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숙 (농구인)
농구 선수, 지도자, 올림픽 메달리스트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28:13
대한민국 여자 농구의 전설적인 센터이자 상징적인 인물. 1959년 경남 남해 출생으로, 190cm의 장신을 활용해 국제 무대에서 활약하며 한국 여자 농구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1975년 최연소 국가대표로 발탁된 이래, 1979년 세계선수권과 1984년 LA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구기 종목 사상 최초 은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은퇴 후에도 해외 진출, 플레잉코치, 주부 선수 등으로 활동하며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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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
[한국 농구의 별, 박찬숙 탄생]
대한민국 농구의 전설, 박찬숙 선수가 경상남도 남해군에서 태어났다. 190cm의 장신을 타고나며 훗날 한국 여자 농구의 중심으로 성장할 재목이었다.
1959년 6월 3일, 경상남도 남해군에서 박찬숙이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신체 조건을 보였으며, 숭의국민학교 5학년 때 농구를 시작하며 미래의 농구 스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75
[최연소 국가대표 발탁, 한국 농구계의 샛별 등장]
숭의여자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찬숙은 뛰어난 기량을 인정받아 최연소 국가대표로 발탁되며 한국 농구계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1975년, 숭의여자고등학교 1학년이라는 어린 나이에 박찬숙은 대한민국 여자 농구 국가대표팀에 최연소로 발탁되었다. 이는 그녀의 뛰어난 재능과 잠재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사건으로, 향후 한국 농구의 미래를 짊어질 선수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76
[아시아 선수권 은메달 획득]
박찬숙은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FIBA 아시아 여자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여 은메달을 획득하며 국제 무대에서의 경쟁력을 입증했다.
1976년 홍콩에서 열린 FIBA 아시아 여자 선수권 대회에 대한민국 여자 농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는 그녀의 국가대표 경력 초기에 중요한 국제 대회 경험이자 성과였다.
1978
[실업 입단 및 아시안 게임 금메달 획득]
숭의여고를 졸업한 박찬숙은 실업팀 태평양화학에 입단하여 '무적 함대'의 주축으로 활약하며, 방콕 아시안 게임 농구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1978년, 박찬숙은 숭의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실업 농구의 명문 태평양화학 여자 농구단에 입단했다. 같은 해 방콕 아시안 게임 농구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한국 여자 농구의 전성기를 이끌 주역임을 증명했다. 또한, 1978년 쿠알라룸푸르 FIBA 아시아 여자 선수권 대회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했다.
1979
[세계선수권 은메달, 한국 농구의 새 역사]
서울에서 열린 세계 여자 농구 선수권 대회에서 박찬숙은 국가대표팀의 주전 센터로 맹활약하며, 대한민국 최초로 은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1979년 서울에서 개최된 세계 여자 농구 선수권 대회에서 박찬숙은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이며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이 은메달을 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는 한국 농구 역사상 중요한 이정표로 기록되었다.
1980
1980년 홍콩에서 열린 FIBA 아시아 여자 선수권 대회에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금메달을 획득하며 아시아 최강의 입지를 굳혔다.
1982
[아시안 게임 은메달, 아시아선수권 금메달 획득]
뉴델리 아시안 게임 농구에서 은메달을 따냈고, 같은 해 FIBA 아시아 여자 선수권 대회에서는 다시 한번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 농구 단체전에서 은메달을 획득했으며, 도쿄에서 열린 FIBA 아시아 여자 선수권 대회에서도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이 금메달을 따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84
[LA 올림픽 구기 종목 최초 은메달 쾌거]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여자 농구 국가대표팀이 준결승에서 중국을 꺾고 구기 종목 사상 최초로 은메달을 획득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만들었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하계 올림픽에서 박찬숙은 국가대표팀의 주축으로 활약하며, 준결승에서 강호 중국을 물리치고 결승에 진출했다. 비록 결승전에서는 패했지만, 대한민국 올림픽 역사상 구기 종목에서 최초로 은메달을 획득하는 전설적인 업적을 남겼다. 이 해 상하이에서 열린 FIBA 아시아 여자 선수권 대회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했다.
1985
[현역 은퇴 및 지도자 변신]
한국 여자 농구의 간판이던 박찬숙은 현역 선수 생활에서 잠시 물러나 태평양화학의 코치와 염광여중의 코치를 지내며 지도자로서의 새 출발을 알렸다.
1985년, 박찬숙은 태평양화학에서의 현역 선수 생활을 1차 은퇴하고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태평양화학 코치와 염광여중 코치를 역임하며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를 후진 양성에 쏟기 시작했다.
1988
[해외 리그 진출과 서울 올림픽 출전]
잠시 은퇴했던 박찬숙은 대만 리그 난야플라스틱, 백금보석에서 플레잉코치로 활약하며 복귀했고, 같은 해 서울 올림픽에도 출전하며 꾸준함을 보여주었다.
1985년 잠시 은퇴했던 박찬숙은 1988년 대만의 난야플라스틱과 백금보석 여자 농구단에서 선수 생활을 재개했다. 플레잉코치로 활동하며 해외 무대에서 경험을 쌓았고, 같은 해 대한민국에서 열린 서울 올림픽에도 국가대표로 출전하며 노련한 기량을 선보였다.
1992
[태평양화학 복귀, 코치 겸 선수 활동]
대만에서의 활약을 마치고 태평양화학으로 돌아온 박찬숙은 코치 겸 선수로 활동하며, 결혼과 함께 일찍 은퇴하던 당시 여자 선수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1992년부터 1993년까지 박찬숙은 태평양화학 여자 농구단에서 코치 겸 선수로 활동하며 국내 무대로 복귀했다. 결혼 후에도 선수 생활을 이어가며 주부 선수로 활약하는 등 당시 여자 스포츠 선수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1993
1993년부터 1996년까지 박찬숙은 태평양화학 여자 농구단에서 코치로 활동하며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더욱 강화하고 팀의 성장에 기여했다.
1997
1997년부터 박찬숙은 염광여자중학교 농구팀 코치를 맡아 젊은 선수들을 지도하며 한국 농구의 미래를 위한 인재 양성에 기여했다. (이후 청주 현대 하이페리온 코치로 연결됨)
2004
[농구 해설 및 행정가로 활약]
아테네 올림픽 KBS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며 현장의 생생함을 전달했고, 한국여자농구연맹 경기감독관, 대한농구협회 이사 등을 역임하며 농구 행정에도 참여했다.
2004년, 박찬숙은 제28회 아테네 올림픽에서 KBS 농구 해설위원으로 활약하며 방송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또한 한국여자농구연맹 경기감독관과 대한농구협회 이사로 활동하며 한국 농구 발전에 기여했다.
2005
[대한체육회 부회장 및 국가대표 감독 역임]
대한체육회 부회장에 선임되어 스포츠 행정가로서의 역할을 확대했고, 마카오 동아시아 대회 여자 농구 대표팀 감독으로 팀을 이끌었다.
2005년, 박찬숙은 대한체육회 부회장직을 맡아 한국 스포츠 발전에 기여했다. 같은 해 마카오에서 열린 제4회 동아시아 경기 대회에서는 여자 농구 대표팀 감독을 맡아 선수들을 지도했다.
2006
2006년, 박찬숙은 중화민국에서 열린 제28회 윌리엄 존스컵 국제농구대회에 여자 농구 대표팀 코치로 참가하여 후배들을 지도하고 팀의 기량을 향상시키는 데 일조했다.
2014
[유방암 투병 중 채무 문제 발생]
유방암 수술로 수입이 줄어들자 12억 7천만원의 채무를 감당하지 못해 법원에 파산·면책 신청을 했으나, 소득 은닉 사실이 드러나 1심에서 불허가 결정이 내려졌다.
2014년, 박찬숙은 유방암 수술을 받으면서 농구교실 강의 수입이 줄어들어 총 12억 7천만원의 채무를 갚지 못하게 되자 법원에 파산·면책 신청을 했다. 그러나 채권자들이 이의를 제기했고, 법원 조사 과정에서 2013년~2015년 다른 농구교실 강의로 벌어들인 월 200만~300만원의 소득을 딸의 계좌로 받아 숨긴 사실이 밝혀져 1심에서 파산·면책 불허가 결정을 받았다.
2016
[채무 문제, 파산·면책 항고심 최종 허가]
1심의 불허가 결정에 항고한 박찬숙은 서울중앙지법 항고심에서 파산·면책 허가 결정을 받아 복잡했던 채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1심에서 파산·면책 불허가 결정을 받은 박찬숙은 이에 불복하여 항고했다. 2016년 12월 16일, 서울중앙지법 항고심은 1심 결정을 깨고 파산·면책을 허가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로써 박찬숙은 오랜 채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