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규석
희극인, 목사, 방송인, 기업인, 연극배우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55:34
곽규석은 '후라이 보이'라는 예명으로 1950~70년대 한국 코미디와 방송계를 이끈 희극인이자 명사회자입니다. 성대모사와 원맨쇼를 개척하며 구봉서와 콤비를 이뤄 전성기를 누렸고, 사업 실패 후 신앙에 귀의해 목회자의 길을 걸으며 미국에서 활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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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
1928년 11월 22일, 경기도 안성에서 훗날 '후라이 보이'라는 애칭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한국 연예계에 큰 족적을 남길 곽규석이 태어났다.
1948
1948년, 곽규석은 연극 무대를 통해 연예계에 처음 발을 들였고, 이듬해인 1949년에는 테너 성악가로도 데뷔하며 다양한 재능을 선보였다.
1951
['후라이 보이' 애칭을 얻으며 대중과 만나다]
공군 군악대 활동 중 우연히 명동 은성 뮤직 살롱 무대에 서게 되면서 '후라이 보이'라는 애칭을 얻고 대중에게 존재감을 알리기 시작했다.
1951년, 공군 군악대에서 활동하던 곽규석은 우연한 기회에 서울 명동의 은성 뮤직 살롱 무대에 출연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날아다니는 소년'이라는 의미의 '후라이 보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1956년에는 군 전역 후 일반 극장 무대에 정식으로 진출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1957
[영화 출연과 라디오 진행으로 활발한 활동]
영화 '후라이보이 박사 소동'에 출연하고, '후라이 보이 아워' 등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만능 엔터테이너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1957년, 곽규석은 자신의 애칭을 딴 영화 '후라이보이 박사 소동'에 주연으로 출연하며 스크린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같은 해 '후라이 보이 아워', '다이얼 Y를 돌려라', '군 위문 열차' 등 다수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뛰어난 입담과 진행 실력을 뽐내 방송인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그는 성대모사와 원맨쇼의 개척자로도 불리며 한국 코미디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1964
[대한민국 최고의 쇼 프로그램 '쇼쇼쇼' 진행]
동양방송(TBC)의 간판 프로그램 '쇼쇼쇼'의 진행을 11년간 맡으며 대한민국 최고의 MC이자 사회자로 명성을 떨쳤다.
1964년부터 곽규석은 당시 동양방송(TBC)의 대표 프로그램이었던 '쇼쇼쇼'의 진행을 무려 11년간 맡았다. 해박한 지식과 능숙한 언어 구사 능력을 바탕으로 프로그램의 성공을 이끌었으며, 한국방송의 'KBS배 전국노래자랑', 문화방송의 '청춘 만세', '토요일 토요일 밤에' 등 수많은 인기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최고의 방송 사회자로 자리매김했다.
1970
[사업 부도 후 신앙 생활 시작]
직접 설립했던 광고 회사의 부도로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신앙 생활을 시작하고 동료 연예인들과 연예인 교회를 세웠다.
1970년대 초, 곽규석은 자신이 직접 설립했던 광고 회사가 부도나면서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이 시기를 계기로 그는 신앙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동료 연예인들과 함께 서울에 연예인 교회를 설립하며 새로운 삶의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82
[연예계 은퇴와 미국 이주, 목회자의 길로]
한국방송공사(KBS) '백분 쇼' 진행을 마지막으로 대한민국에서의 연예 활동을 접고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
1982년, 곽규석은 한국방송공사(KBS)의 '백분 쇼' 진행을 끝으로 대한민국에서의 모든 연예 활동을 공식적으로 마무리했다. 그는 과감히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신학 공부를 시작하며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고, 1984년에는 세례교회 목사 안수를 받으며 정식 목회자가 되었다.
1989
[한국 선교 활동을 위한 귀국]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곽규석 목사 초청 연합전도대성회' 참석차 대한민국을 방문하며 선교 활동에 힘썼다.
미국에서 목회 활동을 하던 곽규석은 1989년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곽규석 목사 초청 연합전도대성회'에 참석하기 위해 대한민국을 방문했다. 그는 비록 미국에서 활동했지만, 고국의 선교 활동에도 꾸준히 힘을 쏟으며 신앙인으로서의 사명을 다했다.
1992
[원로목사 및 기독교 방송국 국장 역임]
뉴욕 한마음세례교회 원로목사로 활동하고 한국기독교방송국 국장을 역임하며 목회 활동을 이어갔다.
1992년, 곽규석은 뉴욕의 한마음세례교회에서 원로목사로서 교회를 섬겼고, 동시에 한국 기독교 방송국 국장을 역임하며 방송을 통한 선교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99
1999년 8월 31일, 곽규석은 지병인 췌장암으로 투병하다 향년 70세의 나이로 미국 뉴욕에서 별세했다. 한국 코미디계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후라이 보이'이자 신실한 목회자였던 그의 삶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