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훈

야구 선수, 스포츠 평론가, 야구 해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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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은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타자 중 한 명으로, 재일 한국인으로서 수많은 차별을 극복하고 전무후무한 대기록들을 달성했습니다. 그는 일본 프로 야구 최다 안타(3,085안타)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7회의 수위 타자 타이틀과 1962년 일본 프로 야구 MVP를 수상했습니다. 또한, 한국 야구 위원회 고문으로 KBO 리그 발전에 기여했으며,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존경받는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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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

[장훈, 히로시마현에서 출생]

일본 히로시마현에서 재일 한국인 아버지 장상정과 어머니 박순분 사이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의 고향은 경상남도 창녕군입니다.

재일 한국인 아버지 장상정(張相禎)과 어머니 박순분(朴順分) 사이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에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인동 장씨이며, 부모님의 고향은 경상남도 창녕군입니다.

1944

[어린 시절, 오른손 심한 화상]

4살 때 트럭을 피하다 모닥불에 오른손을 심하게 다쳐 네째 손가락과 새끼 손가락이 붙는 등의 장애를 입었습니다. 이 부상으로 오른손잡이였으나 왼손을 사용해 야구를 시작하며 좌타자가 되었습니다.

장훈이 4살이 되던 해 겨울 무렵, 집 근처에 있는 강의 제방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있었을 때 주차해 있던 트럭이 갑자기 후진하는 것을 보고 피하다가 모닥불 속에 오른손을 처박고 말았습니다. 이 때의 화상으로 오른손의 엄지, 검지는 제대로 자라지 못했으며, 약지와 새끼손가락은 달라붙어 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본래 오른손잡이였지만 중학교 때 야구를 시작할 때부터 왼손을 사용하여 좌타자가 되었습니다.

1945

[히로시마 원폭 피폭 및 가족 상실]

5세 때 히로시마 원자 폭탄 투하 당시 피폭을 당하고 11세였던 큰 누나를 잃었습니다. 이는 그의 인생에 큰 아픔으로 남았습니다.

5세 때 히로시마에서 피폭을 당했고, 당시 11세였던 큰 누나를 잃었습니다. 일본 프로 야구계에서 피폭자 수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장훈과 노닌 와타루 2명뿐입니다.

1951

[야구에 첫 발을 딛다]

소학교 5학년 무렵, 수영부가 없는 기타하라 중학교에 진학하며 야구부에 들어가 야구를 처음으로 접했습니다. 그의 위대한 야구 인생이 시작된 순간입니다.

장훈이 소학교 5학년 무렵에 야구를 처음으로 접했고, 수영에 자신이 있었지만 진학한 기타하라 중학교에는 수영부가 없었기 때문에 대신 야구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투수와 타자 모두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1956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첫 스카우트 제의]

고등학교 1학년 때 명문 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으나, 형의 충고에 따라 고교 졸업 후 입단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장훈은 고등학교 시절 동갑내기인 오 사다하루와 함께 '동쪽의 오, 서쪽의 하리모토'라고 불리며 초고교급 선수의 면모를 과시했습니다. 그는 이미 고등학교 1학년 때 명문 구단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고교를 졸업해야 한다는 형의 충고로 입단하지 않았습니다.

1957

[나니와 상고 에이스로 맹활약]

무리한 변화구 연습으로 어깨 부상을 입었지만 타자로 전향하여 재기했습니다. 나니와 상고 야구부의 출전 금지 해제 후, 긴키 대회 예선에서 맹활약하며 초고교급 기량을 선보였습니다.

장훈은 나니와 상고에서 에이스이자 4번 타자였지만, 무리한 변화구 연습으로 어깨가 망가져 야구를 포기하려 했을 때 타자로 전향해 보라는 권유에 타자로 재기했다고 합니다. 1957년 가을, 출전 금지가 해제되었고, 장훈은 긴키 대회 예선 13경기에서 홈런 11개, 5할 6푼의 타율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야구부 내의 폭력 사고로 휴부 명령을 받아 고시엔 출전이 무산되었습니다.

1958

[도에이 플라이어스 정식 입단]

요미우리 입단이 무산된 뒤, 도에이 플라이어스 구단주의 정성에 감복하여 계약금 200만 엔, 월급 4만 5천 엔에 정식 입단 계약을 맺으며 프로 야구 선수로서의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고교 3학년 때 요미우리를 비롯한 여러 팀의 입단 제의를 받았지만, 요미우리는 이전에 휴부를 받은 사실을 빌미로 감독의 스카우트 요청을 거부하며 요미우리 입단은 무산되었습니다. 주니치 드래건스 등이 훨씬 더 좋은 조건을 제시했지만, 직접 히로시마의 판자집에 찾아와 호소한 도에이 플라이어스 오오카와 히로시 구단주의 정성에 감복했습니다. 장훈은 1958년 11월 16일 도쿄 도에이 본사에서 계약금 200만 엔, 월급 4만 5천 엔에 정식 입단 계약을 맺었습니다.

1959

[재일 한국인 선수 활동의 길을 열다]

도에이 구단주의 노력으로 퍼시픽 리그 규약에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선수는 국적을 불문하고 외국인 선수 제한 규정을 받지 않는다는 조항이 삽입되었습니다. 이로써 재일 한국인 야구 선수들이 귀화 없이 일본 프로 야구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당시 일본 프로 야구는 구단별로 3명의 외국인 선수를 보유할 수 있었고, 2명만 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장훈은 대한민국 국적이었으므로 외국인 선수 제한 규정의 적용을 받아야 했습니다. 아무리 초고교급 선수라 해도 고교를 갓 졸업한 장훈이 미국인 용병과 출장 경쟁을 벌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도에이 구단주는 장훈에게 양자가 되면서 귀화할 것을 권했지만, 장훈의 어머니는 그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게 하였습니다. 도에이 구단주는 장훈을 놓칠 수 없었기에 퍼시픽 리그의 규약에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선수는 국적을 불문하고 외국인 선수 제한 규정을 받지 않는다는 조항 삽입을 제안하여 관철하였습니다.

[일본 프로 야구 신인왕 수상]

데뷔 첫 해 팀 최다 홈런(13개), 팀 최다 타점(57개), 타율 2할 7푼 5리를 기록하며 기자단 투표로 일본 프로 야구 신인왕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첫 해 팀 최다 홈런(13), 팀 최다 타점(57), 타율 2할 7푼 5리를 기록했고, 기자단 투표서 141표 중 111표를 얻어 신인왕에 선정되었습니다.

[프로 데뷔 첫 출장]

도에이 플라이어스 소속으로 개막전 6번 좌익수로 첫 출장했으나, 첫 타석 삼진과 외야 수비 실책으로 인해 즉시 교체되며 쓰디쓴 프로 데뷔전을 치렀습니다.

1959년 4월 10일,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개막전에서 6번 좌익수로 첫 출장했습니다. 첫 타석에서 '터프가이'와 '가솔린 탱크'로 불리던 한큐 브레이브스의 에이스 투수 요네다 데쓰야에게 3구 삼진을 당했고, 2회초 외야 수비에서 평범한 뜬공을 머리 위로 흘려 보내고는 즉시 교체되었습니다.

[프로 첫 안타와 홈런 기록]

데뷔 다음 날 한큐전에서 아키모토 유사쿠를 상대로 개인 통산 1호 안타인 좌중간 2루타를 기록했고, 다음 타석에서는 이시이 투수를 상대로 우월 홈런을 때려내 개인 통산 1호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1959년 4월 11일, 고마자와 구장에서 열린 한큐전에서 3회말 두 번째 타석에서 아키모토 유사쿠를 상대로 좌중간 2루타로 개인 통산 1호 안타를 기록했고, 다음 타석에서 이시이 투수를 상대로 우측 홈런을 때려내 개인 통산 1호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고졸 신인 최초 4번 타자 발탁]

프로 입단 47경기 만에 3번 타순으로 올라섰고, 같은 달 23일에는 고졸 신인으로서는 일본 프로 야구 최초로 4번 타자에 발탁되는 기록을 세우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1959년 6월 중순에 프로 입단 47경기 만에 3번으로 올라섰고, 같은 달 23일에는 4번에 발탁되었는데, 이는 고졸 신인으로서는 최초의 기록이었습니다. 1986년 기요하라(세이부)가 입단하기 전까지 유일한 기록이었습니다.

1961

[첫 수위 타자 타이틀 획득]

이 해 0.336의 타율로 생애 처음으로 수위 타자 타이틀을 획득하며 일본 프로 야구 최고 타자로서의 입지를 다졌습니다.

1961년 시즌, 장훈은 타율 0.336으로 처음으로 수위 타자에 올라섰습니다.

[개인 첫 사이클링 안타 달성]

데뷔 3년차 시즌, 긴테쓰 버팔로전에서 2점 홈런, 3루타, 안타, 2루타를 기록하며 일본 프로 야구 역대 19번째로 개인 첫 사이클링 안타를 달성했습니다.

데뷔 3년차인 1961년 시즌, 5월 7일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전에서 개인 첫 사이클링 안타(2점 홈런, 3루타, 안타, 2루타)를 기록했고, 난카이의 스기우라를 상대로 첫 만루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1962

[일본 프로 야구 MVP 수상 및 일본 시리즈 우승]

데뷔 4년차 시즌에 31홈런, 99타점, 타율 3할 3푼 3리를 기록하며 일본 프로 야구 MVP를 거머쥐었고, 소속팀 도에이 플라이어스를 일본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데뷔 4년차인 1962년 시즌에는 처음으로 30개 이상의 홈런을 때려내는 등 결승 2점 홈런으로 올스타전에서 MVP를 수상했고, 또한 이 해 시즌 일본 프로 야구 최우수 선수(MVP)를 거머쥐었습니다. 그는 이 해 시즌 3할 3푼 3리의 타율, 31홈런, 99타점을 기록했습니다. 이 해 도에이 플라이어스는 명감독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의 지도하에 한신 타이거스의 투수 무라야마 미노루가 소속된 한신을 꺾고 1962년 일본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1970

[4회 연속 수위 타자 달성 및 역대 최고 타율 기록]

1967년부터 1970년까지 4년 연속 수위 타자 기록을 세우며 타격의 달인임을 입증했으며, 특히 1970년에는 3할 8푼 3리의 타율로 당시 일본 프로 야구 최고 타율을 기록했습니다.

1966년 시즌 3할 3푼의 타율로 타격 2위를 차지했고, 이후 1967년부터 1970년까지 4회 연속 수위 타자 기록을 세웠습니다. 특히 1970년 시즌에는 3할 8푼 3리의 타율로 일본 프로 야구 최고 타율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1986년 랜디 바스가 0.389를 기록하기 전까지 1위 기록이었습니다.

1975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트레이드]

센트럴 리그의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다카하시 가즈미, 도미다 마사루와의 2대1 맞트레이드를 통해 이적하며 오 사다하루와 함께 'OH포'를 결성하게 되었습니다.

1975년 12월 11일, 센트럴 리그의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장훈을 받아들이고, 그 팀에 있던 다카하시 가즈미, 도미다 마사루를 닛폰햄 파이터스에 보내는 방식으로 2 대 1 맞트레이드를 하였습니다. 이로써 오 사다하루-나가시마의 ‘ON포’에 이은 오 사다하루-하리모토 이사오의 ‘OH포’가 탄생했습니다.

1976

[센트럴 리그 30경기 연속 안타 신기록]

요미우리 이적 첫 해, 30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하며 당시 센트럴 리그 신기록을 수립했고, 타율 2위(0.3547)를 기록하는 등 변함없는 기량을 과시했습니다.

1976년 시즌, 장훈은 타율 0.3547로 타격 2위를 기록했고, 5월 13일부터 6월 20일까지 30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하며 당시 센트럴 리그 신기록을 수립했습니다.

1980

[체육 훈장 맹호장 수여]

통산 3,000안타를 기록한 공로를 인정받아 당시 최규하 대통령으로부터 체육 훈장 맹호장이 수여되었습니다.

1980년에는 통산 3,000안타를 기록한 공로로 최규하 대통령으로부터 체육 훈장 맹호장이 수여되었습니다.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 3000안타 대기록]

롯데 오리온스 소속으로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서 우월 2점 홈런을 기록하며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3000안타의 위대한 대기록을 달성했습니다.

1980년 5월 28일, 롯데 오리온스에서의 첫 시즌, 가와사키 구장에서 열린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서 6회말 1사 2루의 4번째 타석에서 야마구치 다카시를 상대로 우월 2점 홈런을 기록해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3000안타의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1981

[현역 은퇴 선언]

1981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하며 23년간의 프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통산 504홈런, 3,085안타, 타율 3할 1푼 9리 등 전설적인 기록을 남겼습니다.

1981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으며 그 이후 롯데 감독 물망과 한국 프로팀 진출설이 있었으나 무산됐습니다. 통산 2,752경기에 출장하여 504홈런, 3,085안타, 타율 3할 1푼 9리, 1,676타점, 319도루를 기록했습니다. 수위 타자 7회(4회 연속 수상) 역시 일본 프로 야구 역대 최고 기록입니다.

[현역 선수로서 마지막 경기]

롯데 오리온스 소속으로 현역 선수로서의 마지막 경기를 치르며, 23년간의 빛나는 프로 야구 선수 경력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1981년 10월 10일, 롯데 오리온스 소속으로 현역 선수로서의 마지막 경기를 치렀습니다.

1982

[KBO 총재 특별 보좌관으로 활동 시작]

현역 은퇴 후 이듬해 발족된 KBO 리그 총괄 단체인 KBO의 총재 특별 보좌관을 2005년까지 맡아 한국 야구의 탄생과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습니다.

현역에서 은퇴한 그는 이듬해인 1982년에 발족된 KBO 리그 총괄 단체인 KBO의 총재 특별 보좌관을 2005년까지 맡았고, KBO 리그 창설 당시 조직 구성과 인재 파견 등의 지원 등 대한민국과 일본의 스포츠계 및 재일 한국인 사회의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1990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99번째로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일본 야구 기구(NPB)는 올스타전 기간 중 성대한 헌액식을 치러주며 그의 업적을 기렸습니다.

1990년에는 99번째로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일본 야구 기구(NPB)는 올스타전 기간 중 헌액식을 성대하게 치러 주었습니다. 라이벌이자 친구인 오 사다하루는 장훈보다 은퇴가 1년 빨랐지만, 장훈보다 명예의 전당 헌액은 더 늦었습니다.

2006

[TBS 야구 해설자로 활동 시작]

현역 은퇴 후 2006년부터 TBS TV와 TBS 라디오의 야구 해설자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2007년부터는 프리랜서로서 TBS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습니다.

현역 은퇴 후에는 2006년부터 TBS TV, TBS 라디오의 야구 해설자로 맡았으나 2007년부터 전속이 흐트러졌기 때문에 프리랜서가 되었습니다(하지만 TBS의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습니다).

2007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여]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수여되었습니다. 이는 KBO 리그 창설 지원 등 한국과 일본 스포츠계 및 재일 한국인 사회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입니다.

2007년에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수여되었습니다. KBO 리그 창설 당시 조직 구성과 인재 파견 등의 지원 등 대한민국과 일본의 스포츠계 및 재일 한국인 사회의 발전에 기여한 공적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무궁화장은 일본의 훈장 등에 해당합니다. 일본에서 활동한 스포츠 선수로서 대한민국의 문화 훈장을 받은 유일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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