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일 (응용화학자)
응용화학자, 대학교수, 공학자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40:57
대한민국 응용화학자이자 대학교수 김동일은 다음과 같은 주요 업적을 남겼습니다.인견사 제조법 개발 및 국내 최초 비스코스 인견사 공장 건설에 기여했습니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초대 학장으로 공학 교육 기반을 구축했습니다.대한화학회장, 한국원자력연구원 위원,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며 과학기술 진흥에 크게 공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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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
[화학자의 꿈을 안고 태어나다]
평안남도 강서군 작은 마을에서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남다른 교육열을 가진 부친 덕분에 서당과 평양의 보통학교, 고등보통학교를 거쳐 평양공립고등보통학교를 다녔습니다.
1908년 3월 9일 평안남도 강서군 작은 마을에서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80여 가구가 있던 마을의 자작농이었던 부친은 각별한 교육열을 가지고 있었고, 그 덕에 어릴 때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고, 평양의 상수보통학교를 거쳐 평양공립고등보통학교를 다녔습니다. 학창시절 화학 참고서를 통해 화학자의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1926
[동경제국대학에 입학하다]
화학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사가고등학교 이공계열을 거쳐, 일본 최고의 명문 동경제국대학 공학부 응용화학과에 입학하며 전문 지식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화학자의 꿈을 갖게 된 김동일 교수는 1926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고, 사가고등학교 이공계열을 거쳐, 동경제국대학 공학부 응용화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이는 그의 학문적 여정의 중요한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1933
[동경제국대학 졸업]
동경제국대학 공학부 응용화학과를 졸업하며 공학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이후 1년간 무보수 조교 생활을 거쳐 실무 경험을 쌓았습니다.
1933년 동경제국대학 공학부 응용화학과를 졸업하고 공학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졸업 이후 1년간 무보수 조교 생활을 통해 연구와 실무에 대한 이해를 깊게 다졌습니다.
1934
[동양 최초 안전유리 제조 성공]
도쿄 소재 이와키 주식회사의 연구과장으로 입사하여 동양 최초로 피막을 사용한 안전유리 제조에 성공했습니다. 이는 그의 기술력을 인정받는 중요한 업적이 되었습니다.
졸업 후 1년간 무보수 조교 생활을 거쳐 도쿄 소재 이와키 주식회사의 연구주임으로 입사, 근무하며, 동양에선 처음으로 피막을 사용해 안전유리를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1934년에 이와키초자 연구과장으로 재직했습니다.
1942
[인견 제조법 개발 및 생산성 향상 기여]
경력을 인정받아 인견을 생산하는 가네보 화학공업주식회사로 옮겨 삼초산 섬유소를 원료로 인견을 만드는 새로운 제조법인 ‘가네라리아’를 개발했습니다. 이후 경성방직으로 다시 한 번 회사를 옮겨 영등포 공장장으로 일하며 공정 개선 및 경영 합리화를 도모해 생산성을 크게 높였습니다.
이와키 주식회사에서의 경력을 인정받은 후 인견을 생산하는 가네보 화학공업주식회사로 옮겨 삼초산 섬유소를 원료로 인견을 만드는 새로운 제조법을 개발해냈습니다. ‘가네라리아’라고 불리는 이 인견사는 회사의 주력상품 중 하나가 됩니다. 1942년 경성방직으로 다시 한 번 회사를 옮겨 영등포 공장장으로 일하며 공정 개선 및 경영의 합리화를 도모해 생산성을 높이는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1946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초대 학장 취임]
해방 후 경성대 교수로 부임하여 국립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초대 학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초창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교수진 확보와 좌우대립, 국대안 파동을 겪으면서도 공과대학이 자리를 잡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해방 이후 경성대 교수로 부임한 그는 경성대 공학부의 정식 대학과정과 경성공업전문학교, 경성광산전문학교 3개교가 통합해 창립된 국립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초대 학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초창기 어려운 여건에서도 학장으로써 교수진 확보에 노력했으며, 좌우대립과 국대안 파동(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 반대)을 겪으면서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이 자리를 잡게 만들었습니다.
1951
[대한화학회 회장으로 활동 시작]
대한화학회 회장직을 시작으로 1972년까지 총 6번이나 회장을 역임하며 국내 화학 분야의 발전을 이끌었습니다.
1951년부터 1954년까지 대한화학회 회장을 역임했습니다. 이후 1972년까지 총 6번에 걸쳐 대한화학회 회장을 맡으며 대한민국 화학계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1952
[이공계 최초 박사 학위 취득 및 전시 학장 재임]
서울대학교 이공계 최초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국전쟁 중 제3대 학장을 다시 맡아 전시 하에서도 대학과 학생들을 굳건히 지켜냈습니다.
1952년 4월 서울대학교 이공계 최초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학장 임기를 마치고 교수직에 전념하던 그는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제3대 학장을 다시 맡아 전시 하에서 대학과 학생들을 지켜냈습니다.
1959
[원자력 발전의 초석을 놓다]
한국원자력연구원 초대 상임 원자력위원으로 임명되어 제1차 원자력학술회의를 주도하고 고급 인력 양성을 위한 해외 파견 계획을 지휘하는 등 대한민국 원자력 발전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1959년 14년간의 공대 교수 및 학장 생활을 마감한 그는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원자력원, 대한화학회, 한국과학기술진흥재단(현 과학창의재단), 한국석유산업개발센터 등 정부와 과학기술단체, 산업계를 넘나들며 실학정신을 이어받아 우리나라 과학기술을 진흥시켰습니다. 1959년에는 원자력원 초대 상임위원으로 임명되어 제1차 원자력학술회의를 주도했으며, 고급 인력 양성을 위한 해외 파견계획을 지휘하는 등 원자력 발전의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1962
[국내 최초 비스코스 인견사 공장 건설]
흥한화학섬유(주) 부사장으로 취임하여 화학공장 재직 시 쌓은 경험을 살려 국내 최초로 비스코스 인견사 공장을 성공적으로 건설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 화학섬유 산업의 역사적인 도약을 의미했습니다.
1962년 흥한화학섬유(주) 부사장을 맡아 화학공장 재직 시 쌓은 경험을 살려, 국내 최초로 비스코스 인견사 공장을 성공적으로 건설했습니다.
1966
[한국 과학기술 진흥의 기틀 마련]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창립 준비위원으로 실무를 주도하며 90여 개 과학기술단체들을 하나로 결집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초대 부회장을 맡아 「과학기술진흥법」 제정, 과학기술 전담부서 설치, 「과학기술인의 신조」 제정 등 대한민국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1966년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창립 준비위원으로 실무를 주도하며 90여 개 과학기술단체들을 하나로 결집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과총 초대 부회장을 맡아, 「과학기술진흥법」을 제정하고, 과학기술 전담부서를 설치했으며, 「과학기술인의 신조」를 제정했습니다.
1970
[한국석유산업개발센터 설립 및 국민훈장 수훈]
국가적으로 절실한 석유탐사와 개발 연구를 선도하기 위해 한국석유산업개발센터를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으로 역임했습니다. 같은 해 국가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했습니다.
1970년에는 한국석유산업개발센터를 설립해 초대 이사장으로서 국가적으로 절실한 석유탐사와 개발 연구를 선도했습니다. 같은 해 국가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했습니다.
1971
[화학회관 성공적 건립]
대한화학회 회장으로서 1966년부터 건립위원장으로 활동해온 화학회관을 성공적으로 건립하며 화학계의 숙원을 이루었습니다.
1951년부터 1972년까지 총 6번이나 대한화학회 회장을 맡았고, 1966년부터는 화학회관 건립위원장으로 활동해 1971년 화학회관을 건립했습니다.
1978
[서울국제사이언스클럽 창설 및 국제 활동]
서울국제사이언스클럽을 창설하여 초대 이사장과 명예회장을 지냈으며,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집행위원, 유네스코 총회 한국 대표 등 국제 무대에서도 활발히 활동하며 대한민국의 과학기술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1978년 서울국제사이언스클럽을 창설해 초대 이사장과 명예회장을 지냈으며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집행위원, 유네스코 총회 한국 대표, 국제 순수 및 응용화학연합(IUPAC) 한국 대표, 국제과학연합(ICSU) 총회 한국 대표 등으로 활약했습니다.
1982
1982년 국가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했습니다.
1998
[영면]
파란만장하고 위대한 삶을 뒤로하고 향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대한민국 과학기술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선구자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1998년 7월 20일, 향년 90세로 사망하며 대한민국 과학기술사에 큰 족적을 남긴 그의 삶을 마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