했습니다.

1974년 4월 사법연수원 재학 중에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6년 동안 피신 생활을 하였으나 피신 중에도 다양한 민주화운동에 관여했습니다. 또한 공해관리기사 자격증을 취득하였습니다. 3년 동안의 준비로 <전태일 평전>을 집필하였습니다.

1983

[공익 법률 사무소 개소 및 망원동 수해 사건 변론]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와 시민공익법률상담소를 개소하며 인권 변호사 활동을 본격화했습니다. 이듬해에는 한국 사법사상 최초의 대규모 공익 집단 소송인 '망원동 수해 사건'을 담당하여, 수재가 천재가 아닌 인재임을 입증하며 집단소송 제도의 도입 검토를 이끌어냈습니다.

1983년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 및 시민공익법률상담소를 개소하였습니다. 1984년 한국 사법사상 초유의 대규모 공익 집단 소송인 '망원동 수해 사건' 소송을 담당하였습니다. 망원동 수재사건은 대한민국 사법 사상 초유의 대규모 집단 소송 사건으로, 수해 직후 주민들이 마포구청에 몰려가 몇 차례 항의만을 하였을 뿐 별 다른 사후대책을 강구하지 못하고 있을 때 조 변호사는 수해 소송을 수행하기 위한 준비 자료를 수집, 정리하기 시작하였고 주민들을 규합하여 본격적인 소송에 돌입하였습니다. 조영래 변호사는 망원동 수재가 ‘천재’가 아니라 ‘인재’임을 입증하기 위해 3년가 토목학, 수리역학, 수문학, 콘크리트 기술 등에 관한 엄청난 양의 서적을 독파하였습니다. 망원동 수재사건은 우리나라 민사소송에 있어서 집단소송제도의 도입을 검토하게 하는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986

[주요 인권 사건 변론 및 6월 항쟁 기여]

'부천서 성고문 사건', '여성 조기정년제 철폐 소송',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등 권위주의 정권 하의 주요 인권 침해 사건들의 변론을 맡아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특히 부천서 성고문 사건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직접적인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1986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여성 조기정년제 철폐 소송',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변론을 맡았습니다. 군사독재 치하 국내 최초의 <인권보고서> 집필을 하였습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은 박종철 물고문사건과 함께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직접적인 기폭제가 된 사건입니다. 조 변호사는 검찰 발표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성고문 형사에게 5년형의 처벌을 이끌어내고 마지막으로 국가를 상대로 한 위자료 청구소송을 승소시킬 때까지 4년간의 법정 투쟁을 주도했습니다. 대한민국 재판 사상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다뤄진 성차별 법적 논쟁이었던 ‘여성 조기정년제’라 칭해졌던 여성 결혼퇴직제 사건의 여성 측 법률 대리인을 무보수로 맡았습니다.

1987

[대통령 후보 단일화 운동 헌신]

'6.29 민주화 선언' 이후 민주화 운동의 승리가 눈앞에 보이자, 김대중과 김영삼 두 야당 지도자들의 대통령 후보 단일화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단식 투쟁까지 벌이며 단일화 운동을 전개했으나, 결국 두 후보는 분열했습니다.

1987년 ‘6.29 민주화선언’ 이후 민주화 운동의 승리가 6월 항쟁으로 귀결되고 정권 교체가 눈앞에 보이자 두 야당 지도자들은 서로 대통령 후보를 고집했습니다. 조영래는 당시 그러한 현실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고, 김대중과 김영삼의 후보 단일화 운동에 나섰습니다. 그는 단일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민주화가 어렵다는 판단으로, 후보 단일화를 위한 기구를 만들어 홍성우 변호사 등 여러 선배들과 함께 단식 투쟁까지 하면서 단일화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990

[폐암 진단 및 영면]

인권 변호사이자 민주화 운동가, 문필가로서 활동하던 그는 1990년 9월 초 폐암 진단을 받았고, 3개월간의 투병 생활 끝에 43세의 나이로 영면했습니다.

인권변호사로서, 민주화운동가로서, 그리고 문필가로서 불요불굴의 행동과 실천을 지속하던 그는 1990년 9월 초 폐암 진단을 받았고, 3개월 투병생활 후 12월 12일 영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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