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덕여왕
신라 여왕,군주,통치자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2:02:15
신라 제28대 왕이자 두 번째 여왕으로, 성골 출신의 마지막 왕이다. 선덕여왕 유언으로 즉위 후 김춘추, 김유신과 함께 비담의 난을 진압하며 왕권을 안정시켰다. 김춘추를 당에 파견하여 나당동맹을 체결하는 등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연호 개혁 및 중국식 의관 착용 등으로 통치 체제를 정비하며 신라의 중흥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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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7
[신라 제28대 여왕 즉위 및 비담의 난 진압]
선덕여왕의 유언에 따라 신라 제28대 왕으로 즉위했다. 김춘추와 김유신의 보좌를 받아 즉위 9일 만에 비담의 난을 진압하고, 반란군을 궤멸시키며 혼란한 국정을 빠르게 수습했다. 이후 알천을 상대등에 임명하는 등 왕권 강화를 위한 정치적 개혁을 추진했다.
사촌 언니인 신라 선덕여왕이 비담의 난을 토벌하던 도중에 서거하자 왕위를 계승하여 즉위하였다. 왕위 계승자로 내정된 김춘추의 양보로 즉위하였으며, 김춘추와 김유신의 보좌에 힘입어 즉위한 지 9일 만인 정월 17일에 비담을 비롯한 반란군을 목 베어 죽이며 난을 종식시켰다. 이후 2월에는 알천을 상대등에 임명하고 대아찬 수승을 우두주(牛頭州)의 영주로 임명하는 등 왕권 강화를 통한 정치적 개혁을 실시하여 국내 안정을 꾀했다.
[당나라에 감사 사신 파견 및 연호 개원]
당 태종이 진덕여왕을 주국 낙랑군왕으로 책봉하자, 이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했다. 또한 독자적인 연호 '인평'을 '태화'로 개원하며 자주성을 표방했다.
당 태종이 사신을 보내 부절(符節)을 가지고 선덕여왕을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추증하고, 아울러 진덕여왕을 주국(柱國) 낙랑군왕(樂浪郡王)으로 책봉하였다. 이에 가을 7월에 신라는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은혜에 감사하였다. 또한 즉위 해인 647년 정월부터 가을 7월까지 '인평'의 연호를 사용하다 '태화'로 개원하였다.
[백제 침공 격퇴 시도]
백제가 신라 내분으로 인한 불안정한 틈을 타 무산성, 감물성, 동잠성 등 세 성을 침공했다. 진덕여왕은 김유신을 파견하여 백제군에 맞서 싸우게 했다.
백제가 신라의 내정이 내분으로 불안해진 틈을 타 그해 음력 10월 신라를 침공하였다. 이에 진덕여왕은 김유신을 출전시켜 백제군에 대적하도록 하였다. 고전하여 기운이 다 빠졌으나, 김유신의 부하 비령자와 그의 아들 거진이 적진에 들어가 공격하다 죽으니, 무리들이 모두 분발하여 쳐서 3천여 명을 목 베었다.
648
[나당동맹 체결]
고구려와 백제의 지속적인 압박과 공세에 직면하자, 군사 지원을 얻기 위해 김춘추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나당동맹을 체결하는 외교적 성과를 이뤘다. 이는 삼국통일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고구려와 백제의 압박과 공세를 피하기 위한 타개책으로 군사 지원을 얻기 위해 김춘추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이로써 나·당동맹(羅唐同盟)이 체결되었다.
649
[중국 의관 최초 착용]
신라 최초로 중국식 의관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당나라와의 관계 강화 및 문화적 교류 확대를 상징하는 조치였다.
649년 봄 정월, 처음으로 중국의 의관(衣冠)을 착용하였다.
650
[독자 연호 중단 및 '태평송' 헌정]
독자 연호인 '태화'의 사용을 중지하고 당나라 연호 '영휘'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김춘추의 아들 법민을 당나라에 보내 당 태종을 칭송하는 '태평송'을 바치며 당과의 친선 관계를 공고히 했다.
650년 6월, 독자적 연호인 태화(太和)의 사용을 중지하고 당나라의 연호인 영휘(永徽)를 사용하였다. 당 태종이 죽고 당 고종이 즉위하자 650년 6월, 김춘추의 아들 법민을 사신으로 보내 직접 지은 시인 '《태평송(太平頌)》'을 지어 바쳤는데 당나라의 왕업과 황제의 은덕을 칭송하는 내용의 글이다. 태화는 신라가 독자적으로 사용한 마지막 연호이다.
651
[새해 하례식 시작 및 품주를 집사부로 개편]
조원전에서 백관으로부터 새해인사를 받는 예식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2월에는 품주를 집사부로 개편하고 죽지를 집사중시로 삼아 왕권 중심의 행정 체제를 강화했다.
651년 봄 정월 초하루, 임금이 조원전(朝元殿)에 나아가 백관으로부터 새해인사를 받았다. 새해에 하례하는 예식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2월, 품주(稟主)를 집사부(執事部)로 고치고 파진찬 죽지를 집사중시(執事中侍)로 삼아 기밀업무를 관장케 하였다. 파진찬 김인문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머물러 숙위하게 하였다.
654
[진덕여왕 붕어]
7년간의 재위 끝에 붕어하였다. 시호는 '진덕'이며 사량부에 장사 지냈다. 당 고종은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고 개부의동삼사를 추증하며 부의를 내렸다.
654년 봄 3월, 붕어하였다. 시호를 진덕(眞德)이라 하고 사량부(沙梁部)에 장사 지냈다. 당 고종이 이를 듣고 영광문(永光門)에서 애도를 표하고 태상승 장문수(張文收)를 사신으로 삼아 부절을 가지고 조문케 하였으며, 진덕왕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추증하고 부의로 비단 3백 필을 내려주었다. 사후 시안에 있는 당 태종의 능인 소릉에서 진덕여왕의 하반신 모습을 조각한 석상이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