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관

공학자, 민족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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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4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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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학자, 민족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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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활동한 공학자이자 민족운동가입니다.

• 조선의 기술적 자립을 목표로 발명진흥운동과 과학대중화운동을 주도했습니다.

• 발명학회 설립 및 기관지 《과학조선》을 발행했습니다.

• 과학데이 행사 개최 등 민족공학자로 활약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활동을 중단했습니다.

• 해방 후 요업 관련 학회 창립에 기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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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

[김용관 탄생]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공학자이자 민족운동가 김용관이 태어났습니다.

서울에서 태어난 김용관은 일제강점기 공학자로 활동하며 민족운동을 이끌었습니다. 그의 호는 장백산입니다.

1918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제1회 졸업생으로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서울 출신인 김용관은 1918년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제1회로 졸업한 뒤 일본으로 유학하여 학문을 닦았습니다.

1924

[발명학회 설립 및 발명진흥운동 시작]

경성고공 동문들과 함께 조선의 기술적 자립을 목표로 물산장려운동의 일환인 발명진흥운동을 제창하며 발명학회를 설립, 그 지도자로 활동했습니다.

김용관은 1924년 10월 1일, 경성고등공업학교 동문들과 함께 물산장려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조선의 기술적 자립을 위한 발명진흥운동을 주장하며 발명학회를 설립하고 지도자 역할을 맡았습니다.

1932

[발명학회 재건 및 지원 활동]

기금 부족으로 활동을 중단했던 발명학회를 민족변호사 이인을 영입하여 부활시키고, 무학의 발명가들이 특허·실용신안 출원을 돕는 데 주력했습니다.

발명학회가 기금 문제로 활동을 중단하자, 1932년 김용관은 민족변호사 이인을 변리사로 영입하여 학회를 다시 활성화했습니다. 이는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한 자수성가형 발명가들의 특허 및 실용신안 출원을 지원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33

[기관지 《과학조선》 발행]

발명학회의 기관지인 《과학조선》을 발행하며 발명 및 과학 지식 보급에 힘썼습니다.

1933년부터 김용관은 발명학회의 공식 기관지인 《과학조선》을 발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잡지는 발명진흥운동의 핵심 매체로, 대중에게 과학 기술 지식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1934

[전국적인 과학 대중화 운동의 시작 '과학데이' 개최]

발명진흥운동을 전국적 운동으로 확대하기 위해 윤치호, 여운형, 송진우 등 사회 명사들을 영입하여 '과학데이' 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했습니다.

1934년 4월 19일, 김용관은 발명진흥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목표로 윤치호, 여운형, 송진우 등 사회의 저명인사들을 초청해 '과학데이' 행사를 열었습니다. 이 행사는 과학 대중화 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과학지식보급회 발족, 과학대중화운동 확산]

과학데이 행사가 과학지식보급회 발족과 과학대중화운동으로 발전하면서, 그는 이 두 운동에 모두 참여하며 대표적 민족공학자로 활약했습니다.

1934년 7월, 과학데이 행사의 성공적인 개최 이후, 이 운동은 과학지식보급회 발족과 함께 본격적인 과학대중화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김용관은 이 시기 발명진흥운동과 과학대중화운동 모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민족공학자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습니다.

1938

[투옥 및 민족 운동 중단]

미나미 지로 총독 부임 이후 일제의 동화정책과 군국주의화 분위기 속에서 투옥되었고, 결국 운동을 그만두고 황해도 재령으로 낙향해 은거했습니다.

1937년 미나미 지로 총독 부임 이후 일제의 지배가 적극적인 동화정책으로 선회하고 중일전쟁 발발로 사회가 군국주의화되면서, 과학지식보급회는 친일파에게 잠식되고 발명학회는 경쟁에 밀려났습니다. 이 시기인 1938년 김용관은 투옥되었고, 이후 모든 운동을 중단하고 황해도 재령으로 내려가 중학교 교사로 지내며 은거 생활을 했습니다. 그의 이탈은 과학대중화운동과 발명진흥운동이 친일화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1940

[과학지식보급회와 발명학회의 친일 조직으로 통폐합]

김용관의 이탈 이후, 과학대중화운동과 발명진흥운동은 친일화되어 과학지식보급회와 발명학회가 과학보급협회로 통폐합되었습니다.

김용관이 운동에서 이탈하자, 그가 이끌었던 과학대중화운동과 발명진흥운동은 완전히 친일화의 길을 걸었습니다. 1940년 12월 26일, 결국 과학지식보급회와 발명학회는 '과학보급협회'라는 하나의 친일 단체로 강제 통폐합되면서, 민족적인 과학 운동의 명맥은 끊겼습니다.

1945

[독립 이후 요업 관련 학회 창립 참여]

대한민국 독립 이후, 대한요업총협회와 한국요업학회 창립에 참여하며 국가 재건에 기여했습니다.

조국 해방 이후, 김용관은 대한민국 재건의 일환으로 대한요업총협회와 한국요업학회 창립 과정에 관여하며 전문 분야에서의 기여를 이어나갔습니다. 이는 그의 공학적 지식과 경험을 통해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1967

[김용관 사망]

공학자이자 민족운동가였던 김용관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기술 자립과 과학 대중화를 위해 헌신했던 공학자이자 민족운동가 김용관이 1967년에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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