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안군
왕족, 조선 왕족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27:23
조선 중기의 왕족으로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의 셋째 아들입니다. 소현세자의 아들 중 유일하게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했으며, 어머니 사사 후 어린 나이에 제주도로 유배되었습니다. 효종 즉위 후 복권되어 경안군에 봉작되었고, 승헌대부에 이르렀습니다. 사후에는 증 현록대부에 추증되었습니다.
본 문서는 위키백과 경안군 문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편집되었으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배포됩니다.
1644
조선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의 셋째 아들 이회(李檜)가 1644년 10월 5일, 심양 산해관 질관에서 태어났다. 그의 초명은 석견(石堅)이었다. 그는 소현세자의 아들 중 유일하게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하였다.
1646
[어머니 사사 및 제주도 유배]
어머니 민회빈 강씨가 인조 수라에 독을 탔다는 혐의로 사사되자, 4세의 어린 나이로 형들과 함께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646년, 어머니 민회빈 강씨가 인조의 수라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로 사약을 받아 죽었다. 이에 연좌되어 경안군 이회는 당시 4세의 어린 나이로 두 형 석철, 석린과 함께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시작했다.
1649
[인조의 해도 이치 지시]
유배 중이던 두 형 석철, 석린이 잇달아 사망하자 인조는 그를 육지와 가까운 해도로 옮기도록 지시했으나, 명령이 도착하기 전에 인조가 죽어 실행되지 못했다.
제주도 유배 중이던 이회의 두 형 석철과 석린이 잇달아 죽자, 1649년 3월 17일 인조는 이회를 육지와 가까운 해도(海島)로 옮겨 안치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이 명령이 도착하기 전에 인조가 사망하여 지시는 실행되지 못했다.
1650
1650년 효종이 즉위한 후, 경안군 이회는 제주도에서 강화도로 유배지가 옮겨져 계속 유배생활을 이어갔다.
1656
1656년, 경안군 이회는 오랜 유배생활 끝에 귀양에서 풀려나 석방되었다.
1659
[경안군 봉작 및 복권]
효종의 명으로 복권되고 경안군에 봉작되었으며, 승헌대부의 관직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이름이 이회로 기록되었다.
1659년 윤 3월 4일 (양력 4월 24일), 효종의 명으로 소현세자의 자녀들이 봉작될 때, 이석견은 복권되고 경안군(慶安君)에 봉해졌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은 이회(李檜)로 기록되었으며, 승헌대부(承憲大夫)의 관직에 이르렀다.
1663
1663년 음력 7월, 경안군 이회의 첫째 아들 임창군 이혼(臨昌君 李焜)이 태어났다.
1665
1665년, 경안군 이회의 둘째 아들 임성군 이엽(臨城君 李熀)이 태어났다. 임성군은 후에 백부 경선군에게 출계했으나 아들 없이 요절했다.
1665년, 온천에 목욕하러 갔던 경안군 이회는 병이 나서 그 해 9월 18일 실려서 돌아왔다.
[경안군 이회 사망]
온천에서 얻은 병으로 갑자기 사망하였다. 현종은 특별히 예장을 명하고, 그를 구호하지 못한 의관을 정배시켰다.
1665년 9월 22일, 경안군 이회는 온천에서 얻은 병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당시 현종은 특별히 예장(禮葬)을 명하고, 그를 제대로 구호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의관 박군을 잡아들여 신문 후 형장을 가하고 정배시켰다. 집안이 가난하여 장례를 치르기 어려웠던 그의 자녀들을 위해 현종이 임시로 집을 지어주기도 했다.
1686
1686년(숙종 12년) 5월 25일, 경안군 이회는 증직으로 증 현록대부(贈顯祿大夫) 겸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에 추증되었다.
1723
1723년(경종 3년) 6월 5일, 경안군의 부인 분성군부인 김해 허씨가 사망하자 경안군의 묘 옆에 합장되었다. 묘비와 신도비가 세워졌으나 신도비는 비문 판독이 불가능하다.
1724
1724년 음력 2월 경술일 (양력 3월 23일), 경안군의 장남 임창군 이혼이 사망하였다. 임창군의 차남 밀남군 감은 백부 경선군에게 출계한 임성군에게 출계되었다.
1745
1745년, 다른 곳에 안장되어 있던 경안군의 아들 임창군 내외의 묘소가 경안군의 묘소 근처로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