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진기

법조인, 정치인, 언론인, 기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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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5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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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기는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고 판사로 활동한 수재입니다. 해방 후 이승만 정부에서 법무부 장관, 내무부 장관 등 고위직을 역임했으나, 4.19 혁명 당시 발포 명령으로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이후 언론계로 진출해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의 사장 및 회장을 지냈으며, 삼성그룹과도 깊은 인연을 맺었습니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기도 하는 등 그의 삶은 시대적 격변과 함께 논란과 업적을 동시에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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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

[일제강점기 출생]

일제강점기 고양군 한지면 하왕십리에서 출생했습니다. 이후 경성부에서 성장하며 천재라 불릴 정도로 학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홍진기는 1917년 3월 13일 일제강점기 고양군 한지면 하왕십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경성부에서 성장했으며, 당시 천재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학업 능력을 자랑했습니다.

1940

[경성제국대학 졸업 및 고등문관시험 합격]

일제 세계 1위 대학인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같은 해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며 엘리트 법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홍진기는 1940년 일제의 세계 1위 대학교인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같은 해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며 일제강점기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아 판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얻었습니다.

1942

[일제강점기 판사 활동 시작]

경성지법 사법관 시보를 시작으로 일제강점기 판사 생활을 했습니다. 조선인 차별 정책으로 꿈이었던 교수는 되지 못했지만, 법조인의 길을 걸으며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1942년 경성지법 사법관 시보를 시작으로 일제강점기 목포를 관할 구역으로 하는 전주에서 판사를 역임했습니다. 조선인 차별 정책으로 인해 그의 꿈이었던 교수가 될 수는 없었지만, 법조인으로서 활동했습니다.

1954

[법무부 차관 역임 및 제네바 회담 참석]

이승만 정부의 제7대 법무부 차관으로 임명되어 1955년 10월까지 재임했습니다. 이 기간 중 제네바 정치회의에 대한민국 대표단으로 참석하여 외교 활동을 펼쳤습니다.

해방 이후 이승만 정부의 법무부 차관이던 1954년 2월 17일부터 1955년 10월 5일까지 재임했습니다. 이 기간 중 1954년 4월부터 7월까지 제네바에서 열린 제네바 정치회의에 대한민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하여 일본의 부당한 외교적 침탈을 저지하고, 대일강화조약에서 한국에 불리한 조항을 막기 위해 노력하며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1955

[해무청장 역임]

제2대 해무청장으로 임명되어 1958년 2월까지 재직했습니다.

1955년 10월 5일 제2대 해무청장으로 임명되어 1958년 2월 20일까지 재직했습니다.

1958

[제9대 법무부 장관 역임]

제9대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1960년 3월까지 재임했습니다. 이승만 정부의 핵심 고위직으로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1958년 2월 20일 이승만 정부의 제9대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1960년 3월 23일까지 재임했습니다. 이 시기 그는 한국에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한 세가의 일원으로 활동했습니다.

1960

[제19대 내무부 장관 및 수석국무위원 역임]

제19대 내무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겨 1960년 4월까지 짧게 재임했습니다. 다음 날에는 수석국무위원으로도 임명되었습니다.

1960년 3월 23일 제19대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1960년 4월 24일까지 재임했습니다. 또한 1960년 3월 24일부터 4월 24일까지 수석국무위원을 역임했습니다.

[4.19 혁명 발포 명령 및 공직 사퇴]

4.19 혁명 당시 군사 약 2만 명을 동원하여 시위대에 발포 명령을 내렸으며, 이승만 독재정권 부역 행위의 책임을 지고 공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이후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얼마 안 가 석방되었습니다.

1960년 4.19 혁명 당시 군사 약 2만 명을 동원해 시위대에 발포 명령을 내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승만 독재정권 부역 행위의 책임을 지고 공직에서 물러났으며, 처음에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후 얼마 안 가 석방되었습니다.

1964

[언론계 진출 및 중앙라디오방송 사장 취임]

이병철 삼성 회장과 친분을 쌓았으며, 중앙라디오방송주식회사 사장에 취임하며 언론 및 기업 분야에서 새로운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4.19 혁명 이후 삼성 회장이자 훗날 사돈 관계를 맺게 될 이병철과 친분이 두터웠습니다. 1964년 중앙라디오방송주식회사 사장에 취임하며 언론계에 발을 들였습니다.

1968

[중앙일보사 대표이사 사장 취임]

중앙일보사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하며 언론사 경영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습니다.

1968년 중앙일보사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하며 언론사 경영에 본격적으로 참여했습니다.

1971

[동양방송 대표이사 역임]

주식회사 동양방송 대표이사를 역임했습니다.

1971년 주식회사 동양방송 대표이사를 역임했습니다.

1974

[중앙일보·동양방송주식회사 사장 역임]

중앙일보·동양방송주식회사 사장을 맡아 두 주요 언론사의 경영을 총괄했습니다.

1974년 중앙일보·동양방송주식회사 사장을 역임하며 언론 그룹의 핵심 경영자로 활약했습니다.

1980

[중앙일보사 회장 취임]

중앙일보사 회장에 취임하며 중앙미디어네트워크의 2대 회장으로 1986년까지 재직하며 언론 기업을 이끌었습니다.

1980년 중앙일보사 회장에 취임했으며, 1980년 7월부터 1986년 7월까지 제2대 중앙미디어네트워크 회장으로 재직하며 언론 및 미디어 그룹을 이끌었습니다.

1986

[사망]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대저택에서 향년 69세로 사망했습니다.

1986년 7월 13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대저택에서 향년 69세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2009

[친일인명사전 등재]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일제 강점기 전주지방법원 판사를 역임했던 경력 때문에 등재되었습니다.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었습니다.

2009년 11월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일제 강점기에 전주지방법원 판사를 역임했던 경력 때문에 등재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논란이 재조명되었습니다.

2011

[홍진기 창조인상 제정 및 기념 공간 마련]

그의 호(號)를 딴 ‘홍진기 창조인상’이 중앙화동재단 기금으로 제정되어 사회 발전에 기여한 인물들을 기리고 있습니다. 또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과 제주도에 그의 호를 딴 ‘유민홀’과 ‘유민미술관’이 존재합니다.

홍진기를 기리기 위해 중앙화동재단이 기금을 출연하여 사회 발전에 기여한 인물에게 수여하는 ‘홍진기 창조인상’이 제정되었습니다. 또한 그의 호(號)인 ‘유민’을 딴 ‘유민홀’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유민미술관’이 제주도에 존재하여 그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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