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에너지 위기
에너지 위기, 석유 파동, 경제 위기, 국제 정세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48:54
1970년대에 두 차례 발생한 원유 가격 급등으로 전 세계가 경제적 타격을 입은 위기입니다.특히 한국 경제는 스태그플레이션, 마이너스 성장 등 치명적인 영향을 받았습니다.이는 국제 유가 변동의 중요성과 에너지 안보의 필요성을 부각시켰으며, 새로운 에너지원 탐색과 비축 사업을 촉발했습니다.세계 경제 및 산업 구조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주요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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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에너지 위기로 인한 전 세계 경제와 산업 변화]
1970년대 두 차례의 에너지 위기는 전 세계적인 경기 침체, 특히 스태그플레이션을 야기하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경제 호황을 끝냈습니다. 이 위기는 OPEC 이외의 새로운 산유국 출현, 국가별 전략적 석유 비축 사업의 필요성 제기, 그리고 석유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천연가스, 원자력, 태양광 등 다양한 에너지원 개발 및 다변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70년대는 두 차례의 에너지 위기로 인해 경제 성장이 제한적이거나 부정적인 시기였다. 높은 실업률과 높은 인플레이션이 겹친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하며,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경제 호황의 끝을 장식했다. 경기 침체는 미국에서 1973년 11월부터 1975년 3월까지 지속되었으며, GDP가 3.2% 감소하고 실업률이 9%에 달했다. 영국에서도 1973년부터 1975년까지 지속되어 GDP가 감소했다. 고유가는 OPEC 이외의 알래스카, 북해, 멕시코, 캐나다 등 새로운 산유국의 석유 생산 투자를 촉진했다. 1973년 위기의 결과로 많은 국가들이 에너지 위기 동안 경제와 국가 안보를 제공하기 위해 전략적 석유 비축물(SPR)을 만들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도 이 위기를 계기로 결성되어 현재 31개 회원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에너지원 수요 종류 분석 결과 1970년대 석유 소비량의 지속적인 급격한 증가가 멈추고 하향 반전되었으며, 천연가스 소비 증가세도 둔화되었다. 그 대신 원자력 에너지 사용이 회복되고, 석탄 사용 증가와 함께 태양광, 풍력발전, 조력발전, 소수력발전 등 다른 대체 에너지의 성장기로 이어졌다.
1973
[제1차 석유 위기 발생]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 발발 후 페르시아 만 6개 산유국들이 원유 감산과 가격 인상에 돌입하여 배럴당 2.9달러였던 원유 가격이 4달러를 돌파하고, 1974년 1월에는 11.6달러까지 급등하며 제1차 석유 위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전 세계가 두 자릿수 물가상승과 마이너스 성장이 겹치는 스태그플레이션을 겪었습니다.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 발발 이후 페르시아 만의 6개 산유국들이 가격인상과 감산에 돌입하면서 배럴당 2.9달러였던 두바이유 고시가격이 4달러를 돌파했다. 1974년 1월에는 11.6달러까지 올라 2~3개월 만에 무려 4배나 폭등하며 제1차 석유 위기가 시작되었다. 이 파동으로 1974년 주요 선진국들은 두 자릿수 물가상승과 마이너스 성장이 겹치는 전형적인 스태그플레이션을 겪어야 했다. 한국의 경우 1973년 3.5%였던 물가상승률은 1974년 24.8%로 수직상승했고, 성장률은 12.3%에서 7.4%로 떨어졌다. 무역수지 적자폭도 크게 확대(10억 달러→24억 달러)되었으며, 산업구조 전환 시점과 겹쳐 충격이 더욱 컸다. 후폭풍은 2년간 지속되어 1976년에야 경제가 정상을 되찾았다. 1차 파동 당시 국제유가는 약 3.9배, 한국 환율은 21.9% 상승했다.
1978
[제2차 석유 위기 발생]
1978년 12월 호메이니 주도로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발생하며 이란이 전면적인 석유 수출 중단에 나서자, 배럴당 13달러대였던 유가가 20달러를 돌파하며 제2차 석유 위기가 시작되었습니다. 1981년 1월에는 두바이유가 39달러의 정점에 도달하여 1차 파동 때보다 유가 상승 폭이 더 컸습니다.
1978년 12월 호메이니 주도로 이슬람 혁명을 일으킨 이란이 전면적인 석유수출 중단에 나서면서 배럴당 13달러대였던 유가는 20달러를 돌파했다. 1980년 9월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30달러벽이 깨졌고,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무기화를 천명한 1981년 1월 두바이유는 39달러의 정점에 도달하며 제2차 석유 위기가 발생했다. 선진국들의 충격은 1차 파동 때보다 적었지만, 한국 경제는 10·26 사건과 1980년 정치혼란이 겹치면서 1980년 실질성장률이 경제개발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2.1%)를 기록했다. 물가상승률은 28.7%에 달했고 실업률도 5%를 넘어섰다. 2차 석유 파동 역시 꼬박 2년간 한국 경제에 치명적 충격을 주었다. 2차 파동 때는 국제유가가 6개월 만에 2.3배, 한국 환율이 36.5% 상승했으며 경상수지 적자폭도 크게 증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