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차이나타운

차이나타운, 관광지, 문화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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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대표적 차이나타운으로, 인천역 앞에 위치해 있다. 1884년 인천항 개항 후 청나라 조계지에서 화교들이 모여 형성되었다. 산둥 출신 화교들이 중심을 이루며 독특한 문화와 역사를 간직한다. 중국 음식점, 기념품 상점, 화교중산학교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과거 정부 정책으로 위축되기도 했으나, 1990년대 후반부터 관광 명소로 재도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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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

[제물포 개항 후보지 선정]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며 제물포가 개항 후보지로 선정되었지만, 실제 개항까지는 6년이 소요되었다.

강화도 조약 체결 후 제물포가 개항 후보지로 선정되었다. 조선과 일본 모두 다른 후보지를 물색하느라 실제 개항까지는 6년이 걸렸다.

1882

[제물포 개항지 선정]

제물포가 조선의 개항지로 최종 선정되면서 청, 일본, 서구 열강들이 앞다투어 몰려들기 시작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개항 후보지로 선정된 제물포가 6년 후 개항지로 최종 선정되었고, 청나라, 일본, 서구 열강들이 앞다투어 제물포로 몰려들었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

임오군란 후 청군 주둔 한 달 만에 조선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체결되어 청과 조선 간 정식 무역 관계가 시작되었다.

청군이 주둔한 지 한 달 후 청나라는 즉시 조선과 "상민수륙무역장정(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고 정식으로 청과 조선간의 무역관계를 맺었다.

[임오군란과 청군 파병, 화교 유입 시작]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청나라는 산둥성 주둔군을 파병하며 약 40여 명의 상인도 함께 조선에 들어와 용산 근처에서 장사를 시작, 이것이 장기 체류 화교의 시초가 되었다.

고종 19년(1882년) 6월 9일,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청나라는 조선을 돕기 위해 오장경이 지휘하는 4,500여 명의 군대와 함께 약 40여 명의 상인을 파병하였다. 이들은 청군이 주둔하던 용산 근처에서 장사를 시작하며 조선에 장기 체류하는 화교의 시초가 되었다.

1883

[인천항 개항 및 조계지 형성]

인천 제물포 각국 조계 장정이 체결되어 제물포에 조계지가 형성되었고, 인천항이 개항하며 많은 외국인들이 유입되었다.

1883년 인천제물포각국조계장정이 체결되어 제물포에 조계지가 형성되었다. 이로 인해 일본은 중구청 자리에, 청나라는 청국이사부를 세우며 외국인들이 인천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1884

[의선당 건립 (차이나타운 종교시설의 시작)]

황합경 스님이 창건한 후 청나라 상인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의선당이라는 묘우(사당)가 지어져 인천 차이나타운 내 중국 종교시설의 시작을 알렸다.

1883년 개항 이래, 인천 차이나타운 내에는 중국의 종교시설이 만들어졌다. 황합경이라는 스님이 창건하여 1884년 청나라 상인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의선당이라는 묘우(廟宇: 신위를 모셔놓은 곳, 일명 사당)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인천 차이나타운의 시작 (청조차지 형성)]

인천화상조계장정이 체결되며 지금의 인천시 선린동 일대에 청조차지가 결정되었고, 이곳에 많은 중국인이 정착하면서 오늘날 인천 차이나타운의 최초 형태가 형성되었다.

1884년 3월 7일 인천화상조계장정(仁川華商租界章程)이 체결되어 청조차지가 결정되었고, 인천시 선린동 일대 5천 평 토지에 중국 조계지가 세워졌다. 이후 이곳에 많은 중국인이 자리를 잡게 되면서 지금의 차이나타운이 유래했다.

1885

[청나라 전신선 설치]

청나라는 본국과 연결되는 전신선을 제물포에 설치하여 통신망을 구축했다.

1885년 청나라는 본국과 연결되는 전신선을 세웠다.

1887

[부산 조계지 확장]

원세개가 조선 통상 사무를 맡아 부산에 조계 지역에 대한 담판을 성공시켰다.

원세개가 조선 통상 사무를 맡아 1887년 부산, 1889년 원산에 조계지역에 대한 담판을 성공시켜 중국 조계지역은 계속해서 확장되었다.

1888

[상하이-산둥-인천 해운 노선 개시]

상하이에서 산둥성을 거쳐 인천으로 연 20회 운항하는 해운 노선이 시작되며 청나라와의 무역이 더욱 활발해졌다.

조계지가 형성된 후 청일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청나라 정부의 보호 아래 상하이와 인천을 오가는 해운 사업이 지속되었다. 1883년 취항한 남승호는 월 1~2회 나카사키와 부산을 경유하여 상하이와 인천을 오갔다. 1888년부터는 상하이에서 산둥성을 거쳐 인천으로 연 20회 운항하였다.

1889

[원산 조계지 확장]

원세개가 조선 통상 사무를 맡아 원산에 조계 지역에 대한 담판을 성공시켰다.

원세개가 조선 통상 사무를 맡아 1887년 부산, 1889년 원산에 조계지역에 대한 담판을 성공시켜 중국 조계지역은 계속해서 확장되었다.

1894

[청일전쟁 시기 중국 무역 활발]

청일전쟁이 일어나던 해, 조선의 전체 무역 중 중국 무역이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청과의 교역이 활발했다.

조계지가 형성된 후 청일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청나라 정부의 보호 아래 상하이와 인천을 오가는 해운 사업이 지속되었다. 청일전쟁 당시인 1894년 조선의 무역 가운데 중국 무역은 절반에 해당하는 13,446,363 원 이었다.

[한국 화교 정착기 시작]

조선과 '청상보호규칙'이 제정되면서 한국 화교의 정착기가 시작되었다.

1882년 청군이 주둔한 지 한 달 후 청조는 즉시 조선과 "상민수륙무역장정(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고 정식으로 청과 조선간의 무역관계를 맺었다. 12년 후인 1894년 11월 양국은 청상보호규칙(淸商保護規則)을 제정하였는데 이때가 화교들의 정착기라고 할 수 있겠다.

1898

[의화단 사변으로 화교 인구 급증]

의화단 북청사변으로 산둥성 일대가 전란에 휘말리자, 이 지역 중국인들이 피난처를 찾아 인천으로 대거 유입되면서 인천이 화교들의 주요 근거지가 되었다.

1898년 의화단 (義和團)의 북청사변(北淸事變)으로 산동성 일대가 전란에 휘말리자, 이 일대 중국인들이 피난차 가까운 한국으로 대거 건너오기 시작하였는데, 이들도 주로 인천을 자신들의 집결지로 삼았기 때문에 인천은 부지불식간에 화교들의 근거지가 되었으며 서울과 함께 화교들의 양대 세력권이 되었다.

1901

[인천화교중산학교 개교]

중산소학교로 개교한 인천화교소·중산중고등학교는 한때 학생 수가 1,500명에 달하는 큰 학교로, 화교 교육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01년 중산소학교로 개교한 이 학교는 한 때 학생수가 1,500명에 이르는 큰 학교였고, 평택이나 수원 등지에서도 화교들이 자녀를 입학시켰다.

1905

[인천에서 짜장면 탄생]

개항장 인천의 건축 붐에 맞춰 유입된 산둥성 출신 노동자들을 위한 요리업자들이 산둥성 가정 요리에 기반을 둔 짜장면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청조계지의 화상(華商)은 처음에는 광동, 홍콩 지역 출신의 남방상인이 많았으나 점차 산둥 출신의 북방상인이 늘었다. 또한 화교 노동자 역시 개항장 인천의 건축 붐에 따라 입국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은 대부분 산둥성 출신이었다. 이들을 따라 이들에게 음식을 파는 요리업자가 들어왔고, 요리업자에게 채소를 공급하기 위해 농부들이 들어왔다. 1905년 무렵 산둥성의 가정 요리에 바탕을 둔 짜장면이 만들어져 팔리기 시작하였다.

1971

[외국인 토지 취득 제한으로 화교 경제 위축]

대한민국 정부가 외국인의 주택 및 점포 보유를 제한하는 법을 시행하면서 화교들이 운영하는 대규모 음식점과 자영업이 큰 타격을 입었다.

1971년 대한민국 정부는 외국인이 한 가구에 200평 이하의 주택 한 채와 50평 이하의 점포 한 채만을 보유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외국인 토지 취득 및 관리에 관한 법〉을 시행하였다. 이 때문에 화교들이 운영하는 대규모 음식점과 자영업은 큰 타격을 맞았다. 서울의 태화관 인천의 공화춘과 같은 대형 음식점은 문을 닫았다. 이후 중국음식점은 영세한 규모를 면하기 어려웠다.

1973

[중국 식당 쌀밥 판매 금지 조치]

정부의 분식 장려 정책으로 중국 식당에서 쌀밥 판매가 금지되면서 화교들이 심리적 위축을 겪었으나, 3개월 만에 쌀밥 판매가 재개되었다.

1973년 정부는 분식 장려를 명목으로 중국식당에서 쌀밥을 팔지 못하게 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중국식당은 밀가루를 밥알처럼 때어 말린 다음 쪄서 볶음밥을 만들어야 했다. 화교 단체들의 진정으로 3개월만에 쌀밥 판매가 재개되었지만 화교들은 큰 심리적 위축을 받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의 갖가지 규제를 견디지 못한 화교들은 한국을 떠나 미국과 대만 등지로 이주하기 시작하였고 화교 인구 자체가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1975

[차이나타운 상권 쇠퇴]

인천항 여객터미널과 어시장이 연안부두로 이전하면서 인천 차이나타운은 상권을 잃고 쓸쓸히 퇴락하는 시기를 맞았다.

197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 말까지 차이나타운은 쓸쓸히 퇴락해가는 곳이었다. 인천항의 여객터미널과 어시장 등이 연안부두로 이전하면서 상권을 잃었다.

1992

[한중수교로 인한 대만과의 국교 단절]

대한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며 중화민국(대만)과 국교를 단절했지만, 인천화교중산중고등학교는 여전히 중화민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

1992년 8월 대한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며 중화민국과 국교를 단절하였지만 학교는 여전히 중화민국의 소유로 중화민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

1995

[차이나타운의 새로운 부흥 시작]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수교 이후 1990년대 후반부터 인천 차이나타운에 새로운 부흥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며 관광지로 재도약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인천 차이나타운에 새로운 부흥이 일기 시작한 것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를 맺은 1990년대 후반의 일이다.

1998

[외국인 부동산 규제 완화]

200평 이하로 소유를 제한했던 외국인 부동산 관련 법규가 완화되고 외국인에게 호의적인 정책이 시행되면서 화교 인구가 다시 증가 추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 이후 1998년 200평 이하로 소유를 제한했던 외국인 부동산 관련 법규가 풀리고, 외국인에게 호의적인 정책이 시행되면서 2001년도에는 22,917명(법무부 집계 F-2 비자 대만인 거주현황)으로 점차 안정적이 되었다.

2001

[차이나타운 관광특구 지정]

문화관광부가 차이나타운을 관광특구로 지정하고 근대문화재를 정비하면서 인천 차이나타운이 본격적인 관광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2001년 문화관광부가 차이나타운을 관광특구로 지정하고 근대문화재를 제정비하면서 관광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2005

[의선당 재개관 및 문화유산 지정]

1970년 존폐 위기에 놓였던 의선당이 화교들의 모금과 중국 정부의 지원으로 대대적인 수리를 거쳐 다시 문을 열었으며, 인천광역시 화교협회 지정 문화유산 제1호가 되었다.

화교들의 흥망성쇠를 같이 하던 의선당은 1970년 거의 존폐의 기로에 놓였다가 2005년 화교들의 모금과 중국정부의 지원으로 대대적인 수리를 거친 후 다시 문을 열었고, 현재 이곳은 인천광역시 화교협회 지정 문화유산 제 1호이다.

[서울 세계화상대회 개최]

중국의 부상과 외국 자본 유치의 중요성 부각에 따라 서울에서 제8차 세계화상대회가 개최되며 한국 화교들이 세계 화교 자본을 유치하는 교량 역할로 재도약할 기회를 마련했다.

막대한 세계 화교 자본을 국내로 유치하는 교량 역량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면서 이들이 중심이 되어 2005년 서울에서 제8차 세계화상대회(世界華商大會)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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