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만춘 (교수)

과학자, 공학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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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4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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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전기공학 박사 1호이자 선구자로, 해방 후 전력난 극복에 기여했습니다. 전력 계통의 안정화와 배전 승압 사업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여 국가 전력 인프라 발전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또한, 한국 최초의 아날로그 컴퓨터인 '연세 101' 개발에 공로를 세웠으며, 초창기 전기공학 교육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그의 업적은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대한민국 과학기술사에 큰 의미를 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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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

[한만춘 출생]

대한민국 전기공학의 선구자, 한만춘 교수가 태어났다.

1921년 6월 26일, 한만춘 교수가 태어났다. 그는 이후 연세대학교 명예교수이자 저명한 과학자, 전기공학자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과학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1943

[경성제국대학 전기공학과 졸업 및 조선전업 근무]

경성제국대학 전기공학과를 1회로 졸업 후, 조선전업에서 기획과장 및 발전과장으로 근무하며 해방 후 심각한 전력난 극복에 기여했다.

1943년 경성제국대학(現 서울대학교) 전기공학부를 1회로 졸업했다. 졸업 직후 조선전업(現 한국전력)에서 기획과장 및 발전과장으로 근무하며 해방 후 북한의 갑작스러운 단전조치에 따른 한국의 심각한 전력난 극복에 나섰다.

1948

[서울대학교 조교수 부임]

27세의 젊은 나이로 서울대학교 조교수로 부임하여 교육과 연구를 시작했다.

1948년, 27세의 젊은 나이로 서울대학교에서 조교수로 교육과 연구를 시작하며 학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1952

[전북대학교 공과대학 강의]

전북대학교 공과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1952년 전북대학교 공과대학에서 강의를 진행했다.

1955

[연세대학교 교수 부임 및 주요 보직 역임]

연세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초대 공학부장, 이공대학장, 산업대학원장 등 주요 보직을 역임했다.

1955년부터 연세대학교 교수로 근무하면서 초대 공학부장, 이공대학장, 산업대학원장, 산업기술연구소장 등을 지냈으며, 재직 중 전기공학 부문에 많은 저서를 남기며 학문 발전에 기여했다.

1958

[영국 노팅엄 대학교 대학원 유학]

한국 최초의 원자력 국비 해외파견으로 영국 노팅엄 대학교 대학원에 유학을 떠났다.

1958년부터 1960년까지 한국 최초의 원자력 국비 해외파견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 유학으로 영국 노팅엄 대학교 대학원에서 심도 깊은 연구를 진행했다.

1961

[대한민국 전기공학 박사 1호, 영국에서 학위 취득]

영국 노팅엄 대학교에서 원자로 제어 분야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대한민국 전기공학 박사 1호가 되었다.

1961년 영국 노팅엄 대학교에서 원자로의 제어 분야에 공학박사학위를 취득하며 대한민국 전기공학 박사 1호라는 영예를 안았다. 이는 한국의 원자력 기술 발전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한국 최초 아날로그 컴퓨터 '연세 101' 개발 공로]

한국 최초 아날로그 컴퓨터 '연세 101' 탄생에 공로를 세워 한국 컴퓨터 기술의 토대를 마련했다.

1961년 '연세 101 아날로그 전자계산기'의 탄생에 결정적인 공로를 세웠다. 이 계산기는 전력 계통의 안정도 개선 및 제어기 개발, 원자력 발전의 안정성 연구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되며 한국 전기전자공학 수준을 높였고, 한국 컴퓨터 기술의 토대를 마련하여 대한민국 국가등록문화재 제557호로 지정되었다.

1962

[연세대학교 이공대학장 역임]

연세대학교 이공대학장을 역임하며 학술 발전과 인재 양성에 힘썼다.

1962년부터 1984년까지 연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이공대학장 등의 주요 보직을 수행하며 학술 발전과 인재 양성에 크게 기여했다.

1970

[배전 승압 사업 이론적 근거 제시]

낮은 배전전압으로 인한 손실을 줄이기 위해 220/380V로 승압하는 정책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여 국가 전력난 해소에 크게 기여했다.

1970년대 초, 낮은 배전전압(110V) 때문에 생기는 막대한 손실을 줄이기 위해 220/380V로 승압하는 정책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다. 이 사업은 전력계통을 확충하고 1970년대 농촌 및 가정 전력보급의 전환점을 만들었으며, 많은 선진국에서 한국의 승압 성과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1972

[동탑산업훈장 수훈]

국가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1972년 국가와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동탑산업훈장을 수훈했다.

1973

[대한전기학회 회장 및 세계전기표준위원회 한국위원장 역임]

대한전기학회 회장을 역임하며 초창기 전기공학교육의 기틀을 마련했고, 세계전기표준위원회(IEC) 한국위원장도 맡았다.

1973년부터 1976년까지 대한전기학회 회장을 역임하며 초창기 전기공학교육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세계전기표준위원회(IEC) 한국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국내외 전기공학 분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1947년 대한전기학회 창립 회원이기도 하다.

1977

[서울특별시 문화상 수상]

학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1977년 학술 및 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1981

[국민훈장 동백장 수훈]

대한민국 발전과 국민 복지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했다.

1981년 대한민국 발전과 국민 복지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했다.

1984

[한만춘 교수 서거]

대한민국 전기공학 발전에 헌신한 한만춘 교수가 63세의 일기로 서거했다.

1984년 8월 5일, 대한민국 전기공학 발전에 헌신한 한만춘 교수가 63세의 일기로 서거했다. 그는 평생을 전기공학 연구와 교육에 매진하며 대한민국 과학기술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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