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회 (농학자)
농학자, 교수, 과학기술인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43:29
대한민국의 저명한 농학자이자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인 허문회는 '통일벼' 개발을 통해 국가 식량 자급률 향상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세계 최고 생산성을 기록한 통일벼는 대한민국 농업 발전에 큰 획을 그었으며, 그는 벼의 기원과 육종 방법에 대한 학술적 토대 마련에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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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
1927년 1월 21일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났다. 이후 그는 대한민국 농학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성장하게 된다.
1946
청주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충주 동량초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교육 분야에 첫발을 내디뎠다.
1954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학과를 졸업하여 농학 분야의 학문적 기초를 다졌다.
1957
[농학석사 취득 및 농사원 근무]
서울대학교에서 농학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농사원(농업진흥청 전신)에서 연구직을 수행하며 전문성을 쌓기 시작했다.
서울대학교에서 농학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농업진흥청의 전신인 농사원에서 연구직으로 근무하며 실무 경험을 쌓았다.
1960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교수로 자리를 옮겨 교육자이자 연구자로서의 경력을 이어갔다.
1964
[국제미작연구소 파견, 통일벼 연구 시작]
식량 문제 해결을 위한 국가적 과제를 안고 선진 육종학을 배우기 위해 국제미작연구소(IRRI)에 파견되어 통일벼 육종 연구에 착수했다.
스스로 농촌진흥청에 국제미작연구소(IRRI) 파견을 요청하여 서울대를 휴직하고 필리핀으로 떠났다. 이곳에서 그는 국가적 과제인 식량 문제 해결을 위해 통일벼 육종 연구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1968
서울대학교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전문 연구자로서의 역량을 더욱 강화했다.
1971
인디카와 자포니카를 교배한 후손들의 특성을 연구하여 삼원교배로 뛰어난 장점들을 선발하고 통일벼로 고정시켰다. 농촌진흥청, IRRI와 협력해 1년에 2세대씩 번식시키면서 통일벼를 빠른 속도로 육성하여 마침내 품종을 완성했다.
1972
농촌진흥청을 통해 '통일벼'가 전국 농가에 보급되면서 대한민국 식량 자급을 위한 큰 걸음을 내디뎠다.
1976
통일벼 보급 2년 뒤, 재래품종 대비 30% 이상 증수하며 3,000만 섬을 돌파했고, 대한민국은 처음으로 주곡 자급을 달성했다.
1977
[통일벼, 세계 최고 생산성 달성 및 수상]
통일벼 재배면적이 전체 벼 재배의 절반을 넘고 4,170만 섬을 생산하며 **세계 최고의 생산성**을 기록, 5·16 민족상과 은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통일벼가 전체 벼 재배면적의 절반을 넘으면서 4,170만 섬을 생산하여 세계 최고의 생산성을 기록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5·16 민족상과 은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1985
서울대학교 농업개발연구소장으로 2년간 재직하며 농업 연구 발전에 힘썼다.
1987
뛰어난 연구 성과와 학문적 기여를 인정받아 성곡재단 학술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1992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추대되어 교육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도 국제벼유전학회 상임이사로 활동하며 벼 연구 분야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2010
그의 일생에 걸친 과학기술 공헌이 높이 평가되어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대한민국 농학계의 거목이자 통일벼 개발의 주역인 허문회 박사가 2010년 11월 24일 별세했다. 그의 업적은 대한민국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