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트 슈바이처
의사, 음악가, 철학자, 신학자, 목사, 인도주의자, 평화 운동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32:09
독일 출신 프랑스 의사이자 음악가, 철학자, 신학자, 목사입니다. '생명에 대한 경외' 철학을 기반으로 아프리카 의료 봉사에 헌신했으며, 195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반핵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며 평화와 인류애를 실천한 위대한 인도주의자입니다. 바흐 연구가이자 탁월한 오르간 연주자로서 예술 분야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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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
[귄스바흐에서의 유년 시절]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몸이 약한 아들의 건강을 걱정한 부모의 뜻에 따라 공기가 맑은 농촌 귄스바흐에서 자랐습니다.
슈바이처는 알자스의 카이제르스베르그에서 루터교 목사의 큰아들로 태어났으며, 몸이 약한 아들의 건강을 걱정한 부모의 뜻에 따라 공기가 맑은 농촌 귄스바흐에서 자랐습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탄생]
독일 출신 프랑스의 의사, 음악가, 철학자, 신학자, 루터교 목사인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알자스-로렌 카이제르스베르그에서 태어났습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1875년 1월 14일 알자스의 카이제르스베르그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태어난 알자스는 독일과 프랑스의 영토 다툼이 심하던 곳으로, 그가 태어날 당시에는 독일 영토였습니다.
1884
자서전 '나의 생애와 사상'에 따르면, 슈바이처는 1884년까지 마을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1885
1885년 뮌스터 실업중학교(라틴어 같은 고전말을 가르치지 않는 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라틴어는 개인지도를 받으며 고등학교 진학을 준비했습니다.
1894
[군 복무 중 학업 병행]
19세 이상 독일 국민의 군 복무 규정에 따라 군 복무를 하였으며, 중대장의 배려로 특정 시간에 대학교 공부를 병행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생 시절, 19세 이상의 독일 국민은 군 복무를 해야 한다는 병역법에 따라 군 복무를 하였으며, 중대장의 배려로 특정 시간(오전 11시-오후 15시)에 군인 신분으로 대학교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1896
[인류 봉사에 대한 결심]
21세 때 '30세까지는 학문과 예술에 전념하고, 그 후 인류애를 위한 직접 봉사 활동에 들어가자'는 결심을 했습니다. 이는 '나만 행복하게 살 수 없다'는 인식으로 이어졌습니다.
슈바이처의 자서전 나의 생애와 사상에 따르면, 그는 21세 때 '30세까지는 학문과 예술 속에서 살고, 그 후부터는 인류애의 직접 봉사 활동으로 들어가자'는 결심을 했습니다. 이는 군 복무 중 성령강림주일 휴가 때 '이러한 행복을 나만 누려도 되는가?'라는 생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1899
슈바이처는 1899년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칸트 연구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1899년 스트라스부르의 목사가 되었으며, 성 니콜라이 루터교회의 부목사로 목회할 당시 견신례를 준비하는 청년들과 자유롭게 토론했습니다.
1900
1900년 예수의 생애와 초기 기독교 연구로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신학생 시절 당시 서구 신학계에 등장한 예수전들을 연구하며 예수에 대한 자신의 신학적 관점을 정립했습니다.
1902
1902년 모교인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신학부 강사가 되었으며, 신학생 시절 연구했던 예수의 생애와 초기 기독교에 대한 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강단에 섰습니다.
1905
슈바이처의 자서전 나의 생애와 사상에 따르면, 그는 21세 때의 결심을 실현하기 위하여, 30세 되던 해인 1905년 의학 과정에 진학했습니다.
1906
슈바이처는 어려서부터 오르간을 배워 아버지가 목회하는 교회에서 오르간 연주를 하였으며 1906년 파리의 바흐 협회 설립에 협력하고, 그곳의 오르간 연주자를 겸하였습니다.
1913
[아프리카 랑바레네 의료 봉사 시작]
아내 헬레네 브레슬라우와 함께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현 가봉 공화국)의 랑바레네에서 흑인을 위한 의료 봉사를 시작하며 평생 헌신을 다짐했습니다.
1913년 아내 헬레네 브레슬라우와 함께 흑인을 위한 의료 사업에 평생을 바치기 위해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현 가봉 공화국)의 랑바레네에서 의료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병원 건물은 선교사가 사용했던 닭장을 수리하여 사용했으며, 저술과 강연, 연주, 레코드 등에 의한 수입으로 병원을 자력으로 운영했습니다.
1916
제1차 세계대전이 그에게 준 가장 큰 상처는 어머니가 1916년 프랑스 군인들의 군마에 치여 죽은 사건이었습니다.
1917
[제1차 세계대전 중 구금]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병원 기금 마련을 위해 유럽에 있던 중, 그가 태어난 알자스 지방이 프랑스 영토였다는 이유로 구금되었고 1917년 프랑스 포로 수용소에 갇혔습니다.
병원 운영 자금 부족으로 유럽에 돌아왔을 때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난 알자스 지방은 당시 프랑스의 영토였다는 이유로 구금되었으며, 1917년 프랑스 포로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1919
[프랑스 국적 취득]
제1차 세계대전 후 고향 알자스가 프랑스 영토가 되면서, 가봉 활동의 어려움을 피하고자 독일에서 프랑스로 국적을 변경했습니다.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하자 슈바이처의 고향은 프랑스 영토가 되었고, 이에 따라 그는 프랑스 국적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슈바이처는 프랑스 식민지였던 가봉에서 활동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국적을 독일에서 프랑스로 바꿨습니다.
1924
[아프리카 재귀 및 병원 재건]
6년간 유럽 각지에서 강연과 오르간 연주로 모금을 한 뒤 아프리카 랑바레네로 돌아왔으나, 병원은 파괴된 상태였습니다. 후원금으로 병원을 재건하고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그 후 6년간 유럽 각지로 돌아다니며 강연과 파이프 오르간 연주로써 모금을 한 다음 다시 1924년 아프리카로 돌아갔으나, 병원은 부서져 뼈대만 남아 있었습니다. 다행히 여러 곳에서 후원금이 들어와 병원은 곧 다시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를 돕기 위하여 의사와 간호사들이 그 곳으로 자원하러 왔습니다.
1952
[노벨 평화상 수상]
'생명에 대한 경외' 철학을 바탕으로 한 아프리카 의료 봉사 및 인류애 증진 기여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슈바이처는 '생명에 대한 경외'라는 그의 고유한 철학이 아프리카 의료 봉사에서 더 나아가 인류의 형제애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 공로로 195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습니다.
1955
1955년 영국 명예 메리트 훈장을 수훈했습니다.
1957
1957년 라디오 강연과 신문 기고를 통해 핵무기에 반대하는 반핵 운동을 하였으며, 평화 운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1965
1965년 랑바레네에서 90세 생신 잔치를 마지막으로, 그가 사랑하는 바흐의 음악을 들으면서 9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