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광

정치인, 군인,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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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5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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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광은 제1공화국 시기 정치 깡패로 활동한 인물이다. 이정재의 인척이자 부하로 삼우회와 화랑동지회의 2인자 격이었다. 야당 집회 방해 등 정치 테러 활동에 가담했으며,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 이후 재판을 받았다.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감형되어 복역 후 출소했다. 이후 고향 이천으로 낙향해 슈퍼를 운영하며 여생을 보냈고, 1988년 사망 시 한국, 대만, 일본 폭력조직 관계자들이 장례식에 참석해 그의 영향력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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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

[유지광 출생]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나 제1공화국 시기 정치 깡패로 활동한 인물로, 이정재의 인척이자 부하였다.

유지광은 1927년 4월 21일 경기도 이천에서 출생했다. 그는 제1공화국 당시 정치 깡패로 활동했으며, 동향 출신 이정재의 인척이자 부하였다. 이정재는 유지광에게 항상 존댓말을 사용했는데, 이는 유지광의 촌수가 이정재보다 높았기 때문으로, 이정재의 고모가 유지광의 형과 결혼하여 사돈 관계가 되었다.

1950

[한국전쟁 참전 및 제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갑종장교로 입대하여 복무했으며, 휴전 후 육군 중위로 제대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지광은 갑종장교로 입대하여 1953년 휴전될 때까지 복무했다. 그는 대한민국 육군 중위로 전역했다.

1955

[삼우회 조직 및 주먹세계 활동 시작]

사돈 관계인 이정재의 권유로 '삼우회'를 조직하며 주먹세계에 뛰어들어 행동대장으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이후 조직은 '화랑동지회'로 개편되었다.

1955년, 유지광은 사돈 관계인 이정재의 권유를 받아 '삼우회'라는 별도 단체를 조직하며 주먹세계에 발을 들였다. 그는 삼우회의 행동대장으로 활약했으며, 이후 이 조직은 '화랑동지회'로 개편되었다. 그는 이 두 조직에서 2인자 격의 위치를 차지했다.

1957

[장충단 야당 집회 방해사건 주동]

이승만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야당 인사들의 대규모 집회인 '장충단 야당 집회 방해사건'의 주동자로 활약하며 정치 깡패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유지광은 공공연하게 야당 정치인 등 이승만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자들에게 테러를 가하는 활동을 했으며, 대표적으로 1957년 '장충단 야당 집회 방해사건'의 주동자로 활약했다.

1960

[4.19 혁명 후 10년형 구형]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몰락한 후, 허정 과도정부와 제2공화국에서 정치 깡패 활동 혐의로 10년형을 구형받았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자, 유지광은 허정 과도정부와 제2공화국에서 정치 깡패 활동 혐의로 이정재, 임화수 등과 함께 10년 징역형을 구형받았다.

1961

[5.16 군사정변 후 재조사 및 진술]

5.16 군사정변으로 다시 재조사를 받게 되었고, 임화수와 달리 자신의 모든 행위를 인정하며 진술하여 감형의 발판을 마련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유지광은 다시 재조사를 받게 되었다. 임화수가 자신의 가담 죄는 물론 행위까지 타인에게 덮어씌우며 진술한 것과 달리, 유지광은 모든 행위가 자신이 한 것이라고 인정하는 진술을 했다. 이는 재판 과정에서 그의 형량이 감형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사형 선고 및 감형]

재판에서 처음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혐의를 인정한 점이 참작되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이후 다시 15년형으로 추가 감형되었다.

이정재, 임화수, 곽영주 등이 사형을 선고받은 가운데, 유지광은 처음에는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그는 혐의 사실을 모두 인정한 점이 참작되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이어서 다시 징역 15년형으로 추가 감형을 받았다.

[혁명재판 최후 진술]

혁명재판에서 최후 진술을 하며 임화수와 대립, 화랑동지회가 자신이 만든 단체임을 인정하고 임화수가 반공청년단 지시로 고대생 습격사건에 더 큰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1961년 8월 21일, 혁명재판 제5호 법정에서 유지광과 임화수의 최후 진술이 있었다. 임화수가 '화랑동지회는 이정재가 만든 것'이라며 자신은 무관하다고 주장한 반면, 유지광은 '화랑동지회는 자신이 만든 것'이라며 임화수가 4.19 전날 고대생 습격에 반공청년단 명의로 지시한 일이라고 주장하며 대립했다. 유지광은 고대생 습격사건의 8할은 임화수에게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1967

[복역 후 석방]

총 5년 6개월간 복역한 후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유지광은 15년형으로 감형받았으나, 실제로는 5년 6개월간 복역한 후 석방되었다.

1978

[고향 낙향 및 슈퍼 운영]

고향인 이천으로 돌아가 '동부연쇄점'이라는 슈퍼를 운영하며 향토 발전과 봉사 활동에 힘쓰며 여생을 보냈다.

1978년, 유지광은 고향인 이천으로 낙향하여 '동부연쇄점'이라는 슈퍼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곳에서 향토 발전과 봉사 활동에 임하며 남은 여생을 보냈다.

1988

[유지광 사망]

결혼식 주례를 보던 중 갑작스러운 심근경색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장례식에는 한국은 물론 대만, 일본의 폭력조직 관계자들도 참석하여 이목을 끌었다.

1988년 11월 12일, 유지광은 결혼식 주례를 보던 도중 갑작스러운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한국 폭력조직은 물론 대만의 삼합회, 일본의 야쿠자들도 참석하여 그의 과거 영향력을 짐작하게 했다. 그의 자서전으로는 '대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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