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난타 마히돈

태국 국왕, 왕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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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8- 11: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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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난타 마히돈
태국 국왕, 왕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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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 8세 아난타 마히돈은 독일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태국 국왕으로 즉위했습니다. 스위스에서 유학 생활을 이어가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후 귀국했으나, 21세의 젊은 나이에 의문의 총기 사고로 사망하며 그의 동생인 라마 9세가 왕위를 잇게 됩니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은 아직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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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

[아난타 마히돈 탄생]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송클라의 왕자 마히돈 아둘야뎃과 시나카린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쭐랄롱꼰 대왕의 소생인 송클라의 왕자 마히돈 아둘야뎃 왕자와 시나카린 사이에서 첫 번째 아들로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그의 부모는 유학 중이었습니다.

['아난타 마히돈'이라는 이름 하사]

삼촌인 와치라웃 왕이 '마히돈의 기쁨'이라는 뜻의 '아난타 마히돈'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의 삼촌인 와치라웃 왕은 전보를 통해 그에게 '마히돈의 기쁨'이라는 의미를 가진 '아난타 마히돈'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1927

[미국으로 이주]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 파리, 로잔을 거쳐 미국 매사추세츠로 이주했습니다.

왕자는 아버지를 따라서 프랑스 파리와 로잔을 방문한 후, 미국 매사추세츠로 가족과 함께 이주했습니다.

1928

[가족의 태국 귀국]

아버지가 하버드 대학에서 의학 공부를 마친 후 가족과 함께 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마히돈 왕자가 하버드 대학에서 의학 공부를 마친 후, 그의 가족은 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1929

[부친 마히돈 왕자 사망]

아버지 마히돈 왕자가 37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당시 그는 4세에 불과했으며, 어머니가 홀로 가족을 양육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마히돈 왕자가 37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당시 어린 나이였던 아난타 마히돈은 어머니가 홀로 가족들을 기르게 되는 환경에 놓였습니다.

1932

[태국 절대 왕정 붕괴]

태국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여 절대 왕정이 무너지는 중대한 정치적 변화를 겪었습니다.

태국에서 쿠데타가 성공하여 절대 왕정 체제가 붕괴되고 새로운 정치 체제로 전환되는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1934

[라마 8세 즉위]

삼촌인 라마 7세가 퇴위하자 태국 의회의 결정에 따라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했으나, 학업을 위해 스위스로 돌아갔습니다.

라마 7세가 왕위에서 물러나자 태국 의회는 아난타 마히돈을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린 나이였고 스위스에서 학업을 계속해야 했기에 곧바로 스위스로 돌아갔습니다. 이로 인해 아누왓짜뚜롱 왕자와 차오 프라야 욤마랏이 섭정으로 지명되었습니다.

1938

[시암 왕국 최초 방문]

13세의 나이로 왕으로서 시암 왕국을 처음 방문했습니다. 이때 모친과 동생 푸미폰 아둔야뎃이 동반했습니다.

13살의 나이로 아난타 마히돈은 시암 왕국을 왕으로서 최초로 방문했습니다. 그는 그의 모친과 동생인 푸미폰 아둔야뎃을 동반했으며, 당시 수상은 쁠랙 피분송크람 장군이었습니다.

1939

[국호 '태국'으로 변경]

쁠랙 피분송크람 수상의 주도로 국가명이 '시암'에서 '태국'으로 공식 변경되었습니다.

육군 독재자였던 쁠랙 피분송크람 수상은 시암의 국호를 '태국'(Thailand)으로 변경하는 조치를 단행했습니다.

1940

[프랑스-태국 전쟁 발발]

쁠랙 피분송크람 수상 주도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비시 프랑스군에 대항하여 프랑스-태국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쁠랙 피분송크람 수상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비시 프랑스군에 대항하여 프랑스-태국 전쟁에 우유부단하게 관여했습니다.

1945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귀국]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학업을 마무리하고 약 10년 만에 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1939년에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중립국인 스위스에 계속 체류하며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학업을 마친 왕은 태국으로 귀국했습니다.

1946

[의문의 죽음]

방콕 왕궁 침실에서 이마에 총상을 입고 21세의 나이로 의문의 사망을 맞이했습니다. 옆에는 자동권총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아침 방콕 왕궁에 있는 자신의 침실에서 이마에서 후두부로 총탄이 관통한 상태로 사망했습니다. 옆에는 자동권총(M1911A1)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총기 폭발 사고, 자살, 타살 등 여러 가능성이 제시되었으나 최종적으로 타살 가능성이 제기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은 아직도 논란으로 남아있습니다.

[쁘리디 내각 총사퇴]

라마 8세 붕어 사건 조사위원회가 타살 가능성을 제시한 후 쁘리디 파놈용 내각이 총사퇴하고 새로운 내각이 세워졌습니다.

라마 8세 붕어사건 조사위원회는 최종적으로 사고나 자살설을 부인하고 타살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이에 쁘리디 내각은 총사퇴하고 뒤를 이은 타완 탐롱나와사왓 내각이 세워졌습니다.

1947

[타완 내각 쿠데타로 전복]

타완 탐롱나와사왓 내각이 쿠데타에 의해 전복되었습니다.

쁘리디 내각의 뒤를 이은 타완 탐롱나와사왓 내각이 쿠데타에 의해 전복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경찰은 라마 8세 살해에 관여한 혐의로 시종 세 명을 체포했습니다.

1954

[라마 8세 살해 혐의 시종 사형 확정]

라마 8세 살해 혐의로 체포된 시종 세 명에 대한 사형이 최고재판소 판결에 의해 확정되었습니다.

라마 8세 살해에 관여한 혐의로 체포된 시종 세 명의 재판은 확고한 증거 없이 상황 증거에 의존하여 진행되었으며, 피고인들은 혐의를 부인했지만 최고재판소 판결에 의해 3명 모두에 대한 사형이 확정되었습니다.

1955

[시종 3명 사형 집행]

전 국왕 라마 8세 살해 혐의로 사형이 확정된 시종 세 명에 대한 형이 논타부리 형무소에서 집행되었습니다.

라마 8세 살해 혐의로 사형이 확정된 시종 세 명에 대한 형이 논타부리의 형무소에서 집행되었습니다. 쁘리디 전 수상도 살해 모의에 참가한 것으로 의심받았지만, 1947년 11월의 쿠데타 발생 후 외국으로 망명하여 체포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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