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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인물, 장군, 정치인, 대막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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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1-17- 21:4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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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인물, 장군, 정치인, 대막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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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말기를 대표하는 장군이자 정치가. 642년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시해하고 대막리지에 올라 고구려 실권을 장악했다. 이후 당나라의 침략에 맞서 대당 항쟁을 주도하며 뛰어난 군사적,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당 태종의 대규모 침공을 여러 차례 격퇴했다. 그의 사후 고구려는 멸망의 길을 걸었으며, 자주적 기상을 보여준 인물로 재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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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사건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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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3

[최고 엘리트 가문의 장남, 태어나다]

고구려의 유력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연자유(淵子遊)와 아버지 연태조(淵太祚) 모두 최고 관직인 '막리지'를 지낸 최고 엘리트 집안의 장남이었다.

출생년도는 603년설이 유력하나, 594년설, 614년설 등 다양하여 명확하지 않습니다.

614

[소년, 전쟁터에 서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한 제2차 고수전쟁에 소년의 나이로 참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이 전쟁에서 수나라 군대를 격파하는 데 공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620

[아버지에게 쫓겨날 뻔하다]

성격이 포악하고 교만하다는 이유로 아버지 연태조에 의해 후계자 자리에서 쫓겨날 뻔했다.

그는 엎드려 사죄하고 행동을 고치겠다고 맹세한 뒤에야 간신히 후계자 자리를 유지했다.

628

[귀족들의 반대로 좌절되다]

아버지 연태조가 사망하자, 관례에 따라 그가 최고 관직 '막리지' 자리를 이어받아야 했다.

그러나 평양성의 다른 귀족들이 그의 흉포함을 이유로 반대하며 중앙 정계에서 밀려난다.

631

[천리장성 감독관으로 밀려나다]

중앙 정계에서 밀려난 그는 변방의 요새인 '천리장성(千里長城)' 축조 현장의 감독관으로 좌천성 발령을 받는다.

이는 그에게 군사력과 인력을 통제할 기회를 주는 계기가 되었다.

642

[쿠테타, 왕을 죽이다]

당나라에 유화책을 펼치던 영류왕과 귀족들이 자신을 암살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그는 즉시 자신이 축조한 천리장성의 군대를 이끌고 평양성으로 진격, 연회를 베푸는 척하며 정적 100여 명을 모조리 살육하고 영류왕을 시해했다.

그는 영류왕의 시신을 토막 내어 도랑에 버리고, 왕의 조카인 보장왕(寶藏王)을 허수아비 왕으로 세운 뒤, 스스로 '대막리지(大莫離支)'라는 최고 관직에 올라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643

[김춘추의 동맹 요청을 거절하다]

신라의 김춘추(훗날 태종무열왕)가 당나라에 대한 방어를 위해 고구려에 군사동맹을 요청하러 왔다.

연개소문은 "죽령과 한강 유역의 땅을 되돌려주면 동맹을 맺겠다"고 요구했고, 김춘추는 사실상 거절당한 채 감금되었다가 간신히 탈출했다.

이 사건은 신라가 고구려를 완전히 적으로 돌리고 당나라와의 동맹(나당동맹)을 강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불교를 탄압하고 도교를 받아들이다]

권력 장악 후, 기존 귀족 세력의 기반이었던 불교(佛敎)를 탄압하고 도교(道敎)를 국가 종교로 받아들였다.

그는 당나라에서 도사 8명과 도덕경을 들여오는 등 '친도교 반불교'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644

[당 태종, 침공을 선언하다]

당나라 태종 이세민이 연개소문의 '왕 시해'를 명분으로 고구려 침공을 선언했다.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오랜 숙적을 격파할 때"라며 전국의 군대를 소집,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645

[제1차 고당전쟁 발발]

당나라 태종이 직접 이끄는 30만 대군이 요동을 침공, 제1차 고구려-당 전쟁이 발발했다.

당군은 개모성, 요동성 등 주요 성들을 차례로 함락시키며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주필산 전투, 15만 대군이 무너지다]

연개소문은 북부의 고연수, 고혜진에게 15만 대군을 주어 당군을 요격하게 했다.

그러나 이들은 당 태종의 유인책에 말려들어 주필산 전투에서 참패하고 항복, 고구려의 주력군이 와해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

주필산전투는 당 역사서인 '구당서'와 '신당서'에 기록되어있다.

당시 고당전쟁 중 당나라 최고의 승전이 이 주필산 전투로, 당나라 입장에서는 가장 대서특필할 사건이었다.


다만 '구당서'기준 15만을 모두 포로로 사로잡은 후 평양성으로 돌려보냈다 되어있는데,

단 한 번의 전투로 사로잡기에는 '15만'이라는 숫자는 당시 고구려가 동원할 수 있는 국력의 총합으로 추정되는 수치이며, 이 많은 군병력을 모두 돌려보내주고 후에 전쟁에서는 졌다는 것이 신빙성에 많이 떨어진다. (또한 이 전투에 동원된 고구려 우군 말갈족 3천명은 모두 생매장했다고 되어있어, 주력군인 고구려군을 모두 돌려보내주었다는 것은 더더욱 신빙성이 떨어진다.)


후에 개정된 '신당서'에서는 포로로 잡은 고구려군의 수를 '3만'으로 줄여 기록하고 있다.

[기적의 방어, 안시성 전투]

고구려의 모든 성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안시성(安市城)만이 당 태종의 총공세를 3개월간 처절하게 막아냈다.

당군은 성보다 높은 토산을 쌓았으나 토산이 무너지며 오히려 고구려군에게 빼앗기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안시성 성주 양만춘(梁萬春)은 연개소문의 정변에 반대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국가적 위기 앞에서 힘을 합쳐 당군을 막아냈다. 이 전투는 연개소문의 대당(對唐) 전쟁에서 가장 극적인 승리로 기록되었다.


다만 양만춘이라는 실명은 역사적으로 매우 근거가 빈약한 이름이다.

먼 훗날 신라에서 당나라로 파견된 외교관 한 명이, 중국 측 사료에서 안시성주의 이름으로 '양만춘'이라고 기록된 것을 보았다고 말한 기록만이 신라 역사서에 적혀있을 뿐이다.

[당 태종, 굴욕적인 퇴각]

안시성 함락에 실패하고 혹독한 요동의 겨울이 닥치자, 당 태종 이세민은 결국 퇴각을 결정한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동상자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당 태종 자신도 눈에 화살을 맞았다는 야사가 전해진다.

646

[절대 권력자가 되다 (태대대로)]

전쟁 승리 후, 연개소문은 '대막리지'를 넘어 '태대대로(太大對盧)'라는 전무후무한 직위에 오른다.

그는 아들들에게도 국가의 중요 직책을 맡기며 사실상 '연개소문 왕조'를 구축,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

전통적으로 대대로는 임기가 3년인 '총리'직이었으나

현명한 인물로서 주변의 추대를 받거나 독재자인 경우 연장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였다.

647

[계속되는 당의 소모전]

당 태종은 대규모 침공이 실패하자, 소규모 부대로 국경을 계속 침략하며 고구려의 경제를 피폐하게 만드는 '소모전'으로 전략을 수정한다.

649

[숙적, 당 태종이 죽다]

고구려 침공에 평생을 바쳤던 당 태종 이세민이 사망했다.

그는 죽기 직전 "다시는 고구려를 침공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고구려는 최대의 적을 잃었다.

654

[거란을 이용한 반격, 실패하다]

당 고종(이세민의 아들)이 즉위한 후에도 고구려 침공은 계속되었다.

연개소문은 요동의 거란족을 회유하여 당나라를 공격하게 하는 등 외교전을 펼쳤으나, 거란이 다시 당에 항복하며 실패한다.

660

[백제가 멸망하다]

고구려가 북쪽의 당나라를 막는 사이, 남쪽의 신라가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다.

이로써 고구려는 남과 북 양쪽에서 적을 맞이해야 하는 최악의 전략적 위기에 봉착한다.

661

[제2차 고당전쟁, 평양성을 사수하다]

백제를 멸망시킨 나당연합군이 총력을 다해 고구려를 침공했다(제2차 고당전쟁).

당나라의 명장 소정방과 설인귀가 평양성을 포위했으나, 연개소문은 굳건히 방어에 성공하며 또다시 당군을 물리쳤다.

666

[철권 통치자, 눈을 감다]

평생을 전쟁터와 정쟁 속에서 보낸 고구려의 철권 독재자 연개소문이 사망했다.

그의 나이 63세(추정).

그의 죽음은 고구려라는 거대한 댐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균열이 되었다.

그의 죽음은 병사(病死)로 기록되어 있으나, 일각에서는 암살설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사망 시기 또한 664년, 665년 등 이견이 많습니다.

[아들들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

연개소문이 죽자마자, 그의 세 아들(남생, 남건, 남산)이 '대막리지' 자리를 놓고 즉각적인 권력 투쟁을 시작했다.

장남 남생이 지방 순시를 간 사이, 두 동생이 쿠데타를 일으켜 남생을 축출했다.

668

[고구려 700년 사직, 멸망하다]

동생들에게 쫓겨난 장남 연남생은 당나라에 항복, 고구려의 모든 군사 기밀과 약점을 알려주며 '침공의 길잡이'가 되었다.

내부가 완전히 무너진 고구려는 나당연합군의 총공세를 막지 못하고, 수도 평양성이 함락되며 멸망했다.

연개소문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휘두른 철권 통치와 독재는,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사후 아들들의 내분으로 이어져 나라를 멸망시킨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850

[전기소설의 원조, '규염객'이 되다 (야사)]

당나라 말기, <규염객전(虬髯客傳)>이라는 전기소설이 탄생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 '규염객'은 당 태종 이세민을 보고 스스로 중국을 포기한 뒤, 동쪽의 나라로 가 왕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규염객(붉은 수염의 사나이)'이라는, 엄청난 무공과 재력을 지닌 미스터리한 영웅이 등장합니다. 그는 천하를 차지하려다 당태종 이세민을 만나보고는 그의 영웅적 기상에 감탄하여 스스로 중원 쟁탈을 포기합니다. 그리고는 "나는 이 재산으로 바다 건너 동쪽 나라로 가서 왕이 되겠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납니다.


'연개소문'으로 추정하는 이유:

1. 시기: 연개소문과 당태종이 활동하던 시기와 일치합니다.

2. 이미지: 초인적인 무공과 호방한 성격을 지닌 영웅의 모습이 연개소문과 겹칩니다.

3. 행선지: '바다 건너 동쪽 나라'가 바로 고구려를 의미한다는 해석입니다.


다만, 소설속의 '규염'이 연개소문이라는 이야기는 학계에서 정설이 아닌 문학적 '해설' 또는 '설'중의 하나로 여겨집니다.


한국 만화 『천랑열전』(박성우 작)에서는 이 설을 차용하여, '규염'이라는 인물이 주인공의 스승이자 '사신무'의 창시자로 등장합니다.

1600

1600 사후 934년

[소설 속 '최종 보스'가 되다 (설당연의)]

명나라, 청나라 시대의 대중 역사소설 <설당연의(說唐演義)>에서 연개소문(중국명 개소문)은 당나라에 대적하는 강력한 '악역'이자 '최종 보스'로 완벽하게 자리 잡는다.

이 소설에서 그는 엄청난 힘을 가진 거대하고 포악한 이방의 군주로 묘사되며, 당나라 영웅들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으로 등장, 그의 이미지를 중국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당나라 입장에서 연개소문은 황제(당태종)를 패배시킨 유일한 적장이었기에, 중국 민간 설화나 고전 소설에서 매우 강력한 '최종 보스' 또는 '마왕' 같은 존재로 묘사됩니다.  


'설당연의'는 당나라의 명장 '설인귀(薛仁貴)'의 활약상을 다룬 영웅 소설입니다. 여기서 연개소문(소설에선 '막리지(莫離支)'로 불림)은 고구려의 대막리지이자, 도술(道術)을 부리는 초인적인 존재로 등장합니다.  

1650

1650 사후 984년

[설인귀의 숙적이 되다 (설인귀정동)]

<설당연의>의 영향을 받은 소설 <설인귀정동(薛仁貴征東)>은 그의 '초인적' 이미지를 극대화했다.

이 소설에서 연개소문은 하늘의 '청룡성(靑龍星)'이 환생한 존재로, '백호성(白虎星)'이 환생한 당나라 영웅 설인귀와 숙명의 대결을 펼친다.

연개소문을 이기기 위해서는 인간의 힘이 아닌, 하늘의 운명을 타고난 영웅(설인귀)이 필요했다는 설정이다. 이는 당 태종을 물리친 그의 실제 공포가 중국 민간에 얼마나 거대하게 남아있었는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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