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려
의사, 의학자, 교수, 사회운동가, 인도주의자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46:57
장기려는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며 평생을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헌신한 외과 의사이자 사회사업가입니다. 그는 한국 최초로 간 대량 절제술을 성공시키며 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국내 최초 의료보험조합인 '청십자'를 설립하여 모든 사람이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사회 제도 개선에도 앞장섰습니다. 그의 삶은 봉사와 나눔의 정신을 실천한 빛나는 모범으로 평가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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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
1911년 10월 5일, 평안북도 용천에서 아버지 장운섭과 어머니 최윤경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습니다.
1928
1928년 송도고보를 졸업했습니다.
1932
1932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당시 최고의 외과의사였던 백인제 교수의 지도를 받아 외과학에 입문했습니다.
1940
[나고야 제국대학 의학박사 학위 취득]
나고야 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의 연구는 '충수염 및 충수염성 복막염의 세균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했습니다.
1940년 나고야 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학위는 1932년부터 약 270건의 실험에 바탕한 “충수염 및 충수염성 복막염의 세균학적 연구”로 받았습니다.
1943
[한국 최초 간암 덩어리 절제술 성공]
한국 최초로 간암 환자의 간암 덩어리를 간에서 떼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의학적 성과였습니다.
1943년 한국 최초로 간암 환자의 간암 덩어리를 간에서 떼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1948
[북한에서 박사학위 수여]
북한에서 국가학위수여위원회의 추천에 따라 박사학위를 수여받았습니다. 이는 그의 학문적 업적을 인정받은 것입니다.
1948년 북한에서 국가학위수여위원회의 추천에 따라 박사학위를 수여받아 학문적 업적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는 1947년부터 평양의과대학, 김일성종합대학의 외과 교수를 지냈습니다.
1950
[한국전쟁 중 월남 및 서울대 교수 부임]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 처자를 두고 차남 장가용과 함께 월남하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 교수가 되었습니다.
1950년 12월, 한국전쟁의 혼란 중에 처자를 두고 차남 장가용과 함께 월남하였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 교수가 되었습니다.
1951
[부산 복음병원 설립 및 무료 진료 시작]
부산 서구 암남동에 현 고신의료원의 전신인 복음병원을 설립하고, 피난민 등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무료 진료를 시작했습니다. 이는 그의 평생 인술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1951년 1월, 부산 서구 암남동에 현 고신의료원의 전신인 복음병원을 세워 피난민 등 가난한 사람을 무료진료하기 시작했으며, 1976년 6월까지 25년간 복음병원 원장으로서 인술을 베풀었습니다.
1959
[간암 환자 간 대량절제술 성공]
간암 환자의 간 대량절제술에 성공하며 간암 치료의 새 지평을 열었습니다. 이는 그의 대표적인 의학적 업적으로 꼽힙니다.
1959년 간암 환자의 간 대량절제술에 성공했습니다. 후속 연구로 ‘간내 혈관 및 담관계의 형태학적 연구’를 비롯해 ‘간 절제술의 절제단의 처치법’과 ‘간경변증시 간 절제의 한계 및 간의 급성 실조시 대상의 방법들에 관한 실험’ 등을 진행했습니다.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1959년 원발성간암에 대한 간우협절제수술(간 대량 절제수술)에 성공했습니다.
1968
[국내 최초 의료보험조합 '청십자' 설립]
한국 최초의 사설 의료보험조합인 '부산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설립했습니다. 이는 국내 의료보험 제도의 효시가 되었으며, 의료 소외 계층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1968년 5월, 한국 최초의 사설 의료보험조합인 부산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설립하여 국내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이자 현행 의료보험제도의 효시를 탄생시켰습니다. 그는 1989년 6월까지 대표이사로 역임했습니다.
1974
[한국간연구회 창립 및 초대회장 취임]
한국간연구회 창립을 주도하고 초대회장을 맡아, 한국의 간 질환 연구와 치료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1974년 한국간연구회 창립을 주도하여 초대회장을 맡았습니다. 이 연구회는 현재 대한간학회의 전신입니다.
1976
[국민훈장 동백장 수상 및 청십자병원 설립]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하며 국가로부터 봉사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또한 청십자병원을 설립하여 소외계층 복지에 더욱 헌신했습니다.
1976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했습니다. 또한 청십자병원을 설립하여 소외계층과 지역사회의 복지증진에 헌신했습니다. 그는 평생 자기 집 한 채 가지지 않고 병원 옥상 사택에서 살며 낮은 곳에서 인술을 베풀었습니다.
1979
[막사이사이상 사회봉사부문 수상]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 사회봉사부문을 수상하며 그의 인도주의적 삶과 업적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1979년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 사회봉사부문을 수상했습니다. 이 상은 그의 평생에 걸친 봉사, 박애, 무소유의 실천을 기리는 것이었습니다.
1995
[영원한 '바보 의사', 성탄절에 영면하다]
성탄절 새벽, 서울백병원에서 85세를 일기로 영면했습니다. 평생을 나눔과 봉사에 헌신한 그의 삶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 새벽, 서울백병원에서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사망하던 해에 인도주의 실천 의사 상 등을 받았습니다. 묘지는 경기도 마석의 모란공원 내에 있습니다.
1996
1996년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습니다.
2006
2006년,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로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