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려
장기려 박사는 '바보 의사', '한국의 슈바이쳐'라 불릴 만큼 철저하게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살았던 한국 의학계의 거목입니다. 뛰어난 외과적 재능으로 국내 최초의 간 절제술 성공이라는 업적을 남겼음에도, 평생을 무소유의 삶으로 일관하며 복음병원과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통해 가난한 환자들의 생명을 지켰습니다. 남북 분단의 비극 속에 아내와 생이별하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오직 이웃 사랑과 인술에만 헌신한 그의 생애는 오늘날 우리 시대가 나아가야 할 참된 인간상과 의사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연표
1911
장기려 박사는 일제강점기 시절 평안북도 용천에서 장운섭과 최윤경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부유한 환경은 아니었으나 교육과 신앙을 중시하는 가풍 속에서 성장하며 타인을 위한 삶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함을 보였으며 할머니와 부모님의 가르침에 따라 정직하고 겸손한 인품을 형성했습니다.
1923
보통학교 시절부터 학업 성적이 매우 우수하였으며 특히 수리적 사고와 성실함이 돋보였습니다.
졸업 후 개성에 위치한 명문 사학 송도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여 더 넓은 세상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 기독교 신앙이 더욱 깊어졌으며 가치관 정립에 큰 영향을 미친 은사들을 만났습니다.
1928
학창 시절 장기려는 '공부해서 남 주는 삶'을 살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건히 했습니다.
고교 졸업을 앞두고 진로를 고민하던 중 병든 이들을 고치는 의술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 판단했습니다.
당시 가장 문턱이 높았던 경성의학전문학교 입학을 목표로 매진하여 합격의 영광을 안았습니다.
경성의학전문학교 입학 시험 당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며 한 가지 약속을 했습니다.
'의사가 되어 가난한 환자들을 평생 돌보겠다'는 것이 그의 간절한 서원이었습니다.
이 약속은 훗날 그가 권력과 부를 멀리하고 가난한 현장을 지키게 된 평생의 동력이 되었습니다.
1932
졸업 당시 전교 수석을 다툴 만큼 성적이 뛰어났으나 개인 병원을 차려 돈을 버는 길을 거부했습니다.
의학의 정수인 외과를 전공하기로 결심하고 당시 한국 최고의 외과 권위자인 백인제 박사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백인제 박사는 장기려의 성실함과 천재적인 손기술을 단번에 알아보고 그를 애제자로 삼았습니다.
의사로서의 첫발을 내딛는 시기에 마음이 따뜻한 김봉숙 여사를 만나 가정을 꾸렸습니다.
아내는 장기려가 의사로서 헌신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묵묵히 내조하며 곁을 지켰습니다.
훗날 전쟁으로 생이별을 하게 될 때까지 두 사람은 슬하에 여러 자녀를 두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스승 백인제 박사로부터 혹독하면서도 정교한 외과 수술 기법을 전수받았습니다.
매일 수많은 수술에 참여하며 외과 의사로서 갖춰야 할 정밀함과 인내심을 길렀습니다.
이 시기에 쌓은 임상 경험은 훗날 그가 한국 외과학의 선구자가 되는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936
단순한 수술을 넘어 의학적 발전을 위해 연구 활동에도 매진했습니다.
충수염 환자들에 대한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하여 더 안전하고 효율적인 치료법을 제시했습니다.
그의 연구는 당시 학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한국인 의사의 학문적 위상을 높였습니다.
1940
세균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한 논문으로 경성제국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한국인으로서 당대 최고의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으나 오만함 없이 연구에만 전념했습니다.
학위 취득 직후 더 낮은 곳에서 봉사하기 위해 고향과 가까운 평양으로 향할 결심을 했습니다.
경성의 안정된 자리를 뒤로하고 의료 시설이 부족했던 평양의 선교 병원을 선택했습니다.
평양 주민들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의사'라 불릴 정도로 정성을 다해 환자들을 돌봤습니다.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을 위해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약값을 대신 내주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1945
해방의 기쁨을 평양에서 맞이하였으나 곧 이어진 분단의 현실 속에서도 자리를 지켰습니다.
정치적 혼란기에도 의사는 환자 곁에 있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병원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뛰어난 실력은 북한 당국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지속적으로 의료계 요직에 기용되었습니다.
1947
북한 최고의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현대 외과학의 기초를 가르쳤습니다.
체제와 이념을 떠나 오직 의학적 진실만을 학생들에게 전달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이 시기 그의 제자들은 훗날 북한 의료계의 핵심 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1948
종교인이라는 이유로 감시와 핍박을 받기도 했으나 그의 실력만큼은 국가적으로 공인받았습니다.
그는 칭호나 명예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수술실과 강의실을 지키는 데 전념했습니다.
하지만 공산 체제 하에서 신앙의 자유가 억압받는 현실에 대해 깊은 고뇌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1950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환자를 두고 피란을 갈 수 없다며 병원을 지켰습니다.
폭격이 쏟아지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부상병들과 민간인 환자들을 수술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류애를 실천하며 전쟁의 참상을 온몸으로 목도했습니다.
유엔군의 평양 철수 당시 부상병들을 수송하던 차량에 몸을 실었습니다.
잠시 몸을 피했다 돌아올 생각이었으나 이것이 아내와 다른 자녀들과의 평생 이별이 되었습니다.
평생을 그리움 속에 산 그는 다시 만날 아내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평생 재혼하지 않고 수절했습니다.
1951
피란지 부산에서 군의관으로 임명되어 전방에서 실려 온 부상병들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밤낮없이 이어지는 수술 속에서도 환자 한 명 한 명을 정성껏 대했습니다.
군 내부에서도 그의 뛰어난 술기와 헌신적인 태도는 큰 귀감이 되었습니다.
미국인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천막 두 동으로 시작한 이 진료소가 복음병원의 시초입니다.
약 살 돈도 없는 환자들에게 무료로 의술을 베풀며 피란민들의 유일한 희망이 되었습니다.
당시 부산에서 장기려 박사의 천막 병원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구제 활동에 앞장섰습니다.
1953
부산에 머물면서도 국립대학교인 서울대학교의 교수직을 수행하며 인재를 양성했습니다.
전쟁 직후 황폐해진 의학 교육 시스템을 정비하고 현대적인 외과학 체계를 전수했습니다.
최고 대학의 교수라는 권위보다 환자를 치료하는 임상 현장을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1956
부산 지역의 의료 발전을 위해 지역 국립대학교의 기틀을 닦는 데 헌신했습니다.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며 '실력과 인품을 겸비한 의사'가 되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그가 길러낸 제자들은 훗날 영남 지역 의료계의 핵심 리더들로 성장했습니다.
의과대학의 행정적 수장으로서 투명하고 공정한 운영을 실천했습니다.
어려운 형편의 학생들을 개인적으로 후원하며 학업을 포기하지 않도록 독려했습니다.
단순한 행정가가 아닌 학생들의 영적, 도덕적 스승으로서 존경을 받았습니다.
1959
당시 의학 기술로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여겨졌던 간 절제술을 독자적인 연구 끝에 성공시켰습니다.
이 사건은 한국 외과학이 세계적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성공을 뽐내지 않고 더 많은 환자를 살릴 수 있는 길을 찾는 데 주력했습니다.
1961
학문적 업적과 덕망을 동시에 갖춘 인물로 인정받아 학회 전체를 이끌게 되었습니다.
전국의 외과 의사들에게 생명 존중의 가치를 전파하고 학문적 교류를 활성화했습니다.
그의 임기 동안 한국 외과학회는 학문적 깊이와 윤리적 기준이 한층 강화되었습니다.
1968
복음병원에 이어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또 하나의 사랑의 보금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이곳에서도 그는 직접 수술도를 들고 소외된 환자들의 고통을 치료했습니다.
병원 운영 수익은 다시 환자들을 위한 복지 기금으로 투명하게 환원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돈 걱정 없이 치료받을 수 있도록 '십시일반'의 원리를 도입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전 국민 건강보험 제도의 모태가 된 위대한 사회적 실험이었습니다.
'건강할 때 이웃을 돕고 병들었을 때 도움받자'는 그의 철학이 담긴 결과물이었습니다.
1970
수십 년간의 교수 생활을 마치고 은퇴하였으나 그의 의료 활동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서울대학교 등 여러 대학에서 그의 공적을 기려 명예 의학박사 학위를 수여했습니다.
은퇴 이후에도 그는 여전히 흰 가운을 입고 복음병원 수술실로 향했습니다.
1971
환자들의 가난이 질병의 원인임을 깊이 공감하고 이를 구조적으로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고아, 독거노인, 영세민 등 우리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들을 보듬는 활동을 펼쳤습니다.
종교적 사명감을 바탕으로 한 그의 복지 활동은 많은 사회적 동참을 끌어냈습니다.
1975
한국인에게 유독 많았던 간 질환을 극복하기 위해 학문적 구심점을 만들었습니다.
후배 의사들과 함께 최신 치료법을 연구하고 학술 발표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했습니다.
그의 학문적 리더십 덕분에 한국의 간 질환 치료 수준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
1976
의학 교육과 서민 의료 복지에 헌신한 그의 삶이 국가적으로 공인받은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훈장 수여식에서도 겸손한 자세로 모든 영광을 동료들과 환자들에게 돌렸습니다.
그에게 훈장은 명예가 아니라 더 열심히 봉사하라는 격려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졌습니다.
1979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그의 헌신적인 의료 봉사 활동이 전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상금 전액을 다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기금으로 기부하여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는 수상 소감에서 '내가 한 일은 의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며 낮췄습니다.
1981
자신이 만든 조직에 대한 권력을 휘두르지 않고 깨끗하게 후배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
명예보다 실질적인 봉사를 실천하기 위해 다시 현장의 의사로 돌아갔습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공적인 일을 대하는 참된 지도자의 자세로 칭송받았습니다.
1985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 당시 정부로부터 특별 방문 기회를 제안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만 가족을 만나는 것은 다른 실향민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며 거부했습니다.
모두가 공평하게 만날 수 있는 날을 기다리겠다는 그의 결정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1988
분단의 고통을 가장 뼈저리게 느끼면서도 북녘 땅의 동포들을 향한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정치적 구호가 아닌 신앙적 양심으로 통일의 그날을 염원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많은 실향민에게 위로가 되었으며 평화로운 통일의 중요성을 일깨웠습니다.
1990
살아있는 성자로 불리는 그의 업적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확산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처음에는 극구 사양하였으나 좋은 일에 쓰겠다는 설득에 마지못해 허락했습니다.
기념사업회는 오늘날까지 장기려 박사의 정신을 후대에 알리는 중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1991
화려한 잔치 대신 제자들과 함께 그동안의 의료 현장을 회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는 여전히 '아직도 할 일이 많다'며 건강이 허락하는 한 환자를 보겠다고 말했습니다.
수많은 제자가 그에게 절을 올리며 스승의 헌신적인 삶에 존경을 표했습니다.
1995
평생을 환자를 돌보느라 자신의 몸을 돌보지 못했던 그의 기력이 다해갔습니다.
자신이 세운 복음병원의 작은 병실에서 마지막 치료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병상에 누워서도 찾아오는 제자들에게 '환자들에게 친절하라'는 마지막 당부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가 가장 사랑했던 성탄절 아침,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가 남긴 유산은 입던 옷 몇 벌과 낡은 신발뿐이었으나 그가 남긴 사랑은 거대한 산과 같았습니다.
온 국민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이 시대의 참된 어른'을 잃었음을 슬퍼했습니다.
1996
사후에 그의 업적을 다시 한번 기리며 국가 최고의 예우를 다했습니다.
훈장은 그의 묘소 앞에 바쳐졌으며 그의 생애가 국가적 모범임을 선포했습니다.
정부는 장기려 박사의 정신을 공무원 교육과 교과서에 수록하여 기리기로 결정했습니다.
2006
단순한 자선가가 아닌 탁월한 의과학자로서의 면모를 인정받은 결과였습니다.
간 절제술 성공 등 그가 남긴 학문적 성과가 후대 과학자들에게도 큰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이로써 그는 인격과 실력을 모두 갖춘 인물로 영원히 기록되었습니다.
부산 서구 알로이시오 기념 병원 인근 등 그의 발자취가 닿은 곳에 기념관이 세워졌습니다.
많은 의사가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의료 봉사 단체를 조직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청빈한 삶은 탐욕에 물든 현대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