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갑 (희극인)
연극배우, 영화배우, 가수, 희극인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55:01
김희갑은 함경남도 출신의 대한민국 대표 연극배우이자 영화배우, 희극인이다. 1946년 반도가극단 입단으로 배우 활동을 시작했으며, 영화 '청춘쌍곡선'으로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합죽이'라는 별명으로 구봉서와 콤비를 이루며 750여 편의 영화에 출연, 독보적인 성격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실향민으로서의 한을 노래하며 대중의 사랑을 받았고, 1993년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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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
1923년 7월 13일, 함경남도 장진에서 김희갑이 태어났다. 배우 활동 초기부터 '합죽이'라는 별명으로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연극 무대와 스크린을 넘나들며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선보였고, 한국 대중문화사에 깊은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1936
1936년, 함경남도 장진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함경북도 회령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며 학업을 이어갔다.
1942
1942년, 일본 메이지 대학교 상과 별과에 입학하였으나 2학년 때 중퇴하고 1943년에 귀국하였다.
1944
1944년 조선전업주식회사에 입사하였으나 퇴직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1945
1945년 월남하여 대동신문 기자 생활을 하였으나 역시 성격에 맞지 않아 퇴직하고 배우의 길을 걷게 된다.
1946
1946년 3월, 반도가극단에 입단하며 연극계에 발을 들였다. 처음에는 프롬프터로 출발하였지만, 그의 배우로서의 재능은 곧 빛을 발하게 된다.
[<장화홍련전> 대역 출연, 배우로서 첫 발]
<장화홍련전>에서 주연 배우의 갑작스러운 잠적 덕분에 사또 역 대역으로 출연하며 배우로서 정식 데뷔했다.
1946년 11월, <장화홍련전>의 주요 배역인 사또역을 맡은 배우가 갑자기 잠적하자, 김희갑이 대역으로 출연하면서 배우로서 첫출발을 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칠공주>, <공팔용>, <옥루몽>, <에밀레종> 등 다수 작품에 출연하며 연극 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1950
한국 전쟁 중에는 선무공작단의 일원으로 종군하며 국가를 위한 활동을 펼쳤다. 이 경험은 그의 인생과 연기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1956
1956년, <청춘쌍곡선>으로 비로소 영화에 등단하여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부부독본>, <복도 많지 뭐요>, <마도의 향불>, <오부자> 등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며 영화배우로서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1959
['합죽이 구타사건' 발생]
자유당 정권 말기, 정치깡패 임화수 일당의 정치 행사 출연 강요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구타를 당해 전치 4주의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합죽이 구타사건'으로 큰 이슈가 되었다.
자유당 정권 말기, 김희갑은 반공예술인단 등을 조직하여 연예인을 정치 선전에 동원했던 정치 깡패 임화수 일당으로부터 정치 행사에 출연할 것을 빈번히 강요받았다. 그가 이를 거절하자 임화수는 그에게 전치 4주의 구타를 가했다. 이 사건은 '합죽이 구타사건'으로 당시 큰 이슈가 되었으나, 당사자인 임화수는 벌금 3만환이라는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이 사건은 김희갑의 이미지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63
[아시아영화제 및 대종상 수상]
제10회 아시아영화제에서 영화 <새댁>으로 성격배우상을 수상했고, 같은 해 제3회 대종상에서 영화 <쌀>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1963년, 영화 <새댁>을 통해 그의 독특한 연기 세계를 인정받아 제10회 아시아영화제 성격배우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제3회 대종상에서도 영화 <쌀>로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연기력을 입증했다.
1964
1964년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을 다녀왔다. 이는 그의 국제적인 위상과 활동 영역이 확장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다.
1967
[국책영화 <팔도강산> 출연 및 박정희 대통령 총애]
국책영화 <팔도강산>에 주연으로 출연하여 흥행에 성공하고, 국가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받았다.
1967년 그가 주연으로 출연한 국책영화 <팔도강산>이 흥행에 성공함으로써 국가발전의 홍보에 기여한 공로로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받기도 하였다. 이 영화는 국가 정책 홍보와 맞물려 큰 인기를 끌었다.
1968
1968년 <속 팔도강산>의 주연으로 출연하여 역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 또한 국가 발전 홍보에 기여하며 그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했다.
[《조선일보》에 '합죽이 만유통신' 연재 시작]
《조선일보》에 자전적 여행기인 《세계일주 - 합죽이 만유통신》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1968년 5월 26일부터 《조선일보》에 자신의 세계일주 경험을 담은 《세계일주 - 합죽이 만유통신》을 연재하며 작가로서의 면모도 보여주었다. (6월 9일자, 6월 18일자, 6월 20일자, 6월 23일자, 7월 4일자, 7월 16일자 등 여러 차례 연재되었다.)
1970
[1970년대 CF 출연 활발]
1970년대 롯데공업(소고기 라면, 야자라면, 새우깡, 해장국라면)과 농심(된장라면) 등 다양한 제품의 CF에 출연하며 광고 모델로서도 큰 인기를 누렸다.
1970년대에는 롯데공업의 소고기 라면, 야자라면, 새우깡, 해장국라면, 그리고 농심의 된장라면 등 여러 제품의 CF에 출연하며 당대 최고의 인기 광고 모델로 활약했다. 이는 그의 대중적 인기를 실감케 하는 부분이다.
1972
[제11회 대종상 남우조연상 수상]
제11회 대종상에서 영화 <작은 꿈이 꿈꿀 때>로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연기력을 다시 한번 인정받았다.
1972년, 영화 <작은 꿈이 꿈꿀 때>에서의 열연으로 제11회 대종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이는 그의 꾸준한 연기 활동과 성과를 보여주는 중요한 수상이었다.
1983
1983년, 럭키 솔트치약 CF에 출연하며 여전히 대중적 영향력을 과시했다.
1984
1984년, 한국베링거인겔하임의 모스타놀 CF에 배우 황정순과 함께 출연하며 변함없는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1992
1992년, 삼진기획을 통해 그의 삶과 예술적 여정을 기록한 자전회고록 <어느 광대의 사랑>을 출간하며 대중과 소통했다.
1993
1993년 5월 18일, 폐렴과 동맥경화증으로 투병하던 김희갑은 서울대학교병원에서 향년 71세를 일기로 고인이 되었다. 대한민국 영화계와 대중문화사에 큰 족적을 남긴 그의 사망 소식은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