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경제

국가 경제, 경제 발전, 산업, 무역, 교통, 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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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경제는 자본주의 기반 혼합 경제 체제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국가 주도 경제 발전을 통해 '한강의 기적'을 이루며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했습니다. 수출 주도형 성장 정책으로 전자, 자동차, 조선 등 중공업이 발달하였고, 재벌 대기업 중심의 구조와 높은 대외 의존도를 보입니다. 여러 경제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며 국제적 위상을 높여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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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

[미국 원조 식량 입하 환영식]

미국으로부터의 원조 식량 입하를 환영하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1950년대 한국 경제는 미국 잉여 농산물 및 소비재 무상 지원에 의존하는 원조 경제 체제였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기술 관료 양성과 국토 재건 사업을 시작했으며, 1950년대 한국 경제는 미국의 잉여 농산물, 소비재 등의 무상 지원을 받는 원조 경제 체제로 식량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삼백산업이 발달했지만, 생산재 산업의 부진으로 공업 부분의 불균형 현상이 나타났고, 국내 농산물 가격 하락 및 밀·면화 생산 타격으로 농업 기반이 파괴되었습니다.

1958

[미국 원조 감소 및 유상 차관 전환]

미국의 경제 불황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대미 원조가 감소하기 시작했으며, 무상 원조에서 유상 차관으로 전환되는 전환기를 맞이했습니다.

미국의 경제 불황으로 인해 대미 원조가 감소하고 유상 차관으로 전환되면서, 농촌에서는 폐농과 이농이 증가하여 한국 경제는 심각한 불황을 겪어야 했습니다.

1962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착수]

제3공화국 군사정권이 국가 주도 경제 개발의 초석을 다지기 위해 경공업 중심의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착수하고, 철강재 생산은 14만 톤을 기록했습니다.

장면 정권에서 준비되었던 경제 개발 계획이 5·16 군사정변으로 실행되지 못한 후, 군사정권인 제3공화국은 국가 중심의 경제 체제를 강화하며 경공업 중심의 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했습니다. 이 해 철강재 생산은 14만 톤을 기록하며 초기 공업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1963

[철도청 신설]

교통부 산하에 철도청이 신설되어 국가가 체계적으로 철도 시설을 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의 교통 인프라 발전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철도 및 광역전철의 체계적인 관리를 위해 1963년 9월 1일 교통부 산하에 철도청이 신설되었으며, 이때부터 국가가 철도 시설을 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1964

[수출 1억 달러 돌파 및 수출의 날 제정]

대한민국의 연간 수출액이 사상 처음으로 1억 달러를 돌파하는 쾌거를 이루었으며, 이를 기념하여 이날을 '수출의 날'로 제정했습니다. 이는 수출 주도형 경제 성장의 상징적인 시작을 알리는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기간(1962~1966년) 중 수출은 연평균 42.6%의 신장률을 기록하며 1964년 11월 30일 1억 달러를 돌파했습니다. 이를 기념하여 '수출의 날'로 정하고 있으며, 대한민국의 경제가 수출 주도형 성장으로 전환하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1965

[가입전신(TELEX) 업무 실시]

전보와 같은 가입전신(TELEX) 업무가 개시되어 국내외 통신망 확장의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이는 통신 인프라 현대화의 중요한 초기 단계였습니다.

통신사업의 현대화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1965년 12월 가입전신(TELEX) 업무가 실시되었으며, 이는 대한민국의 통신 시스템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1966

[별정우편제도 창설]

우편 서비스의 확대를 위해 별정우편제도가 창설되었습니다. 이는 특정 지역이나 단체에 우편 서비스를 제공하는 새로운 방식이었습니다.

1966년 8월 별정우편제도가 창설되어 우편 서비스의 접근성을 높이고, 다양한 형태의 우편물 교환 업무가 가능해졌습니다. 이는 통신 인프라 확충의 일환으로 진행되었습니다.

1967

[마이크로 웨이브 통신회로 개통]

마이크로 웨이브 통신회로가 개통되어 장거리 통신 효율이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이는 정보 통신 시대의 기반을 다지는 중요한 발전이었습니다.

통신 현대화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1967년 마이크로 웨이브 통신회로가 개통되었습니다. 이는 먼 거리에 있는 지점 간의 통신을 더욱 빠르고 안정적으로 가능하게 하여 통신 인프라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1968

[우편물 매일·당일 배달제 실시]

우편물 매일·당일 배달제가 실시되어 우편 서비스의 신속성과 효율성이 크게 개선되었습니다. 이는 국민 생활 편의 증진에 기여했습니다.

1968년 4월 1일 우편물 매일·당일 배달제가 실시되어 우편 서비스의 신속성을 높였습니다. 이는 통신 현대화의 기반을 다지는 중요한 조치 중 하나였습니다.

1970

[금산 위성통신지구국 개통 및 농업 인구 현황]

금산 위성통신지구국이 개통되어 국제 통신망이 대폭 확충되었습니다. 또한 농업 인구는 전체 인구의 44.7%인 1천4백42만 명을 기록하며 산업 구조의 변화를 예고했습니다.

1970년 금산 위성통신지구국이 개통되어 국제 통신 역량이 강화되었고, 같은 해 농업 인구는 1천4백42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44.7%를 차지하며 여전히 농업이 중요한 산업이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우편제도 실시]

우편제도가 본격적으로 실시되어 전국적인 우편망이 확립되었습니다. 이는 현대적인 우편 서비스의 기반을 다지는 중요한 조치였습니다.

1970년 7월 1일 우편제도가 본격적으로 실시되어 국민들이 더욱 편리하게 우편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통신사업 현대화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1971

[수출 10억 달러 돌파]

대한민국의 연간 수출액이 처음으로 10억 달러를 돌파하며 경제 성장의 가파른 속도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수출 주도형 경제 정책의 성공적인 결과였습니다.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67년~1971년) 기간 동안 연평균 수출이 35.1% 증가하여, 최종 연도인 1971년 수출액이 10억 달러를 돌파했습니다. 이는 국제 통화 체제 불안정 등 불리한 대외 무역 환경 속에서도 이룬 성과였습니다.

[서울-부산 장거리 자동 전화 개통]

서울과 부산 간 장거리 자동 전화(DDD)가 개통되어 전화 통화의 편의성이 크게 증대되었습니다. 이는 통신 현대화의 중요한 단계였습니다.

1971년 3월 서울~부산 간 장거리 자동 전화(DDD)가 개통되어 원거리 전화 통화가 간편해졌습니다. 이로써 통신 현대화의 기반이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1973

[포항제철 준공 및 제1차 오일 쇼크 발생]

포항제철이 연산 103.2만 톤 규모의 일관제철소를 준공하고 가동을 시작하며, 대한민국의 중화학 공업 발전에 결정적인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또한, 제1차 오일 쇼크가 발생하여 국제 수지 악화와 인플레이션을 겪었습니다.

1970년대 중공업 육성 정책에 따라 1973년 6월 조강 기준 연산 103.2만 톤 규모의 포항제철이 준공되어 가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1차 오일 쇼크가 발생하며 국제 수지가 악화되고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경제 성장이 마이너스로 전환되는 위기를 겪었습니다.

1974

[수도권 도시철도 첫 개통]

수도권 지역에 도시철도가 처음으로 개통되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의 대중교통 시스템이 현대화되고 도시화가 가속화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974년 8월 15일 수도권 지역에서 처음으로 도시철도가 개통되었습니다. 현재 수도권 지역은 1~9호선과 분당선, 중앙선, 경의선, 경춘선, 인천지하철까지 총 14개 노선, 504개 역, 길이 755km로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합니다.

1975

[경제사상 최저 수출 기록]

제1차 석유 파동의 여파로 스태그플레이션이 심화되며 대한민국 경제사상 최저 수준의 수출을 기록하는 등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제3차 경제 개발 계획 기간(1972~1976년) 중 1차 석유 파동과 국제 원자재 파동으로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이 심화되었고, 특히 1975년은 대한민국 경제사상 최저의 수준을 기록했으나, 비산유국으로서의 어려움을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성장 추세를 유지했습니다.

1976

[수출액 81억 달러 달성]

수출액이 81억 1,488만 달러를 기록하며 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목표를 초과 달성했습니다. 이는 정부의 강력한 수출 주도형 성장 정책과 기업의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세계 각국의 보호무역주의 추세 강화에도 불구하고 1976년 수출은 81억 1,488만 달러를 기록하며 연도별 평균 증가율을 훨씬 상회하는 성과를 보였습니다. 이는 정부의 강력한 수출 주도형 성장 정책과 업계의 부단한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입니다.

1977

[수출 100억 달러 돌파 및 제2위성통신지구국 개통]

대한민국의 연간 수출액이 100억 달러를 돌파하며 경제 성장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또한 제2위성통신지구국이 개통되어 통신 인프라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1977년 수출 100억 달러를 돌파하며 고도 성장을 이어갔습니다. 또한 제2위성통신지구국이 개통되어 국제 통신망이 더욱 확충되었으며, 이는 중공업 육성 및 중동 건설 진출을 통해 경제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1978

[제2차 오일 쇼크 발생 및 수입 자유화 조치]

제2차 오일 쇼크가 발생하여 국제 수지 악화, 높은 인플레이션 등 다시 경제 위기를 겪게 되었습니다. 이를 극복하고자 수입 자유화 조치를 단계적으로 시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제2차 오일 쇼크 발생과 더불어 중공업에 대한 과잉 투자, 높은 인플레이션 등으로 경제 성장이 마이너스로 돌아섰습니다. 정부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수출과 건설업의 중동 진출을 장려하고 1978년부터 수입 자유화 조치를 단계적으로 시행했습니다.

1979

[국제 속달 우편 제도 설치]

서울과 미국, 홍콩, 일본 간 국제 속달 우편 제도가 설치되어 국제 무역 및 교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979년 서울과 미국, 홍콩, 일본 간 국제 속달 우편 제도가 설치되어 특히 무역 분야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와 함께 국제 우편환 제도 개선 5개년 계획이 실시되고 비적성 공산국가 5개국과 소포 우편물 교환 업무가 시작되는 등 통신 분야의 국제 교류가 활발해졌습니다.

1981

[수출 200억 달러 돌파]

대한민국의 연간 수출액이 200억 달러를 돌파하며 경제 발전의 지속적인 추진력을 과시했습니다.

제4차 경제 개발 계획 기간(1977~1981년)은 2차 석유 파동으로 인한 세계 경기 침체와 보호무역주의 강화로 수출 신장세가 둔화되었으나, 1981년에는 수출 200억 달러를 돌파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 시기 수입 증가율이 수출 증가율을 상회하며 국제 수지가 악화되기도 했습니다.

1982

[해외 건설 수주고 최고치 달성]

중동 건설 시장 호황에 힘입어 해외 건설 수주고가 133억 달러를 기록하며 최고치를 달성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 건설 산업의 전성기를 보여주는 기록이었습니다.

1970년대 중동 건설 시장을 누비던 한국의 해외 건설 사업은 1982년 133억 달러를 기록하며 최고 수주고를 달성했습니다. 이는 2차 석유파동의 위력이 소진되면서 중동 산유국의 건설 투자가 막을 내리기 전 마지막 호황기였습니다.

[한국전기통신공사 발족]

한국전기통신공사가 발족하여 체신부로부터 전기통신사업 경영 및 연구, 검사 업무 등을 이관받아 독립적인 통신 사업 경영이 시작되었습니다.

1982년 1월 1일 한국전기통신공사가 발족하여 체신부로부터 전기통신사업 경영, 연구 및 실용화, 시험 및 검사 업무 등을 이관받아 업무에 들어갔습니다. 이는 통신 사업의 전문성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한국데이터통신 주식회사 설립]

컴퓨터와 전화 기능을 결합한 데이터 통신 업무를 전담할 한국데이터통신 주식회사가 설립되어 데이터 통신 시대의 개막을 알렸습니다.

1982년 4월 통신 기술 발달에 대비하여 컴퓨터와 전화 기능을 결합, 신속하고 정확하게 정보를 교환·제공할 수 있는 데이터 통신 업무를 전담할 한국데이터통신 주식회사가 한국전기통신공사와 민간기업의 공동 출자로 설립되어 데이터 통신 시대의 개막을 알렸습니다.

1983

[해외 건설 수주고 감소]

중동 산유국의 건설 투자 감소로 인해 해외 건설 수주고가 101억 달러로 급격히 감소하며, 중동 건설 시장에서의 한국 기업들의 철수가 시작되었습니다.

2차 석유 파동의 위력이 소진되고 중동 산유국의 건설 투자가 막을 내리면서, 1982년 133억 달러를 기록했던 해외 건설 수주고는 1983년 101억 달러로 감소했습니다. 이로 인해 중동에 진출해 있던 많은 한국 건설사들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1985

[수출 300억 달러 돌파]

대한민국의 연간 수출액이 300억 달러를 돌파하며 지속적인 수출 증가세를 이어갔습니다. 이는 3저 호황의 혜택을 받기 시작한 시점이었습니다.

1985년 수출은 300억 달러를 돌파하며 성장세를 이어갔습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유가 하락, 금리 하락, 달러 약세 등 이른바 '3저 호황'이라는 대외 여건의 호전으로 대한민국은 반사적인 이익을 얻게 되었고, 수출은 다시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달러 약세 반전]

국제적으로 달러가 약세로 반전되고 엔화와 마르크화가 강세로 전환되는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이는 대한민국의 수출 환경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국제 정세의 변화였습니다.

1985년 3월 강세를 보여왔던 달러가 약세로 반전하고 엔화·마르크화가 강세로 전환되었습니다. 하반기부터는 OPEC 회원국간 공조 체제가 무너지면서 원유 가격이 폭락하는 등 국제 경제 여건이 한국 경제에 유리하게 변화하는 조짐을 보였습니다.

1986

[최초 무역수지 흑자 기록]

대한민국이 대외 교역 역사상 최초로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했습니다. 이는 국가 경제가 외부 원조와 차관에 의존하던 시대를 벗어나 자립적인 성장 기반을 확립했음을 보여주는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유가 하락, 금리 하락, 달러 약세의 '3저 현상'이라는 대외 여건의 호전과 내부적인 경제 내실화가 맞물려 수출은 일대 활기를 되찾았습니다. 그 결과 1986년 대한민국은 대외 교역 역사상 최초로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했으며, 이후 그 폭이 매년 확대되었습니다.

1988

[수출 600억 달러 돌파 및 자동차 생산 100만대 초과, 아시아나항공 설립]

대한민국의 연간 수출액이 600억 달러를 돌파하며 경제 성장을 지속했습니다. 또한, 연간 국내 자동차 생산량이 100만 대를 초과하고, 아시아나항공이 설립되며 제2민간항공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1988년 수출 600억 달러를 돌파하며 3저 호황에 힘입어 고도 성장을 이어갔습니다. 같은 해 국내 연간 자동차 생산량이 100만 대를 초과하며 자동차 산업의 성장세를 보여주었고, 제2민간항공사업이 허가되면서 금호그룹의 아시아나항공이 설립되어 대한항공과 경쟁 체제로 전환되었습니다.

1989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전환]

대한민국이 무역수지 흑자 폭 확대를 통해 마침내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이는 국제 경제에서의 위상이 크게 상승했음을 의미합니다.

1986년 이후 무역수지 흑자 폭이 매년 확대되면서 1989년 대한민국은 마침내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반전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의 경제적 자립과 성장 능력을 국제적으로 입증하는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1990

[무역업체 및 무역대리업체 수 증가]

무역협회에 등록된 무역업체 수가 2만 6,666사, 무역대리점협회에 등록된 갑류 무역대리업체는 7,188사에 이르는 등 무역 관련 기업 수가 크게 증가했습니다.

1990년 2월 무역협회에 등록된 무역업체 수는 2만 6,666사(갑류 1만 3,831사, 을류 1만 2,835사, 종합무역상사 8)에 달했으며, 무역대리점협회에 등록된 갑류 무역대리업체도 7,188사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대외무역법상 자격 요건 완화와 수출입 규모 확대에 따른 결과였습니다.

1993

[쌀 개방 추진 및 조강 생산 능력 세계 6위 달성]

쌀 개방 정책이 추진되고 조강 생산 능력이 연산 3,300만 톤에 달하여 세계 6위 수준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는 철강 산업이 중진철강국에서 선진철강국으로 부상했음을 의미했습니다.

1990년대 자본·금융 시장 개방과 더불어 1993년 쌀 개방이 추진되어 농업 등 1차 산업이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한편, 한국 철강공업은 생산 설비를 지속적으로 확대한 결과 1993년 조강 생산 능력이 연산 3,300만 톤에 달하여 세계 제6위의 수준으로 설비 규모면에서 선진철강국으로 부상했습니다.

1995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새롭게 설립된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며 국제 무역 질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대외 개방과 무역 정책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1990년대 자본 및 금융 시장을 개방한 후, 1995년에는 그 해 새롭게 설립된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했습니다. 이 시기에 쌀 개방 등 농업 분야가 큰 타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1996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선진국 클럽으로 불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며 국제 사회에서 대한민국의 경제적 위상과 책임이 더욱 커졌습니다.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며 대한민국의 경제는 선진국 반열에 오르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1997년에 IMF 구제금융사건으로 인해 큰 경제난을 겪게 되었습니다.

1997

[IMF 구제금융사건 발생]

외환 부족으로 인해 국가 부도 위기에 직면하며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기업들이 파산하고 대규모 구조조정이 단행되는 등 국가적인 경제 위기를 맞았습니다.

1996년 OECD 가입 직후인 1997년 IMF 구제금융사건이 발생하여 각 기업들이 줄줄이 파산하고 대규모 실업이 발생하는 등 심각한 경제난을 겪었습니다. 국민들은 경제난 극복을 위해 금 모으기 운동을 전개하는 등 국가적 위기 극복에 동참했습니다.

1998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 추진]

IMF 위기 극복을 위해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며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인 4대 부분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IMF 구제금융사건으로 경제난을 겪던 시기, 1998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위기 극복을 위해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4대 부분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해 나아갔습니다. 이 정책은 금융, 기업, 노동, 공공 부문의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포함했습니다.

2000

[농업 인구 10% 미만으로 감소]

한국의 농업 인구가 4백3만1천 명으로 전체 인구의 8.6%를 차지하며, 처음으로 10%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이는 산업 구조의 변화와 도시화 심화를 보여주는 지표였습니다.

1960년대까지 농업에 의존하던 대한민국의 산업 구조는 공업화와 산업화 정책 추진으로 크게 변화했습니다. 2000년 12월 1일 기준 한국의 농업 인구는 4백3만1천 명으로 전체 인구의 8.6%를 차지하며, 10% 아래로 떨어지는 등 농업 인구 격감이 두드러졌습니다.

2001

[IMF 구제금융사건 체제 졸업]

스탠리 피셔 IMF 수석 부총재가 대한민국이 IMF 구제금융사건 체제를 졸업했음을 공식 선언했습니다. 이는 약 3년 8개월 만에 경제 주권을 완전히 회복하고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했음을 알리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과 국민들의 금 모으기 운동 등 전 국가적인 노력으로 2001년 8월 23일 스탠리 피셔 IMF 수석 부총재는 대한민국이 IMF 구제금융사건 체제를 졸업했음을 공식 선언했습니다. 그 후 2007년까지 매년 100억 달러 이상의 경상수지 흑자와 평균 4%대의 경제 성장을 이루어냈습니다.

2003

[저상버스 도입 및 도시철도 안전 규정 강화]

장애인 및 노약자를 위한 저상버스 도입이 시작되어 대중교통의 접근성을 높이는 노력이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대구 지하철 화재 사고 이후 도시철도 내부 자재가 불연성 재질로 변경되는 등 안전 규정이 강화되었습니다.

2003년부터 서울시는 저상버스를 도입하기 시작하여 대중교통 이용의 불편함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같은 해 발생한 대구 지하철 화재사고 이후에는 모든 지하철 및 전철의 내부 자재를 불연성 재질로만 사용하도록 규정이 변경되었고, 방독면이나 소화기 등 안전 장비 비치가 의무화되었습니다.

2004

[서울 버스 시스템 개편 및 환승 제도 시행]

서울 버스 시스템이 대대적으로 개편되고 환승 제도가 시행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서울, 경기, 인천 간 대중교통 환승 할인이 가능해져 시민들의 교통 편의가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2004년 7월부터 서울의 버스 시스템은 간선버스(파란색), 지선버스(초록색), 광역버스(붉은색) 등으로 나뉘어 운영되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환승 제도가 시행되어 서울과 경기도, 인천까지 환승 할인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이는 대중교통 이용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2005

[철도청, 한국철도공사 및 한국철도시설공단으로 전환]

국유 철도를 관리하던 철도청이 공기업 형태의 한국철도공사와 한국철도시설공단으로 전환되어 철도 운영 및 시설 관리가 분리 전문화되었습니다.

1963년 교통부 산하에 신설되어 국가가 체계적으로 관리하던 철도청은 2005년 기업체로 전환되었습니다. 공기업인 한국철도공사가 철도 운영을, 한국철도시설공단이 철도 시설 관리를 담당하게 되면서 철도 시스템의 효율성과 전문성이 증대되었습니다.

2007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타결]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이 타결되어 양국 간의 교역 장벽을 낮추고 경제 협력을 강화하는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2007년 4월 2일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이 타결되었습니다. 이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유럽연합(EU) 다음으로 거대한 자유무역 시장을 갖게 되는 중요한 조치로, 2012년 3월 15일에 정식 체결되어 발효되었습니다.

2008

[조선 산업 세계 점유율 절반 초과]

대한민국 조선 산업이 세계 전체 점유율의 절반을 넘어섰습니다. 이는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조선 강국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제조업 중 조선 산업은 2008년 기준 세계 전체 점유율의 절반을 넘어섰습니다. 이는 현대중공업 등 주요 조선 기업들의 경쟁력을 바탕으로 이룩한 세계적인 성과였습니다.

2009

[글로벌 경기 침체로 국민소득 하락 및 스크린도어 설치 계획]

미국발 세계 금융 위기 여파로 대한민국 경제가 외환 위기에 버금가는 큰 타격을 입어 국민소득이 1만 7천 달러대로 내려앉았습니다. 또한 모든 지하철역에 스크린도어를 설치할 계획이 발표되었습니다.

2000년대 후반 미국발 세계 금융 위기의 여파로 대한민국 경제는 외환 위기 때와 맞먹는 큰 타격을 입어 '경제 위기'라고까지 불리며 국민소득이 1만 7천 달러대로 내려앉았습니다. 한편, 안전 강화를 위해 2009년 안에 모든 지하철역에 스크린도어를 설치할 계획이 발표되었습니다.

2010

[국민소득 2만 달러 재돌파 및 경제 회복]

대한민국 경제가 6.2%의 높은 경제 성장률을 달성하며 명목 국민소득이 2만 달러를 재돌파했고, 실질 구매력 기준 소득은 3만 달러에 근접했습니다. 이는 세계 금융 위기 이후 빠른 회복세를 보여주었습니다.

글로벌 경기 침체 이후 2010년 대한민국은 6.2%의 높은 경제 성장률을 달성하며 빠른 회복세를 보였습니다. 이로 인해 명목 국민소득이 2만 달러를 재돌파하고, 실질 구매력 기준 소득이 3만 달러에 근접하는 등 경제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했음을 입증했습니다.

[빈곤층 증가 및 소득계층 구조 변화 발표]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빈곤층 가구 수가 3년간 37만 가구가 늘어난 305만 8천 가구이며, 인구는 약 700만 명에 달하여 소득계층 구조가 빈곤층 중심의 피라미드형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밝혀졌습니다.

2010년 3월 7일 통계청의 발표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빈곤층 가구 수는 3년간 37만 가구가 늘어난 305만 8천 가구이며, 인구는 약 700만 명에 달했습니다. 소득계층 구조가 중산층 중심의 안정적인 항아리형에서 빈곤층 중심의 피라미드형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2011

[수출액 5,000억 달러 돌파]

대한민국의 월간 수출액이 사상 처음으로 5,000억 달러를 돌파하며 강력한 수출 경쟁력을 다시 한번 입증했습니다.

2011년 11월 대한민국의 월간 수출액이 사상 처음으로 5,000억 달러를 돌파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의 수출 주도형 경제 성장이 지속적으로 성공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였습니다.

[총무역액 1조 달러 돌파 (세계 9번째)]

대한민국의 연간 총무역액이 1조 달러를 넘어서며 세계에서 9번째로 무역 규모 1조 달러 클럽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는 국제 무역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이 크게 높아졌음을 의미합니다.

2011년 11월 수출액 5,000억 달러 돌파에 이어 한 달 후인 12월, 대한민국의 연간 총무역액이 1조 달러를 넘어서 세계 9번째로 무역 규모 1조 달러를 달성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 경제의 국제적 위상을 크게 강화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2012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및 발효]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이 공식적으로 체결되고 발효되었습니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NAFTA와 EU 다음으로 거대한 자유무역 시장을 형성하며 대한민국의 대외 무역에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2007년 4월 2일 타결되었던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이 2012년 3월 15일에 공식적으로 체결되고 발효되었습니다. 이 협정으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유럽연합(EU) 다음으로 거대한 자유무역 시장이 형성되어 대한민국의 경제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2021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선진국 지위 변경]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대한민국을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지위를 공식 변경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이 공식적으로 국제 사회에서 선진국으로 인정받게 된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2020년 유엔 세계경제상황전망 보고서에서 개발도상국으로 분류되었던 대한민국은 대만, 싱가포르와 함께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리며 발전했습니다. 이후 2021년 7월 2일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공식적으로 지위를 변경했습니다. 이는 국가 주도 경제 발전과 여러 경제 위기 극복을 통해 이룬 대한민국 경제의 위상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중대한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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