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래의 난

농민 반란, 조선 시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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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5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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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 반란, 조선 시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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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사회모순과 평안도 지역민 차별에 대한 저항으로 1811년 홍경래, 우군칙 등을 중심으로 평안도에서 일어난 대규모 농민 반란이다. 초기에는 청천강 이북을 장악하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관군에게 안주성 전투에서 패배 후 정주성에서 100여 일간 농성하다 결국 5개월 만에 진압되었다. 지도부가 처형되고 수많은 반란군이 목숨을 잃으며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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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

[홍경래의 난 발발, 가산 관아 점령]

이희저 일대가 가산군 관아를 습격하여 점령하며 홍경래의 난이 시작되었다. 군수와 그의 아버지가 살해되었고, 반란군은 초기 기세를 올리며 청천강 이북 지역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평안도 전역에 대규모 반란이 확산되었다.

1812년 1월 31일(음력 1811년 12월 18일) 새벽, 이희저가 이끄는 반란군 선봉대가 가산군 관아를 기습 점령하며 홍경래의 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가산군수 정시와 그의 아버지 정노가 살해당했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반란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정주성을 중심으로 청천강 이북 지역 대부분을 장악하며 초기 봉기에 성공했다.

[송림리 전투 패배, 정주성 농성 시작]

안주를 공략하려던 홍경래군은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해우와 목사 조종영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 박천 송림리에서 대패했다. 이 패배로 반란군의 남하가 좌절되었고, 잔여 병력은 정주성으로 들어가 100여 일간의 농성을 시작하게 되었다.

홍경래가 이끄는 반란군 본대는 남하의 첫 관문인 안주를 공략하기 위해 박천 송림리에 집결했다. 그러나 1812년 2월 11일,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해우와 목사 조종영이 지휘하는 관군이 송림리의 홍경래군을 기습 공격했다. 곽산 군수 이영식의 원군까지 가세한 관군에 의해 홍경래군은 크게 패했으며, 이로 인해 남하 계획은 좌절되고 반란군은 정주성으로 들어가 농성 태세에 돌입하게 되었다. 북진군 역시 관군에게 패배하여 주요 인물들이 정주성으로 합류했다.

[관군, 정주성 포위 및 공격 개시]

송림리 전투에서 승리한 관군 선봉대가 1812년 2월 13일 정주성에 도착하여 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했다. 이로써 정주성은 완전히 고립되었고, 반란군은 관군과 의병의 협공 속에서 100여 일간의 고립된 농성전을 벌이게 되었다.

송림리 전투에서 홍경래군을 격파한 관군의 선봉대가 1812년 2월 13일 정주성 아래에 당도하며 본격적인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곽산 전투에서 관군이 승리하여 박천과 가산 지역을 회복함으로써, 정주성을 제외한 8개 읍이 모두 관군에 의해 수복되었다. 이에 따라 정주성은 완전히 고립되었고, 반란군은 성을 굳게 지키며 관군과 사방의 의병에 맞서 여러 차례 성 밖으로 돌격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길고 힘든 농성전을 이어갔다.

[청천강 이북 지역 장악 및 용천 점령]

홍경래의 난 봉기군은 가산, 박천, 태천을 점령하고 곽산, 정주, 선천, 철산을 거쳐 용천까지 빠르게 장악하며 청천강 이북 대부분의 지역을 석권했다. 이는 반란 초기 압도적인 기세를 보여주며 의주까지 위협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봉기 이후 홍경래의 본대가 가산, 박천, 태천을 신속하게 점령했고, 북진군은 곽산과 정주를 차지한 뒤 선천, 철산을 거쳐 1812년 2월 15일에는 용천마저 함락시켰다. 이로써 반란군은 청천강 이북의 요충지들을 거의 모두 장악하며 의주 지역까지 위협하는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 점령한 지역에는 자체 행정 체계를 구축하고 군량과 군비를 조달했다.

[정주성 함락 및 홍경래의 난 진압]

관군은 땅굴을 파 화약으로 정주성 성벽을 폭파하고 성내로 돌입하여 100여 일간의 농성을 끝내고 정주성을 함락시켰다. 이로써 홍경래의 난은 발발 5개월 만에 완전히 진압되었고, 홍경래를 비롯한 주요 지도자들은 총살되거나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1812년 5월 29일, 조선 정부군은 정주성 아래로 땅굴을 파 들어가 화약으로 성벽을 폭발시키는 전술을 사용하여 성내로 돌입했다. 오랜 농성 끝에 정주성은 결국 함락되었고, 이로써 홍경래의 난은 거병 5개월 만에 완전히 진압되었다. 이 전투에서 홍경래는 총에 맞아 사망했고, 우군칙, 홍총각 등 주요 반란군 지도자들은 포로로 잡혀 한양으로 압송된 후 같은 해 음력 5월에 참형되었다. 이 과정에서 여성과 10세 이하 소년을 제외한 1,917명의 반란군이 처형되는 등 대규모 희생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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