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경
화학자, 대학교수, 과학기술인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41:01
대한민국의 저명한 화학자이자 교육자로, 혼란기 한국 화학계의 기틀을 다지고 후학 양성에 헌신했습니다. 군론 분야에서 세계적 명성을 얻었으며, 재미한인과학기술자협회(KSEA)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등 해외 한인 과학자들의 구심점을 마련했습니다.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다수의 훈장과 과학기술유공자로 지정되었습니다.
본 문서는 위키백과 김순경 문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편집되었으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배포됩니다.
1920
1920년 함경남도 함흥시에서 태어났으며, 이는 훗날 한국 화학계와 과학기술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할 그의 삶의 시작이었습니다.
1944
1944년 9월, 일본 오사카 대학 화학과를 졸업하고 이학사 학위를 취득하여 본격적인 화학 연구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1944년 10월부터 1946년 1월까지 일본 교토 대학 대학원 화학과 연구원으로 재직하며 심도 있는 연구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1946
1946년 2월부터 1947년 2월까지 서울대학교 화학과 강사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습니다.
1947
1947년 4월부터 1949년 2월까지 중앙연구원 연구원으로 재직하며 한국 과학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1949
[서울대학교 교수 부임 및 교육 헌신]
서울대학교 화학과 조교수 및 교수로 부임하여 17년간 양자 화학, 물리화학, 열역학 등을 가르치며 한국 화학계의 후학 양성과 학문 전파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1949년 3월 서울대학교 화학과 조교수로 부임한 뒤 교수로 승진하여, 1965년 9월까지 17년간 한국전쟁 전후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양자 화학, 물리화학, 열역학 등 핵심 분야를 교육하며 대한민국 화학계의 학문적 토대를 굳건히 다졌습니다.
1956
[귀국 후 국내 화학계 발전 기여]
미국에서 박사 학위 취득 후 귀국하여, 한국전쟁 후 혼란스러웠던 국내 상황 속에서도 서울대학교에서 후학 양성과 학문 전파에 매진했습니다.
미국 예일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마친 후 1956년 귀국하여 서울대학교 화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양자 화학, 물리화학, 열역학 등을 가르치며 대한민국 화학계의 후학 양성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 시기 대한화학회 조직 개편 및 운영체제 개선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예일 대학교 박사 학위 취득]
미국 예일 대학교 대학원 화학과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강전해질 용액론 및 비엔 효과를 이론적으로 규명하는 등 세계적 수준의 연구 성과를 냈습니다.
1954년 9월부터 1956년 5월까지 미국 예일 대학교 대학원 화학과에서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라르스 온사게르 교수의 지도하에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강전해질 용액에서 이완 및 '비엔 효과'(Wien effect)를 이론적으로 규명하는 탁월한 연구로 세계 학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1961
1961년 7월, 그의 뛰어난 학문적 성과와 국내 과학계 발전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아 대한민국학술원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1962
1962년 4월부터 1966년 8월까지 미국 브라운 대학교 화학과 방문교수로 재직하며 해외 학계와의 교류를 확대하고 심도 있는 연구를 수행했습니다.
1963
[국제순수화학및응용화학연합회(IUPAC) 한국 입회 승인]
냉전 체제 속에서 러시아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제순수화학및응용화학연합회(IUPAC)에 한국의 입회 승인을 얻어내며 대한민국 화학계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습니다.
1963년, 냉전이라는 국제정세 속에서 구 소련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한화학회의 노력으로 한국의 국제순수화학및응용화학연합회(IUPAC) 입회 승인을 이끌어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대한민국 화학계가 국제 무대로 진출하는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1965
1949년 3월부터 이어져 온 서울대학교 화학과 교수직을 1965년 9월에 사임했으며, 이는 그의 학문적 활동 무대가 해외로 더욱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66
1966년 9월부터 1969년 8월까지 미국 루이빌 대학교 화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물리학 이론 및 화학 분야에서 세계적 명성을 얻는 '군론' 연구를 포함한 다양한 학문적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1968
[재북미한인화학화공자협회 창립]
미국에서 재북미한인화학화공자협회를 창립하고 초대 부회장 및 2대 회장을 역임하며 미주 한인 화학계의 중흥에 기여했습니다.
1968년 미국에서 재북미한인화학화공자협회를 창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초대 부회장 및 2대 회장을 역임하며 미주 지역 한인 화학 및 화공 분야 전문가들의 구심점을 마련하는 데 크게 공헌했습니다.
1969
1969년 9월부터 1990년 6월까지 미국 템플 대학교 화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수많은 논문과 저서를 발표하고, 재미 한인 과학기술자들의 협력 네트워크 구축에 기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1971
[재미한국과학기술자협회(KSEA) 창립]
미국 내 한인 과학기술자들의 유대를 강화하고 모국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재미한국과학기술자협회(KSEA)를 창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971년 말, 미주에 거주하는 다양한 분야의 한인 과학 및 공학자들의 상호 유대를 강화하고 모국의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할 목적으로 재미한국과학기술자협회(KSEA)를 창립했습니다. 이는 미국의 과학 및 공학 분야에서 일하는 한인 과학자들의 교류와 협력을 위한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1972
1972년 8월, 대한민국 화학계에 대한 기여와 학문적 업적, 그리고 국가 발전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동백훈장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1973
1973년 1월부터 7월까지 네덜란드 레이던 대학교 로렌츠연구소 안식년 교수로 재직하며 유럽 학계와의 교류를 통해 학문적 지평을 넓혔습니다.
1980
[옥스퍼드 대학교 안식년 교수]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안식년 교수로 초빙되어 선진 학문을 연구하고 국제 학자들과 교류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1980년 6월부터 12월까지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안식년 교수로 활동하며 세계적인 학문 환경 속에서 연구를 이어갔습니다.
1990
1990년 7월, 미국 템플 대학교 화학과 명예교수로 임명되어 2003년 3월까지 그 직을 유지하며 후학들에게 귀감이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1997
[무궁화 훈장 수상]
그의 뛰어난 학문적 업적과 국가 발전에 대한 지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최고 훈장 중 하나인 무궁화 훈장을 수훈했습니다.
1997년 5월, 평생에 걸친 학문적 성과와 한국 과학기술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 영예로운 훈장 중 하나인 무궁화 훈장을 수훈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1999
[군론 연구 업적 기린 서적 발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그의 혁혁한 군론 연구 업적을 기려, 이를 집대성한 책을 발간하며 세계적 명성을 재확인했습니다.
1999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그의 '군론'(Group Theory) 연구 업적을 기리며, 이 분야의 심오한 내용을 집대성한 책을 발간했습니다. 이는 화학을 물리학으로 접근하는 그의 독창적인 연구 방식과 그 성과가 세계 학계에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지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2003
2003년, 향년 83세로 영면했으며, 평생을 화학 연구와 후학 양성, 그리고 한국 과학기술 발전에 헌신한 그의 삶은 대한민국 과학기술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2017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지정]
그의 탁월한 과학기술 분야 공로가 인정되어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로 지정되며 그 업적을 영구히 기리게 되었습니다.
2017년, 대한민국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한 지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자연 분야 과학기술유공자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삶과 업적이 한국 과학기술사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을 공식적으로 기리는 조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