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섭
공학자, 과학자, 행정 관료, 교수, 기업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45:38
최형섭은 한국의 과학기술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저명한 공학자이자 과학자입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초대 소장으로서 연구 자율성 보장과 '계약연구제도' 도입으로 연구 활성화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이후 과학기술처 장관을 역임하며 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을 추진하고 국가 과학기술 연구 체계를 공고히 했습니다. 퇴임 후에는 개발도상국들의 과학기술 발전에 적극 자문하며 국제적 위상을 높였고, 다수의 국내외 훈장과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헌액으로 그의 업적을 인정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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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공학자 최형섭의 탄생]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난 최형섭은 대한민국의 공학자, 과학자, 행정 관료, 정치인, 기업가, 대학 교수이자 예비역 대한민국 공군 소령입니다.
최형섭은 1920년 11월 2일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은 악질 친일파 후지야마 다까모리(산청출신 최지환)입니다. 그는 공학자, 과학자, 행정 관료, 정치인이자 기업가, 대학 교수이며 예비역 대한민국 공군 소령으로 활동했습니다.
1926
최형섭은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진주에서 출생했으며 한때 경상남도 밀양, 경상북도 경주, 전라북도 전주, 황해도 해주에서 각각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1926년 경상남도 진주 향리에 귀향하여 이후 줄곧 경상남도 진주에서 성장했습니다.
1944
최형섭은 1939년 4월부터 1944년 9월까지 일본 와세다 대학교 채광야금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1950
[한국 전쟁 참전 및 공군 대위 임관]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공군 대위로 임관하여 공군본부 항공부대 정훈장교로 복무를 시작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최형섭은 1950년 10월 10일 대한민국 공군 대위로 임관하여 대한민국 공군본부 항공부대 정훈장교 직위를 거쳤습니다.
1952
최형섭은 1952년 11월 20일 대한민국 공군 소령으로 진급하였으며, 대한민국 공군본부 항공수리창 창장으로 복무했습니다.
1953
전란이 종전된 해인 1953년 12월 3일, 최형섭은 대한민국 공군 소령으로 예편했습니다.
1955
최형섭은 1954년 1월부터 1955년 8월까지 미국 노터데임 대학교 대학원 금속공학과에서 공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1958
[미네소타 대학교 공학 박사 학위 취득]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학교 대학원 화학야금공학과에서 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최고 학력을 달성했습니다.
최형섭은 1955년 9월부터 1958년 7월까지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학교 대학원 화학야금공학과에서 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1962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 역임]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으로 임명되어 1966년 2월까지 재직하며 한국의 원자력 연구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최형섭은 1962년 4월부터 1966년 2월까지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을 역임했습니다.
1966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초대 소장 부임]
한국 최초의 종합 연구기관인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의 초대 소장으로 임명되어 연구의 자율성, 안정성, 환경 조성에 힘쓰고 '계약연구제도'를 도입하여 국내 최고의 연구기관으로 성장시켰습니다.
1966년 2월, 한국 최초의 종합 연구기관인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설립되자 초대 소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연구의 자율성', '연구의 안정성', '연구 환경의 조성'을 운영이념으로 내세웠습니다. 해외 우수 과학기술자들을 유치하고 '계약연구제도'를 도입하여 기업의 참여와 연구자의 책임 있는 업무 수행을 이끌며 연구소를 짧은 기간에 국내 최고의 연구기관으로 정착시켰습니다. 이러한 운영 이념은 개발도상국의 기술 개발 모범 사례로 평가받았습니다.
1971
[대한민국 과학기술처 장관 재임]
대한민국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취임하여 7년 반 동안 재임하며 대덕연구 학원도시 건설을 추진하고 과학기술 연구 체제를 공고히 하는 등 국가 과학기술 발전을 이끌었습니다.
1971년 6월부터 1978년 12월까지 최형섭은 대한민국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재임했습니다. 그는 연구소와 학원이 공존하는 대덕연구 학원도시 건설을 추진하고, 과학기술처에 정보산업국을 설치하는 등 산업발전을 위한 과학기술 연구 체제를 공고히 했습니다. 또한, 한국과학재단의 설립에도 노력을 기울여 초대 이사장을 맡아 국가가 요청하는 연구개발 과제를 기초부터 응용, 개발연구에 이르기까지 수행하는 체제를 정립했습니다.
1980
[유엔(UN) 산하 기관 과학기술 자문 활동 시작]
일선 업무에서 퇴임한 후 유엔(UN) 산하 각 기관의 요청에 따라 개발도상국의 과학기술 개발정책 및 계획에 대해 자문하며 국제적으로 기여했습니다.
1980년 일선 업무에서 퇴임한 후 최형섭은 유엔(UN) 산하 각 기관의 요청에 따라 개발도상국의 과학기술 개발정책 및 계획에 대해 자문했으며 각종 국제회의에 초청되어 기조연설을 하고 많은 경우 의장으로서 회의를 주재했습니다. 연평균 5회 이상 개발도상국들을 방문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1988
1988년 최형섭은 유엔과학기술개발기구의 자문위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1994
[한국인 최초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외국회원 선출]
한국인 최초로 러시아과학아카데미의 외국회원으로 선출되며 그의 학문적 업적과 국제적 위상을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최형섭은 1994년 한국인 최초로 러시아과학아카데미의 외국회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이러한 활동을 정리해 단행본인 ‘개발도상상국의 공업기술연구’와 ‘개발도상국의 과학기술 개발 전략’을 펴냈습니다.
최형섭은 1994년 5월 5·16민족상을 수상했습니다.
1996
최형섭은 1996년 2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했습니다.
1997
최형섭은 1997년 5월 일본경제신문사로부터 닛케이 아시아 국제대상을 수상했습니다.
2003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헌액]
국립서울과학관의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과학위인으로 선정되어 한국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한 업적을 영구히 기리게 되었습니다.
2003년, 최형섭은 국립서울과학관의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과학위인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는 제1회 한국공학기술상 대상, 프랑스 국가공로훈장 등 국내외에서 다수의 상훈을 받았습니다.
2004
최형섭은 2004년 5월 29일, 83세의 나이로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서 사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