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도산
프로레슬러, 스모 선수, 스포츠인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28:24
일본 프로레슬링의 아버지라 불리는 전설적인 프로레슬러 김신락. 그는 스모 선수로 시작하여 프로레슬링으로 전향, 일본프로레슬링협회를 창설하며 스포츠의 기틀을 다졌다. 전후 일본 대중에게 희망을 안겨준 국민적 영웅이었으나, 야쿠자 피습 후 의문사하며 비극적인 생을 마감했다.
본 문서는 위키백과 역도산 문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편집되었으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배포됩니다.
1924
[김신락 탄생 및 양자로 입적]
함경남도 홍원군에서 태어나 유아기를 거쳐 일본 나가사키의 부농에게 양자로 들어가 '모모타 미쓰히로'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 함경남도 홍원군에서 김신락으로 태어났으며, 잠시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유아기를 보냈다. 이후 일본 나가사키현 오무라시의 부농에게 양자로 들어가 '모모타 미쓰히로'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1950
[스모 선수 데뷔 및 '역도산' 예명 사용]
스모 선수로 데뷔하며 '역도산'이라는 예명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이름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 일본 전역에 알려지게 됩니다.
1950년 스모 선수(리키시)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역도산(리키도잔)'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 이름은 훗날 그가 프로레슬링계의 전설이 되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1951
[프로레슬링 데뷔]
스모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프로레슬링의 세계로 뛰어들었습니다. 이는 '일본 프로레슬링의 아버지'가 탄생하는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스모에서 은퇴한 후, 1951년 10월 28일부터 프로레슬링 선수로서 새로운 경력을 시작했다. 이는 그가 일본 프로레슬링의 초석을 다지는 첫걸음이었다.
1953
[일본프로레슬링협회 창설]
일본 프로레슬링의 체계를 잡기 위해 일본프로레슬링협회를 창설했습니다. 이로써 일본 프로레슬링의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1953년에 직접 일본프로레슬링협회를 창설하여 일본 프로레슬링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본격적인 발전을 이끌었다. 이는 일본 프로레슬링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1954
[미일전쟁 연출, 일본 영웅으로 각인]
미국 샤프 형제와의 태그매치를 통해 '미일전쟁'을 연출하며 가라테촙으로 승리했습니다. 이 경기는 그를 '반칙을 일삼는 외국 선수에 맞서 승리하는 일본의 영웅'으로 각인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954년 2월, 미국 샤프 형제를 일본으로 초청하여 태그매치를 벌였다. 이 경기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인을 때려잡은 미국인의 전형'으로 비춰진 샤프 형제와 역도산의 대결로 '미일전쟁'으로 연출되었다. 역도산은 가라테촙으로 상대를 제압하며 승리했고, 이를 계기로 '반칙을 일삼는 외국 선수에 맞서 최후에 승리하는 일본 영웅 레슬러'라는 이미지를 굳혔다.
1963
[야쿠자 단원에게 피습]
도쿄 나이트클럽에서 폭력단원과의 말다툼 중 칼에 찔려 복부에 심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 사건은 그의 비극적인 최후의 시작이었습니다.
1963년 12월 8일 심야, 도쿄 도심의 나이트클럽 '뉴라틴쿼터'에서 폭력단 스미요시 일가 단원 무라타 가쓰시와 말다툼을 벌이다 무라타의 칼에 복부를 찔려 중상을 입었다. 이는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이어지는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의문사로 생을 마감하다]
피습 후 수술 부작용인 복막염으로 향년 40세에 사망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의료과실 및 음모론 등 여러 의혹이 제기되며 아직까지도 진실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미스터리로 남아있습니다.
1963년 12월 8일 피습 후 입은 부상으로 수술을 받았으나, 수술 후 발생한 화농성 복막염으로 인해 12월 15일, 40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그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의료과실 주장과 함께 음모론이 제기되는 등 많은 의혹이 남아있으며, 부인 다나카 게이코는 2003년 그의 죽음이 의료사고였다고 발표했지만, 명확한 증거가 공개되지 않아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