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필순

물리학자, 과학자, 핵 과학자, 원자력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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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4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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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 과학자, 핵 과학자, 원자력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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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물리학자이자 원자력 기술자립을 이끈 선구자입니다. 국방과학연구소와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핵연료 국산화, 한국형 원자로 개발, 연구용 원자로 '하나로' 개발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한국 과학기술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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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

[한필순 탄생]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나 한국 원자력 기술의 기틀을 다질 위대한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1933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한필순이 태어났습니다.

1951

[공군사관학교 입학]

19세의 나이에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1951년 19세의 나이에 부산 육군훈련소 군의학교 의무반에서 근무하다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957

[공군사관학교 졸업 (레이더 정비 장교)]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레이더 정비 장교로 복무했습니다.

1957년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레이더 정비 장교가 되었습니다.

1960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며 학문적 기반을 다졌습니다.

1960년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69

[미국 대학에서 물리학 석박사 학위 취득]

미국 일리노이 대학교에서 이학석사를, 캘리포니아 대학교 리버사이드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전문성을 강화했습니다.

1962년부터 1969년까지 미국 일리노이 대학교에서 이학석사를, 캘리포니아 대학교 리버사이드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1970

[국방과학연구소 레이저 및 야시장비 연구부장]

국방과학연구소에서 레이저 및 야시장비 연구부장으로 재직하며 국가 방위 과학 기술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1970년부터 1982년까지 국방과학연구소 레이저 및 야시장비 연구부장으로 근무했습니다.

1982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 및 한국핵연료주식회사 사장 취임]

한국에너지연구소 대덕공학센터 분소장에 임명된 후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과 한국핵연료주식회사 사장을 겸임하며 원자력 분야 연구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이는 한국 원자력 기술자립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982년 한국원자력연구원의 전신인 한국에너지연구소 대덕공학센터 분소장에 임명되었고, 이후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과 한국핵연료주식회사 사장을 역임했습니다.

1983

[핵연료 국산화 사업 계획 수립]

원자력 기술자립의 출발점이라 여긴 핵연료 국산화 사업 계획을 수립하고, 기술 훈련 대신 정예요원을 독일에 파견하여 기술을 익히게 하는 혁신적인 방법을 추진했습니다.

핵연료의 국산화가 원자력 기술자립의 출발점이라고 여기고, 1983년부터 핵연료 국산화 사업계획을 세워 추진했습니다. 개발 초기에는 캐나다 원자력공사의 기술지원을 받아보려고도 했으나 요구 금액이 너무 커 무산됐고, 대신 독일에 공동설계라는 방안을 제안하여 기술훈련을 생략하고 소수의 정예요원을 독일로 파견하여 기술을 익혀오게 했습니다.

1987

[중수로용 핵연료 국산화 성공]

오랜 노력 끝에 중수로용 핵연료 생산 공장을 세워 핵연료 국산화를 달성했으며, 이는 한국 원자력 기술자립의 중요한 성과로 기록되었습니다.

1987년에 중수로용 핵연료 생산 공장을 세워 핵연료 국산화를 달성했습니다.

[한국원자력학회 회장 역임]

한국원자력학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국내 원자력 분야 학술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1987년부터 1989년까지 한국원자력학회 회장을 역임했습니다.

1989

[경수로용 핵연료 국산화 성공]

중수로에 이어 경수로용 핵연료 생산 공장을 건설하여 국산화를 이루며, 한국 모든 원전에 국산 핵연료가 사용되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1989년에 경수로용 핵연료 생산 공장을 세워 핵연료 국산화를 달성했고, 이후 모든 한국 원전에는 국산 핵연료가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1991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훈]

한국 원자력 기술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공로를 인정받아 프랑스 국가최고 명예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습니다.

한국 원자력 기술자립을 일구어낸 공로를 인정받아 1991년 프랑스 국가최고 명예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훈했습니다.

1995

[연구용 원자로 '하나로' 개발 성공]

노후화된 연구용 원자로를 대체하기 위해 자력으로 고출력 연구용 원자로 '하나로'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나로'는 현재까지도 전 세계 연구용 원자로 중 성능면에서 최상위급으로 평가받으며 한국 원자력 기술의 우수성을 상징합니다.

1962년과 1972년에 도입한 TRIGA Mark-Ⅱ, Ⅲ이 노후화되고, 한국의 원자력기술이 날로 높아짐에 따라 고출력의 새로운 연구용 원자로가 필요해졌습니다. 이에, 원자력 기술자립이 가능해진 만큼 연구용 원자로도 자력으로 국산화 개발계획을 수립했습니다. 그 결과 1995년 연구용 원자로 '하나로'가 만들어졌고, 이는 현재까지도 전세계 연구용 원자로 중 성능면에서 최상위급으로 평가받고 있어 한국의 원자력기술의 우수성을 상징하는 성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1996

[한국 표준형 원자로 개발 및 기술자립 달성]

1980년대 초까지 해외 기술에 의존하던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한국 손으로 이끌고자 '원자로계통 설계 국산화사업'을 추진, 1996년 영광 3, 4호기 준공과 함께 1,000MW급 가압수형 원자로의 국산화율 95%를 달성하며 '한국 표준형 원자로' 개발과 기술자립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습니다.

1980년대 초까지 한국 원자력발전소 건설은 해외기술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원자력발전소 역시 우리 손으로 만들어야만 원자력 기술자립을 달성할 수 있다고 여기고, 발전소 건설의 핵심이 되는 ‘원자로계통 설계 국산화사업’을 추진했습니다. 핵연료 국산화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국과 공동설계 계약을 맺고 영광 3, 4호(한빛원자력발전소)를 대상으로 원자로계통 설계를 진행했습니다. 1996년 원전이 준공되었을 때 한국은 1,000MW급 가압수형 원자로로의 국산화율을 95%까지 달성하며 기술자립에 성공했고, ‘한국 표준형 원자로’를 가지게 됐습니다.

1997

[대덕클럽 회장 및 (주)가이아 대표이사 회장 역임]

대덕클럽 회장과 (주)가이아 대표이사 회장을 역임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97년부터 2001년까지 대덕클럽 회장 및 (주)가이아 대표이사 회장을 역임했습니다.

2010

[과학기술훈장 창조장 수훈]

대한민국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과학기술훈장 창조장을 받았습니다.

2010년 과학기술훈장 창조장을 수훈했습니다.

[한국원자력연구원 고문]

한국원자력연구원 고문으로 재직하며 오랜 경험과 지식을 후배들에게 전수했습니다.

2010년부터 2013년까지 한국원자력연구원 고문으로 재직했습니다.

2015

[한필순 사망 및 국립대전현충원 안장]

2015년 별세 후, 국가사회공헌자로서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2015년 별세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사후에 그를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묘역에 안장했습니다.

2019

[1월의 현충인물 선정]

국립대전현충원에 의해 '1월의 현충인물'로 선정되어 그의 업적이 다시 한번 기려졌습니다.

2019년 1월, 국립대전현충원에 의해 '1월의 현충인물'로 선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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