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신규

산림학자, 농학자, 교수, 공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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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4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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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산림 녹화의 영웅이자 선구자적 농림학자 현신규 박사.

* 한국인 최초 임업 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학문의 새 지평을 열었습니다.

* 리기테다소나무와 은사시나무를 개발, 보급하여 민둥산을 푸른 숲으로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 농촌진흥청장을 역임하며 국가 산림 정책을 이끌었고, 한국 임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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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

[한국 임학의 선구자, 현신규 출생]

민족학교 오산중학교와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뛰어난 학업 성적으로 규슈제국대학 임학과에 입학했습니다.

평안남도 안주군에서 태어난 현신규는 1924년 오산중학교에 입학한 뒤 3학년 2학기에는 휘문고등보통학교로 편입했습니다. 이후 수원고등농림학교 임과를 졸업하고, 1933년에는 규슈제국대학 농학부 임학과에 입학하여 조림학을 전공했습니다.

1936

[규슈제국대학 임학과 졸업]

일본 규슈제국대학 임학과를 졸업하며 그의 학문적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졸업 논문은 학술지에 게재될 만큼 탁월했습니다.

규슈제국대학 농학부 임학과를 졸업한 현신규는 1학년 2학기부터 일본 식물생리학 분야 최고 권위자였던 고게츠 리이치로 교수에게 지도를 받았습니다. 그의 졸업논문 '일광의 조사도 및 토양의 함수도를 달리했을 때의 소나무 및 편백의 종자발아도와 유시의 발육도 비교'는 규슈제대 농학부 학술잡지에 게재되었습니다.

1945

[해방 후 교육 및 연구 활동 시작]

해방 후 수원농림전문학교 조교수와 미군정청 임업시험장장 등을 역임하며 새로운 시대의 임학 발전을 위한 기반을 다졌습니다.

1945년 9월 수원농림전문학교 조교수로 부임했으며, 10월에는 미군정청 임업시험장장, 1946년 1월에는 수원농림전문학교 교수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임학의 재건에 힘썼습니다.

1949

[한국인 최초 임업 박사 학위 취득]

한국인 최초로 임업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며 대한민국 임학 연구의 새 지평을 열었습니다.

1949년 7월, 규슈제국대학에서 농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임업 분야의 박사가 되었습니다. 이는 한국 임학 역사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1951

[선진 임목육종 연구 및 연구소 설립]

미국에서 임목육종에 대한 선진 연구를 진행하고 귀국 후 서울대학교에 임목육종학연구소를 설립하여 체계적인 육종 연구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1951년 1월 미국 산림유전연구소에서 임목육종에 관한 연구를 마치고 돌아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내에 임시 시험육종장을 세웠습니다. 같은 해 10월에는 '임목육종학연구소'를 정식으로 설립하여 국내 임목 육종 연구를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1952

[리기테다소나무 개발 및 보급]

대한민국의 황폐한 산림을 푸르게 할 '기적의 나무' 리기테다소나무를 개발하여 전국에 보급했습니다. 이 품종은 해충과 추위에 강하고 성장 속도가 빨라 산림녹화에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미국에서 귀국한 후 리기테다소나무를 개발했습니다. 1955년 봄부터 수원시 농대연습림에서 대규모 인공교배 시험을 실시했고, 이듬해 얻은 잡종 종자를 파종하여 묘목으로 육종한 후 전국에 마련한 시험 조림지에 심었습니다. 리기테다소나무는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서 탁월한 육종 성과로 인정받고, 미국 상원에서도 '한국의 기적의 소나무'로 보고될 만큼 그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1959

[대한민국학술원 학술공로상 수상]

대한민국학술원 학술공로상을 수상하며 그의 학문적 업적과 기여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의 뛰어난 연구 성과와 한국 임학 발전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아 대한민국학술원 학술공로상을 수상했습니다.

1960

[한국임학회 창립 및 초대회장 역임]

한국임학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을 맡아 국내 임학 연구와 학술 교류를 선도하며 한국 임학의 발전에 초석을 다졌습니다.

1960년 한국임학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으로 임학 발전을 선도했습니다. 이는 한국 임학 분야의 체계적인 학술 활동과 연구 발전을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963

[제2대 농촌진흥청장 취임]

제2대 농촌진흥청장으로 취임하여 국가 농림 정책을 총괄하며 산림 자원 확보와 농업 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1963년 7월 4일 제2대 농촌진흥청장으로 취임하여 1965년 8월 26일까지 재임하며 국가적인 산림 녹화 및 농업 진흥 정책을 진두지휘했습니다.

1964

[3·1문화상 수상]

3·1문화상을 수상하며 학문적 업적과 사회적 기여를 인정받았습니다.

국가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3·1문화상을 수상했습니다.

1965

[은사시나무 등 신품종 개발]

이태리포플러 품종 중 한국 환경에 적합한 품종을 선별하여 보급하고, 은백양과 수원사시나무를 교배하여 새로운 품종인 은사시나무를 개발했습니다.

농촌진흥청장 퇴임 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국가적으로 필요한 목재 자원 확보를 위해 도입한 이태리포플러 중 한국에서 잘 자라는 특성이 뛰어난 품종(I-214, I-476)을 찾아 보급했습니다. 또한 은백양과 수원사시나무를 교배하여 경사진 땅에서 잘 자라는 은사시나무를 개발했으며, 약재로 쓰이는 백양수피를 얻기 위해 양황철나무도 개발하여 보급했습니다.

1978

[5·16민족상 수상]

5·16민족상을 수상하며 국가 발전에 대한 그의 기여를 높이 평가받았습니다.

국가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5·16민족상을 수상했습니다.

1982

[산림 복구의 기적, 세계적 인정]

그의 산림 복구 노력 덕분에 대한민국은 유엔식량농업기구(FAO)로부터 '2차 세계대전 이후 산림 복구에 성공한 유일한 국가'라는 세계적인 극찬을 받았습니다.

1차 치산녹화 10년 계획(1973~1982)을 통한 전국적인 조림 사업과 우수한 임목 보급 확대에 기여한 결과, 1982년 대한민국은 유엔식량농업기구(FAO)로부터 '2차 세계대전 이후 산림 복구에 성공한 유일한 국가'로 극찬받았습니다. 이는 현신규 박사의 오랜 노력과 헌신이 만들어낸 위대한 성과였습니다.

[국민훈장 무궁화대훈장 수훈]

대한민국 최고 훈장인 국민훈장 무궁화대훈장을 수훈하며 그의 삶과 업적에 대한 국가의 깊은 존경을 표했습니다.

국가와 사회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에게 수여되는 최고 영예의 훈장인 국민훈장 무궁화대훈장을 수훈했습니다.

1986

[한국 산림의 영웅, 현신규 별세]

대한민국의 산림을 푸르게 만들고 임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현신규 박사가 별세했습니다.

대한민국 산림 녹화와 임학 발전에 평생을 바친 현신규 박사가 1986년에 별세했습니다. 그의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대한민국의 푸른 숲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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