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정

육상 선수, 스포츠 행정가, 사회 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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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3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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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 선수, 스포츠 행정가, 사회 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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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한국인 최초로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을 획득하며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했던 체육인입니다. 일본 국가대표로 출전해야 했던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저항의 상징이 되었고, 해방 후에는 한국 스포츠 발전에 헌신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성화 봉송 주자로 전 세계에 감동을 선사하며 한국 스포츠의 살아있는 역사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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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

[한국 마라톤 영웅의 탄생]

일제 강점기 조선 평안북도 의주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신의주에서 학교를 다니며 집과 학교를 오가는 길을 늘 뛰어다녔다고 회고했습니다.

손기정은 1912년 10월 9일 일제 강점기 조선 평안북도 의주부 광성면 민포리(現 평안북도 신의주부 남민포동)에서 출생하여 성장했습니다. 신의주의 학교를 다녔으며, 집에서 학교까지 약 2킬로미터의 자갈길을 항상 뛰어다녔습니다.

1926

[소년기, 어려운 환경 속 꿈을 키우다]

보통학교 5학년 때 해일로 학업을 중단하고 생계를 위해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학교를 오가는 2km의 자갈길을 늘 뛰어다니며 훗날 마라톤 선수로서의 기량을 닦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26년 보통학교 5학년 때, 초봄에 해일이 발생하여 오늘날의 신의주부 남민포동 일대가 바닷물에 잠기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로 인해 손기정은 학업을 중단하고 14세의 나이로 철따라 참외, 각설탕, 군밤 장사 등을 하며 생계를 꾸렸습니다. 덕분에 2학기부터 약죽 보통학교에 다시 다닐 수 있었으나, 6학년 졸업 때까지 낮에는 학교에 가고 저녁에는 장사를 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손기정은 집에서 학교까지 약 2킬로미터의 자갈길을 항상 뛰어다녔습니다.

1933

[마라톤 선수로서 두각을 나타내다]

중학교 시절부터 육상 선수로 활약한 그는 1933년부터 1936년까지 참가한 13개 마라톤 대회 중 10개에서 우승하며 놀라운 기량을 선보였습니다.

손기정은 중학교 시절부터 육상 선수로 활약했으며, 1933년부터 1936년까지 마라톤 대회 13개에 참가하여 그 중 10개에서 우승하며 당시 육상계에서 주목받는 선수로 성장했습니다.

1935

[세계 비공인 신기록 수립]

도쿄에서 열린 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 26분 42초의 기록으로 비공인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며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이 기록은 무려 1947년까지 유지되었습니다.

1935년 11월 3일, 손기정은 도쿄에서 열린 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 26분 42초의 비공인 세계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이 경이로운 기록은 1947년까지 깨지지 않고 유지되며 그의 뛰어난 능력을 증명했습니다.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 획득]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2시간 29분 19.2초의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이는 한국인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이자, 일제강점기 암울했던 민족에게 큰 희망을 안겨준 쾌거였습니다. 함께 출전한 남승룡 선수도 동메달을 차지했습니다.

1936년 8월 9일,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은 2시간 29분 19.2초를 기록하며 올림픽 신기록을 수립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이 때 손기정과 함께 출전했던 남승룡은 동메달을 차지했습니다. 그는 한국인이었으나 당시 일제강점기 시기였기 때문에 일본 국가대표 선수로 출전해야 했습니다. 시상식에서 일장기가 올라오자 고개를 숙여 슬픔을 표현했고, 금메달리스트에게 주어질 예정이던 고대 그리스 투구는 그에게 전달되지 못했습니다.

[민족적 저항을 상징하는 '일장기 말소 사건']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 소식을 전하던 국내 신문들이 그의 유니폼에 그려진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했습니다.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조선인의 민족적 저항 의식을 상징하며, 관련 언론인들이 탄압받고 손기정 선수 또한 귀국 후 일제의 감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1936년 8월 13일자 조선중앙일보와 8월 25일자 동아일보가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소식을 보도하며, 그의 유니폼 가슴 부분에 있는 일장기를 지우고 사진을 게재했습니다. 이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동아일보 사회부장이었던 현진건이 1년간 감옥에서 복역하는 등 언론 종사자들이 탄압을 받았으며, 손기정 선수 또한 귀국 후 경찰의 감시를 받는 등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는 이 일로 '다시는 마라톤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기까지 했습니다.

1940

[학업 및 일제 감시 속의 삶]

일제의 감시로 보성전문학교를 중퇴한 후, 다시는 육상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 대학 법학부를 졸업했습니다.

일제 감시의 여파로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자퇴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다시는 육상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일본으로 건너가 1940년에 일본의 메이지 대학에 입학하여 법학부를 졸업했습니다. 그는 1944년까지 조선저축은행에서 은행원으로 잠시 일하기도 했습니다.

1947

[해방 후 한국 스포츠 발전의 선구자로 활동]

해방 후 대한체육회 부회장, 마라톤 국가대표팀 감독 등을 역임하며 한국 스포츠 발전에 헌신했습니다. 1947년 서윤복 선수, 1950년 함기용 선수의 보스턴 마라톤 우승을 이끄는 전담 코치로 활약했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한체육회 부회장, 1963년 대한육상경기연맹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1966년 아시안 게임 한국 대표단장으로 참가하는 등 스포츠 행정가로서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특히 1947년과 1950년에는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한 서윤복과 함기용 선수의 전담 코치를 맡아 이들을 훈련시켰습니다. 1952년 하계 올림픽에는 대한민국 마라톤 대표팀 감독 자격으로 대한민국 선수단 기수를 맡기도 했습니다.

1988

[1988년 서울 올림픽 성화 봉송 주자]

서울에서 개최된 1988년 하계 올림픽 개막식에서 첫 번째 성화 봉송 주자를 맡아 전 세계인의 가슴에 깊은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이는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넘어 한국의 위상을 드높인 상징적인 순간으로 기억됩니다.

1981년부터 1988년까지 서울 올림픽 조직 위원을 역임한 손기정은 1988년 서울에서 개최된 하계 올림픽 개막식에서 첫 번째 성화 봉송 주자를 맡았습니다. 일제강점기 일본 선수로 출전해야 했던 비운의 마라토너가 대한민국의 수도에서 열리는 올림픽의 첫 성화 봉송 주자로 나선 장면은 전 세계인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는 1983년 자서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을 출간하며 당시의 심정을 밝혔습니다.

2002

[한국 스포츠의 살아있는 전설, 영면하다]

지병인 만성 신부전증과 폐렴으로 향년 90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사후 체육훈장 청룡장이 추서되었고, 그의 모교 자리에는 손기정공원과 손기정 기념관이 조성되어 그의 정신을 기리고 있습니다.

2002년 11월 15일, 손기정은 지병인 만성 신부전증과 폐렴으로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에서 향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사후 체육훈장 청룡장이 추서되었습니다. 모교 양정고등학교가 이전한 옛 자리에 손기정공원과 손기정 기념관이 만들어져 그의 위대한 업적과 민족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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