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조선 무관, 척신, 정치인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58:39
조선 전기, 탁월한 무예와 리더십으로 세조의 총애를 받던 무관. 이시애의 난과 여진족 토벌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20대에 병조판서에 오르는 파격적인 승진을 이룸. 세조 사후, 권력을 탐하던 유자광 등의 모함으로 역모에 휘말려 27세 젊은 나이에 비극적으로 처형됨. 약 350년 후, 순조 대에 이르러 억울한 누명을 벗고 복권되었으며, 그의 비극적인 삶은 많은 설화와 전설로 전해 내려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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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3
조선의 개국공신 남재의 현손으로, 할머니는 태종의 넷째 딸 정선공주이며, 아버지는 군수 남빈이다.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는 훗날 조선의 중요한 군인으로 성장한다.
1460
남이는 1460년(세조 6년) 무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갈 기반을 마련했다. 그의 뛰어난 무예는 세조의 눈에 띄게 된다.
1466
남이는 1466년(세조 12년) 발영시에도 급제하며 그의 뛰어난 재능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이는 그가 세조의 총애를 받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467
[이시애의 난 영웅적 진압]
함경도에서 발생한 이시애의 난 토벌대 대장이 되어 선봉으로 출정, 큰 공을 세워 당상관으로 승진하고 적개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1467년(세조 13년) 이시애의 난이 발발하자, 남이는 귀성군, 강순 등과 함께 토벌대 대장으로서 선봉에 서서 반란을 진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공로로 당상관으로 승진하고 적개공신 1등에 책록되며 의산군에 봉해졌다.
[여진족 토벌로 국경 수호]
서북변에 출몰하던 건주위 여진족 정벌에도 참여하여, 우상대장으로서 만포와 훈강을 공격, 수괴 이만주 부자를 참살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시애의 난 평정 후, 남이는 서북변을 침범하던 건주위 여진족 정벌에 우상대장으로 참여했다. 그는 만포로부터 훈강을 공격하여 여진족 수괴 이만주 부자를 참살하는 큰 공을 세워 2등 군공에 책봉되었다.
1468
[27세 병조판서 임명, 최연소 기록]
공조판서와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거쳐, 27세의 젊은 나이에 병조판서에 오르며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1468년(세조 14년), 남이는 공조판서와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임한 뒤, 그해 27세의 나이로 조선 최고의 무관직인 병조판서에 임명되는 파격적인 승진을 이뤘다. 이는 그의 능력이 세조에게 깊은 신임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자 최연소 기록이었다.
[훈구 대신들의 견제로 해임]
세조 사후, 예종 즉위와 함께 한명회, 신숙주 등 훈구 대신들의 견제로 병조판서에서 해임되고 겸사복장으로 전임되었다.
세조가 사망하고 예종이 즉위하자, 남이의 급격한 승진과 세력 확장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한명회, 신숙주 등의 훈구 대신들은 강희맹, 한계희 등을 통해 남이가 병조판서직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비판하게 만들었다. 결국 예종은 그를 병조판서에서 해임하고 겸사복장으로 전임시켰다. 이는 남이 몰락의 시작이었다.
[유자광의 모함으로 비극적인 최후]
숙직 중 혜성을 보고 “묵은 것을 없애고 새것이 들어설 징조”라고 한 말을 유자광이 역모로 모함하여, 강순 등과 함께 하옥된 뒤 군기감 앞 저자거리에서 효수당했다.
예종 즉위 후 얼마 안 된 1468년(음력 10월 27일), 남이가 숙직 중 혜성을 보고 말한 내용을 유자광이 역모로 조작하여 모함했다. 예종은 평소 남이를 시기하고 질투하여 유자광의 말을 받아들였고, 남이는 강순 등과 함께 하옥되어 결국 군기감 앞 저자거리에서 효수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이 사건은 '남이의 옥'으로 기록되며, 그의 어머니마저 연좌되어 처형당했다.
1818
[억울한 죽음, 350년 만에 복권]
순조 18년, 후손 우의정 남공철 등의 상소로 강순과 함께 관작이 복구되어 억울함을 풀었다.
1818년(순조 18년) 3월 10일, 남이의 6대 재종손인 우의정 남공철 등의 주청으로 남이는 강순과 함께 관작이 복구되며 약 350년 만에 억울한 누명을 벗고 명예를 회복했다. 시호는 충무(忠武)로 추서되었으며, 이는 그의 비극적인 죽음이 단순한 역모가 아니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