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후

황태후, 섭정, 여자 권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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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6- 19:4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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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
황태후, 섭정, 여자 권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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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청나라의 실질적 통치자. 후궁으로 시작해 아들을 낳으며 권력 기반을 다졌고, 함풍제 사후 신유정변으로 섭정에 올라 동치제와 광서제를 허수아비로 세워 47년간 권력을 장악했다. 근대화 시기 변법자강 운동을 탄압하고 의화단의 난을 이용했으나 실패, 혼란 속에서 청나라의 멸망을 앞당긴 독재적 여성 권력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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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5

[서태후 출생]

예허나라 후이정의 딸로 태어나다.

안후이성 우후설, 네이멍구 후허하오터설, 산시성 창즈설 등 다양한 출신지 설이 있으며, 말단 관리의 딸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관직 사회의 생리를 터득하며 자랐다.

1852

[함풍제 후궁으로 발탁]

수려한 외모로 17세에 함풍제의 후궁으로 뽑혀 원명원에서 지내게 되었다. 태후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성질이 거세겠다며 난귀인으로 책봉했다.

어려서는 유복하게 생활했으나 아버지가 누명을 쓰고 홧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허드렛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이듬해 함풍제의 후궁이 되어 원명원에 들어갔고, 성질이 거세 보인다는 이유로 난귀인으로 책봉되었다.

1856

[아들 재순(동치제) 출산 및 의귀비 책봉]

함풍제의 아들 재순(훗날의 동치제)을 낳아 함풍제의 큰 기쁨을 얻었으며, 의귀비로 책봉되었다.

서태후가 아들 재순을 낳자, 함풍제는 처음으로 얻은 아들의 탄생에 크게 기뻐하며 서태후를 의귀비로 책봉하였다.

1860

[제2차 아편 전쟁으로 열하 피난]

제2차 아편 전쟁으로 영국과 프랑스에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영토를 할양한 함풍제와 함께 열하로 피난을 갔다.

영국과 프랑스에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영토를 할양하게 된 함풍제는 북쪽 지방을 러시아에 점령당하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서태후는 함풍제, 황후 뇨후루씨와 함께 열하로 피난을 갔다.

1861

[신유정변 및 섭정 시작]

함풍제 사망 후 동치제가 즉위하자 황후 뇨후루씨와 함께 태후가 되었고, 자신의 수렴청정을 반대한 숙순 등의 대신들을 숙청하고 동태후와 함께 섭정에 나섰다(신유정변).

함풍제는 서태후의 야심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조정을 어지럽히면 처형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동치제가 즉위하자 서태후는 황후 뇨후루씨와 함께 태후가 되었고, 자희단우황태후라는 휘호를 받았다. 그녀는 자신의 수렴청정을 반대한 숙순 등의 대신들을 숙청하였고 연호를 기상에서 동치로 고치고 동태후와 함께 섭정에 나섰다(신유정변).

1875

[동치제 급사 및 광서제 옹립, 재섭정 시작]

친정을 하고 싶어하는 동치제와의 알력 끝에 동치제가 20세의 나이로 급사하자, 서태후는 권력 유지를 위해 조카 재첨(광서제)을 황제로 삼고 다시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정권을 유지하려는 생모 서태후와 친정을 하고 싶어하는 동치제 간에는 알력이 생겼고, 동치제는 20세의 나이에 급사했다. 관례상 차기 황제는 동치제의 다음 항렬에서 간택해야 했지만 서태후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동치제와 같은 항렬 가운데 가장 어린 황족인 자신의 조카 재첨을 황제로 삼고 수렴청정이라는 명분 하에 다시 정권을 장악했다.

1889

[광서제 친정 시작]

광서제가 친정을 시작하며 스승 옹동화에게 학문을 배우는 등 학문에 매진했다.

서태후는 광서제를 엄격히 교육하는 한편, 사소한 부분까지 직접 신경쓰며 돈독한 모자관계를 유지하려 애썼다. 광서제가 스승 옹동화에게 학문을 배울 때에는 수업을 참관하기도 했으며, 수업을 마친 광서제는 가장 먼저 서태후 앞에서 그날 공부한 내용을 암기했다. 하지만 이 해 광서제가 친정을 시작했다.

1898

[무술변법 시도와 무술정변 발발]

광서제가 캉유웨이의 변법자강책(무술변법)을 지지하며 개혁을 시도하자, 서태후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유신파를 제거하고 광서제를 유폐시키는 무술정변을 일으켰다.

친정을 시작한 광서제는 1889년 캉유웨이의 변법자강책에 관심을 보였고, 서태후에게 좌지우지되는 자신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캉유웨이의 정책을 지지하게 되었다. 1898년 광서제는 '명정국시'라는 조서를 내려 캉유웨이의 개혁을 실행에 옮기려 했다(무술변법). 서태후도 초반에는 변법에 찬성하는 입장이었으나 광서제의 목적이 권력을 이양시키는 데에 있다는 것을 알고 변법을 지지하는 유신파를 제거하려 했다. 유신파의 핵심이었던 담사동이 위안 스카이에게 서태후를 감금하라고 부탁했고, 상황이 유신파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위안 스카이는 이 사실을 서태후의 심복 영록에게 고했다. 서태후는 자금성으로 돌아와 무술정변을 일으켜 광서제를 유폐시켰고, 황제의 병을 이유로 다시 섭정이 되었으며, 진비는 매관매직을 했다는 이유로 북삼소에 가두었다. 또한 담사동과 양예를 비롯한 유신파의 핵심 인물들을 죽이고 변법 조치들도 취소했다.

1900

[의화단의 난과 서안 피난]

서양 열강의 광서제 폐위 반대와 부준의 태자 책봉 거부에 분노한 서태후가 의화단을 구슬려 8개국 연합군과 대항하게 했으나, 북경이 함락되고 서안으로 피난을 떠났다.

서태후는 광서제 대신 단친왕 재의의 아들 부준을 즉위시키려 했으나 서양 열강은 광서제의 폐위를 반대하였다. 각국 공사들은 광서제를 진찰하게 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 광서제를 진찰한 프랑스 의사는 "황제의 맥박이 정상이며, 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발표하여 서태후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열강의 공사들은 부준의 대아가 책봉에도 축하하러 오지 않았다. 서태후와 단친왕은 본래 반청 단체였던 의화단을 구슬려 열강 8국과 대항하도록 하였다. 의화단에 의해 각국 공사관이 습격당하자 8개국 연합군은 북경을 함락시켰고, 원명원은 불에 탔으며, 그녀는 광서제와 함께 서안으로 피난을 떠나야 했다. 그녀는 평복 차림으로 피난을 갔고 먹을 것과 물을 찾지 못해 이틀이나 굶기도 했다.

1901

[신축조약 체결]

피폐해진 서태후는 열강의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지시했고, 이로 인해 불평등 조약인 신축조약이 체결되었다.

피난으로 심신이 피폐해진 서태후는 북경에 남아있던 경친왕 혁광 등에게 자신의 안전만 보장되면 열강의 어떠한 요구도 받아들이라고 지시했고 이로 인해 불평등 조약인 신축조약이 체결되었다. 북경으로 돌아온 그녀는 오만하고 보수적이었던 태도를 버리고, 연회를 열고 공사 부인들을 초대하여 대접하는 한편 그때까지 했던 것 이상으로 사치를 일삼았다.

1908

[서태후 사망]

기름진 음식과 과식으로 이질에 시달리다 사망했다. 그녀는 다시는 자신과 같은 여인이 정치에 참견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평소에 기름진 음식, 특히 고기요리를 매우 즐긴 서태후는 복부팽창과 위 기능 저하로 이질에 시달렸다. 게다가 매일 연회를 하면서 과식을 한 탓에 더욱 심했다. 결국 그로 인해 죽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는 그녀같은 여인이 정치에 참견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유언을 그녀의 신하들에게 남기고 이튿날인 11월 15일에 눈을 감았다. 서태후의 장례는 120만 냥에 달하는 금액을 들여 성대하게 치러졌고 수천 명의 사람이 장례에 동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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