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성 (1966년)
축구 선수, 축구 행정가, 스포츠인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32:47
'야생마', '아시아의 삼손'으로 불린 한국 축구의 전설 김주성! 아시아 올해의 축구 선수 3년 연속 수상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습니다. K리그 우승과 MVP, 분데스리가 경험까지, 화려한 선수 생활을 보냈으며, K리그 최초의 영구 결번 및 은퇴 경기의 주인공입니다. 은퇴 후에는 대한축구협회 및 동아시아축구연맹 사무총장을 역임하며 축구 행정가로서 한국 축구 발전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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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한국 축구의 전설, 야생마 김주성 탄생]
강원도 양양군에서 한국 축구의 아이콘이자 '야생마'로 불리게 될 김주성이 태어났습니다. 폭발적인 스피드와 기술로 아시아 축구계를 지배할 그의 축구 인생이 시작됩니다.
강원도 양양군에서 호적상 1966년 1월 17일에 김주성이 출생했습니다. 그는 훗날 '야생마', '아시아의 삼손' 등의 별명으로 불리며 한국 축구의 전설적인 인물로 성장하게 됩니다.
1980
[중앙고등학교 축구부 활동 시작]
서울로 상경하여 중앙고등학교 축구부에 입단, 고등학교 시절부터 뛰어난 축구 실력을 선보이며 '야생마' 김주성으로서의 성장 기반을 다졌습니다.
서울로 상경한 김주성은 중앙고등학교에 진학하여 1980년부터 1982년까지 중앙고등학교 축구부에서 활약하며 축구 선수로서의 기량을 갈고닦았습니다.
1983
[조선대학교 축구부 입단 및 대학 리그 활약]
조선대학교에 진학하여 대학 축구부에서 활약하며, 점차 국가대표급 선수로 성장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김주성은 1983년부터 1986년까지 조선대학교 축구부에서 활동하며 대학 리그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이는 그의 국가대표팀 발탁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984
1984년에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국제 무대에서 자신의 기량을 선보일 기회를 얻으며, 미래의 국가대표 핵심 선수로 성장할 잠재력을 입증했습니다.
1985
[성인 국가대표팀 데뷔]
1985년부터 1996년까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핵심 선수로 활약하며 총 76번의 A매치에 출전해 14골을 기록했습니다.
김주성은 1985년부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1996년까지 국가대표 선수로 활약하며 총 76경기에 출전하여 14골을 득점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한국 축구의 간판스타로 국제 무대에서 큰 활약을 펼쳤습니다.
1986
[아시안 게임 축구 금메달 획득]
서울 아시안 게임 축구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조국의 우승에 크게 기여했고, 같은 해 FIFA 월드컵에도 출전했습니다.
1986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안 게임 축구 단체전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의 일원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며 성공적인 국제 대회 경험을 쌓았습니다. 같은 해 FIFA 월드컵 대표로도 선발되어 월드컵 무대를 밟았습니다.
1987
[K리그 신인왕 등극 및 우승 기여]
대우 로얄즈에 입단하자마자 K리그 우승에 크게 공헌하며 신인상을 수상, 프로 무대에서도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켰습니다. 체육훈장 체육기란장도 받았습니다.
1987년 대우 로얄즈에 입단한 김주성은 그 해 K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하며 신인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는 그의 프로 경력의 화려한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으며, 뛰어난 활약을 인정받아 체육훈장 체육기란장을 받았습니다.
1988
[아시안컵 MVP 수상 및 유럽 진출 포기]
오스트리아 프로팀과의 가계약을 포기하고 국내 축구 활성화에 기여했으며, AFC 아시안컵에서 2골을 넣으며 팀의 준우승을 이끌고 대회 MVP를 차지했습니다.
1988년 오스트리아 1부 리그 FC 스바로브스키 타이롤 클럽에 가계약까지 맺었으나, 국내 축구 활성화를 위해 입단을 포기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같은 해 AFC 아시안컵에서 2골을 넣는 등 팀의 준우승에 크게 공헌하여 대회 MVP를 차지했으며, 체육훈장 백마장을 수훈했습니다.
1991
[아시아 축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3년 연속 올해의 선수]
1989년부터 1991년까지 아시아 축구 연맹 선정 아시아 올해의 축구 선수로 3년 연속 뽑히며, 아시아 축구 역사상 유일무이한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김주성은 1989년, 1990년, 1991년 세 차례 연속으로 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IFFHS)이 선정한 아시아 지역 올해의 선수로 뽑혔습니다. 당시에는 기자단 투표 방식이었으나, 3회 연속으로 올해의 선수로 뽑힌 유일한 선수로서 아시아 축구 역사에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남겼습니다. K리그 베스트 11에도 이름을 올렸으며, FIFA 초청으로 '독일 대표팀'과 '세계 올스타' 간 경기에 출전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1992
1992년 6월, 독일 분데스리가의 VfL 보훔으로 임대 이적하여 유럽 빅리그 무대를 밟았습니다. 이는 한국 축구 선수들에게 유럽 진출의 가능성을 보여준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1992-93 시즌 팀은 강등되었으나, 다음 시즌 2. 분데스리가에서 팀의 승격에 기여했습니다.
1994
[VfL 보훔의 2. 분데스리가 우승 기여]
독일 VfL 보훔 소속으로 1993-1994 시즌 2. 분데스리가 우승에 공헌하며 팀의 1부 리그 승격을 이끌었습니다.
VfL 보훔에서 1993-1994 시즌을 치르며 10월 '2. 분데스리가 베스트 11'에 선정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쳐 팀의 2부 리그 우승과 1부 리그 승격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1992년부터 1994년까지 VfL 보훔에서 활약한 후, 임대 계약 만료와 친정팀 부산 대우 로얄즈의 강력한 복귀 요청으로 1994년 8월 국내 리그로 복귀했습니다.
1995
[필드 플레이어로서의 포지션 전환]
유공전부터 수비수로 보직을 변경하여 출전, 공격수에서 수비수로 성공적인 전환을 보여주며 다재다능함을 입증했습니다.
1995년 6월 17일 유공전부터 수비수로 보직을 변경하여 경기에 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공격형 미드필더와 윙포워드로 활약하던 그가 선수 생활 말년에 수비수로서도 성공적인 변신을 이루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1997
[K리그 MVP 수상 및 3번째 K리그 우승]
부산 대우 로얄즈의 K리그 통산 3번째 우승을 이끌며 K리그 MVP를 수상, 최고의 한 해를 보냈습니다.
1997년, 부산 대우 로얄즈의 K리그 통산 3번째 우승에 크게 공헌했으며, 이러한 활약을 인정받아 K리그 MVP를 수상하고 K리그 베스트 11에도 선정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선수 경력에서 정점을 찍은 해였습니다.
1999
1999 시즌이 끝난 후, 현역 축구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은퇴했습니다. K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되었고, 그동안의 활약과 한국 축구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아 K리그 공로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습니다.
[K리그 최초의 영구 결번 및 은퇴 경기]
부산 대우 로얄즈가 김주성의 등번호 16번을 K리그 최초로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으며, 축구계 최초로 은퇴 경기가 열렸습니다.
1999년 11월 25일, 부산 대우 로얄즈는 김주성을 기리며 그의 등번호 16번을 축구에서 최초로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습니다. 또한, 속초시에서 축구계 최초로 은퇴 경기가 열려 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이 두 가지 기록은 한국 축구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2000
[지도자 및 행정가 경력 시작]
부산 아이콘스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으며,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에 선임되며 축구 행정가의 길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1999년 은퇴 후, 2000년부터 부산 아이콘스에서 코치로 활동하며 지도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같은 해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으로 선임되어 축구 행정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하며 한국 축구 발전에 기여하게 됩니다.
2001
2001년 부산 아이콘스 코치직을 사임하고 팀과 결별하며, 이후 축구 행정가로서의 활동에 더욱 몰두하게 됩니다.
2003
[국내 최초 FIFA 국제스포츠관리자 과정 선발]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FIFA 국제스포츠관리자 과정'에 선발되어 FIFA 행정가 양성과정에 입문했습니다.
2003년에 국내 최초로 'FIFA 국제스포츠관리자 과정'에 선발되어 FIFA 행정가 양성과정에 입문했습니다. 이 과정은 축구 행정 전문가로서의 역량을 강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2004
2004년 'FIFA 국제스포츠관리자 과정' 연수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귀국했습니다. 이후 잠시 축구 해설자로 활동하며 팬들과 소통하기도 했습니다.
2005
2005년 2월, 홍명보 등과 함께 대한축구협회의 이사에 선임되어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한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2005년 10월 대한축구협회 국제부장으로 선임되었습니다. 2012년 1월까지 이 직책을 맡으며 한국 축구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2011
[동아시아축구연맹 사무총장 내정]
동아시아축구연맹의 사무총장으로 내정되며 국제 축구 행정가로서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2011년 3월 11일, 동아시아축구연맹(EAFF)의 사무총장으로 내정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한국을 넘어 아시아 축구 행정의 중심 인물로 성장하는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2012
[동아시아축구연맹 사무총장 활동]
2012년부터 현재까지 동아시아축구연맹 사무총장으로 활동하며 아시아 축구 발전에 지속적으로 기여하고 있습니다.
2012년부터 동아시아축구연맹(EAFF) 사무총장으로 활동하며, 동아시아 지역 축구의 발전과 교류 증진에 힘쓰고 있습니다. 이 직책을 통해 그는 국제 축구계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2012년 1월부터 대한축구협회 사무총장을 역임했습니다. 이 직책은 한국 축구 행정의 최고위직 중 하나로, 그는 2013년 4월까지 이 역할을 수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