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규 (화학자)
화학자, 대학교수, 과학자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41:07
한국 현대 화학의 초석을 다진 선구적인 이론화학자. 한국인 최초로 화학 분야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양자역학을 화학반응 연구에 도입해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특히 '리-아이링 이론' 공동 발표는 그의 대표적 업적으로 꼽힌다. 해방 후 귀국하여 국내 과학 교육 및 연구 기반을 구축하는 데 헌신했고, 노벨상 후보로 추천될 만큼 국제적으로도 그 학술적 성과를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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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예산리 55번지에서 태어났다.
1922
경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과정을 마쳤다.
1927
일본 교토 제국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했다.
1931
[한국인 최초 화학 박사 학위 취득]
'환원 니켈을 이용한 일산화탄소의 분해' 논문으로 한국인 최초 화학 분야 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화학계의 새 지평을 열었다.
교토 제국대학교에서 '환원 니켈을 이용한 일산화탄소의 분해'라는 논문으로 화학 분야의 박사 학위를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받았다. 이후 교토 대학에서 교편을 잡기 시작했다.
1938
교토 대학에서 교편을 잡다가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 초청과학자로 재직했다.
1943
미국에서 돌아와 1941년부터 교토제국대학에서 양자화학을 가르쳤고, 1943년에 정교수가 되었다.
1945
[해방 후 귀국, 경성제대 부장 취임]
해방 후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여 경성제국대학교 이공학부 부장을 맡으며 국내 과학계에 기여하기 시작했다.
해방 후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여 경성제국대학교 이공학부 부장을 맡았다.
1946
[서울대 학장 및 대한화학회 초대 회장 역임]
서울대학교 출범 후 문리과대학 학장이 되었고, 대한화학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며 한국 화학계의 초석을 다졌다.
경성제국대학교가 서울대학교로 출범하면서 문리과대학 학장이 되었으며, 대한화학회 초대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48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장 재직 중 국대안 파동의 여파로 미국으로 돌아가 유타 주립 대학교 교수로 재직을 시작했다.
1954
학술원 종신회원으로 선임되었다.
1955
['리-아이링 이론' 공동 발표]
헨리 아이링과 함께 비뉴턴 유동 현상을 설명하는 '리-아이링 이론'을 발표하여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는 그동안 이론적 접근이 어려웠던 비뉴턴 유동현상을 다루는 일반 공식을 제시한 것으로, 그의 대표적인 학술 업적으로 평가된다.
헨리 아이링과 함께 비뉴턴 유체에 대한 연구를 하여 '리-아이링 이론'(Ree-Eyring theory)을 발표하였다. 비뉴턴 유동이론은 물체의 변형속도가 외부작용(stress)에 비례하지 않는 비뉴턴 유동에서 점도(viscosity)의 변화를 이론으로 설명한 것으로 그동안 이론적 접근이 어려웠던 비뉴턴 유동현상을 다루는 일반 공식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1965
노벨상 수상자 후보 추천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66
한국과학기술연구원 고문에 추대되었다.
1967
대한민국 문교부 과학교육행정특보위원으로 임명되어 1970년 1월 29일까지 재직했다.
1969
1965년 노벨상 수상자 후보 추천위원으로 위촉된 데 이어, 4년 뒤 노벨상 후보로 추천되었다.
1971
[유타 공립대 객원교수, 국민훈장 모란장 수상]
미국 유타 공립대학교 객원교수로 활약하며 국제적인 학술 교류를 이어갔고,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받았다.
미국 유타 공립대학교 객원교수로 활약하였으며,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받았다.
1973
[한국과학원 석좌교수 부임, 수당상 수상]
한국과학원 석좌교수로 초빙되어 후학 양성에 힘썼고, 수당상을 수상하며 그의 학술적 공로를 인정받았다.
한국과학원 석좌교수로 활약하기 시작했으며, 수당상을 수상했다. 이후 칠순을 넘긴 나이에 한국과학기술원 명예교수로 초빙되어 박사 12명, 석사 24명 등 후진을 양성했다.
1974
태평양과학협회(미국 소재) 이사로 선임되었다.
1975
이론물리센터 소장이 되었다.
1980
5·16 민족상을 수상했다.
1982
세종문화상을 수상했다.
1992
[한국 화학의 거목, 국립현충원에 영면하다]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한국 현대 화학의 기반을 구축하고 초석을 다진 공을 인정받아 과학자로는 최초로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노환으로 인해 91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한국 현대 화학의 기반을 구축하고 한국 화학의 초석을 다진 공을 인정받아 과학자로는 처음으로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