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걸 (교수)

과학자, 교육자, 교수, 화학공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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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4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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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걸 교수는 대한민국 과학기술 발전의 산증인입니다. 안정된 미국 교수직을 뒤로하고 귀국하여 한국과학원과 포항공과대학교를 세계적 연구중심대학으로 키워냈습니다. 특히 박사학위 및 교수 승진 요건을 국제적 수준으로 강화하며 한국 이공계 대학원의 질적 성장을 이끌었습니다. 한국 화학공학의 국제화를 주도하고 촉매 연구 분야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의 헌신은 2019년 과학기술유공자 지정으로 공식 인정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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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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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

[김영걸 교수 출생]

대한민국의 과학자이자 교육자, 포항공과대학교 명예교수인 김영걸이 태어났다.

1930년, 대한민국의 과학자, 교육자, 포항공과대학교 명예교수인 김영걸이 태어났다.

1951

[서울대학교 약학사 학위 취득]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에서 약학사 학위를 취득하며 학문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1951년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약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1958

[버크넬 대학교 화학공학 학사 취득]

미국 유학 중 버크넬 대학교에서 화학공학 학사 학위를 받으며 전문성을 확장했다.

1955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1958년 버크넬 대학교에서 화학공학 학사 과정을 마쳤다.

1963

[프린스턴 대학교 공학박사 학위 취득]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화학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하며 본격적인 연구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63년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화학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 교수 임용]

박사학위 취득 후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어 10여 년간 교육과 연구에 매진했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63년부터 1974년까지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에 교수로 임용되어 교육과 연구에 몰두해 정년보장(tenure)을 받았다.

1974

[재외과학자 유치 사업에 응답하여 한국 귀국]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의 정년 보장 교수직을 포기하고, 당시 정부의 '재외과학자 유치 사업'에 응답하여 한국으로 전격 귀국, 국내 과학기술 발전에 헌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당시 파장이 컸던 이례적인 결정이었다.

1974년 안정된 노스웨스턴 대학교 교수 직장을 뒤로 한 채 한국에 전격 귀국했다. 이는 당시 정부가 추진하던 ‘재외과학자 유치 사업’에 대한 응답으로, 미국에서 정년 보장까지 받은 교수로서는 처음으로 귀국을 단행한 것이어서 당시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한국과학원 교수로서 한국 이공계 대학원 발전의 기틀 마련]

귀국 후 한국과학원(KAIS) 화학공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교무처장, 부원장을 역임했다. 그는 연구 중심의 학사운영 체제를 뿌리내리고, 국제학술지 논문 게재를 박사학위 및 교수 승진의 필수 조건으로 삼아 한국 이공계 대학원의 연구 수준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74년 귀국 후 1987년까지 한국과학원 화학공학과 교수로서 교무처장, 부원장을 역임하며 한국과학원이 한국 최초의 대학원 대학으로 자리 잡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미국 대학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까지 틀이 잡히지 않고 있었던 한국의 이공계 대학원에 연구를 중심으로 한 학사운영 체제를 뿌리내렸다. 특히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국제학술지에 논문을 싣는 것을 필수 조건으로 삼도록 하고, 교수 승진을 위해서는 국제적 수준의 학술지에 논문 게재를 요구하여 대학원에서 이루어지는 연구의 목표 수준을 크게 높였다.

1981

[한국화학공학회 회장 역임]

1981년부터 3년간 한국화학공학회 회장으로 재임하며 학회 발전에 기여했다.

1981년부터 3년간 한국화학공학회 회장으로 재임하며 한국 화학공학의 국제화에 기여했다.

1983

[제3회 PACHEC-III 국제학회 한국 유치 및 성공적 개최]

한국화학공학회 회장 재임 중 대형 국제학회인 제3회 Pacific Chemical Engineering Congress(PACHEC-III)를 한국에 유치하고 조직위원장을 맡아, 1,100명이 넘는 인원이 참석한 가운데 성공적으로 개최하며 한국 화학공학의 국제화에 크게 기여했다.

1981년부터 3년간 한국화학공학회 회장으로 재임하며 한국 화학공학의 국제화에 기여했다. 대형 국제학회인 제3회 'Pacific Chemical Engineering Congress(PACHEC-III)'를 한국에 유치하고 조직위원장을 맡아, 1983년 1,100명을 넘는 인원이 참석한 가운데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1987

[국민훈장 동백장 및 한국화학공학회 공로상 수상]

국가와 학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동백장과 한국화학공학회 공로상을 수상했다.

1987년 국민훈장 동백장과 한국화학공학회 공로상을 수상했다.

[포항공과대학교 설립 및 연구중심대학 육성에 헌신]

1987년 포항공과대학교 창립에 합류하여 초대 화학공학과 주임교수와 초대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그는 2001년 은퇴할 때까지 포항공대를 또 하나의 연구중심대학으로 육성하는 데 전력을 다했으며, 이는 한국과학기술원과 더불어 오늘날 세계 유수의 연구중심대학으로 성장하는 발판이 되었다.

1987년 포항공과대학교가 문을 열어 거기에 합류하여, 또 하나의 연구중심 대학을 세우는데 힘썼다. 초대 화학공학과 주임교수와 초대 대학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2001년 2월 정년 은퇴할 때까지 포항공과대학교를 연구중심대학으로 육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런 노력으로, 한국과학기술원과 포항공과대학교는 오늘날 세계 유수의 연구중심대학으로 성장했다.

1991

[촉매기술연구센터 소장으로 산학 협력 및 연구 발전 주도]

1991년부터 9년간 한국과학재단 지정 우수공학연구센터인 촉매기술연구센터 소장을 맡아 촉매 연구 분야 발전을 이끌고 활발한 산학 협력을 펼쳤다.

1991년부터 9년간 한국과학재단 지정 우수공학연구센터(ERC)인 촉매기술연구센터의 소장으로 촉매 연구분야 발전을 이끌었고, 활발한 산학 협력을 펼쳤다. 또한 저명한 국제학술지 'Applied Catalysis'와 'Catalysis Review'등의 편집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93

[한국화학공학회 학술상 수상]

한국화학공학회로부터 학술적 업적을 인정받아 학술상을 수상했다.

1993년 한국화학공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1997

[아시아태평양 촉매 학회(APACS) 창립 주도 및 첫 학회 개최]

1997년 아시아태평양 촉매 학회(APACS)의 창립을 주도하고 그 첫 번째 학회인 APCAT-I을 경주에서 성공적으로 개최하며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촉매 연구 발전에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다.

1997년에는 아시아태평양 촉매 학회(APACS)의 창립을 주도하여 그 첫 번째 학회인 APCAT-I을 경주시에서 개최했다.

2001

[포항공과대학교 정년 은퇴]

포항공과대학교에서 헌신적인 교육과 연구 활동을 마치고 정년 은퇴했다.

2001년 2월 포항공과대학교에서 정년 은퇴했다.

2019

[과학기술유공자 엔지니어링 분야 지정]

평생의 연구와 교육, 그리고 한국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9년 과학기술유공자 엔지니어링 분야에 지정되었다.

한국 화학공학의 국제화와 촉매 연구분야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2019년 과학기술유공자 엔지니어링 분야에 지정되었다.

2024

[김영걸 교수 별세]

대한민국의 과학자이자 교육자, 포항공과대학교 명예교수인 김영걸이 향년 94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2024년 6월 25일, 김영걸 교수가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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