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 (삼국지)
촉한 장수, 정치인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27:18
이회는 삼국시대 촉한의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유비의 입촉 시기에 전세 판단을 통해 유비에게 귀순하며 마초를 설득해 합류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후 내강도독과 교주자사 등 주요 직책을 역임하며 남만 정벌에 참여하고 반란을 진압하여 촉한의 안정에 기여했다. 뛰어난 지략과 용맹으로 촉한의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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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독우 벼슬과 파면]
이회는 군에서 독우 벼슬을 지냈으나, 고모부 찬습의 법령 위반 사건에 연루되어 파면당했다. 이후 태수 동화의 추천으로 유장이 다스리는 익주로 천거되었다.
이회는 고향 건녕군에서 독우(督郵) 벼슬을 지냈다. 그러던 중, 건령현령으로 있던 그의 고모부 찬습이 법령을 위반하는 일이 발생했고, 이회는 이 사건에 연루되어 관직에서 파면되는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당시 태수였던 동화(董和)는 찬습이 그 지방의 유력 호족임을 고려하여 사건을 문제 삼지 않았고, 이회의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동화는 이회를 유장(劉璋)이 다스리던 익주(益州)로 천거하여 그의 관직 생활을 이어가게 했다.
214
[유비에게 귀순 및 마초 설득]
유비가 유장을 공격하는 소식을 들은 이회는 유장의 패배를 예견하고 유비에게 귀순했다. 유비는 이회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를 한중으로 보내 마초와 우호를 맺도록 지시했고, 이에 마초는 유비에게 귀순했다.
이회는 유장에게 천거되어 임지로 향하는 도중, 유비가 가맹(葭萌)에서 돌아와 유장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유장이 반드시 유비에게 패배할 것임을 직감하고, 유비에게 합류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군의 사자라는 명목으로 북쪽으로 향해 면죽(綿竹)에서 유비를 만났다. 유비는 이회의 선견지명과 용기에 감탄하며 그를 칭찬했고, 낙성(雒城)까지 자신을 수행하도록 했다. 이후 유비는 이회를 한중(漢中)으로 파견하여, 당시 장로(張魯)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던 마초(馬超)와 우호를 맺고 설득하도록 했다. 이회의 활약으로 마초는 유비에게 귀순하여 촉한 건국에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215
[익주 공조서좌주부 임명 및 별가종사 승진]
성도 평정 후 유비는 이회를 익주 공조서좌주부로 임명했다. 이후 모함으로 잠시 체포되었으나, 유비가 직접 나서 사실무근임을 밝히고 이회를 별가종사로 승진시켰다.
유비가 성도를 평정하고 익주목을 겸임하게 되자, 이회를 익주의 공조서좌주부(功曹書佐主簿)로 임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도망자가 이회를 모함하여 모반을 꾀한다고 고발했다. 담당 관리가 이회를 체포하여 호송했으나, 유비는 이회의 충성심을 믿고 직접 나서서 모함이 사실무근임을 밝혀주었다. 유비는 오히려 이회를 별가종사(別駕從事)로 승진시켜 그의 능력을 더욱 신임했다.
221
[내강도독 및 교주자사 임명]
장무 원년(221년), 유비는 내강도독 등방의 후임을 물었고, 이회는 겸손한 태도로 자신의 능력을 은근히 드러냈다. 이에 유비는 이회를 내강도독, 사지절로 임명하고 교주자사까지 겸임하도록 했다.
장무 원년(221년), 내강도독(來降都督) 등방(鄧方)이 사망하자 유비는 후임에 대해 이회에게 물었다. 이회는 공자의 가르침과 조충국의 사례를 인용하며 겸손하면서도 자신의 역량을 간접적으로 내비쳤다. 유비는 이미 이회를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밝히며 그를 내강도독(來降都督)에 임명하고, 사지절(使持節)의 권한을 주었으며, 더 나아가 교주자사(交州刺史)까지 겸임하도록 하여 평이현(平夷縣)에 주둔시켰다. 이는 그에 대한 유비의 깊은 신뢰와 기대를 보여주는 인사였다.
225
[제갈량의 남만 정벌 참여 및 활약]
유비 사후 남만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제갈량의 남만 정벌에 이회가 참여했다. 이회는 소수의 병력으로 적의 포위를 당했으나, 기지를 발휘하여 적을 속이고 대승을 거두었다. 이 공로로 한흥정후에 봉해지고 안한장군의 관직을 받았다.
유비가 세상을 떠난 후, 남만(南蠻) 지역에서 고정(高定), 옹개(雍闓), 주포(朱褒)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승상 제갈량(諸葛亮)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남만 정벌에 나섰고, 이회는 제갈량을 따라 건녕(建寧)으로 향했다. 곤명(昆明)에서 이회의 군대는 반란군에게 포위당했고, 병력은 적군의 절반에 불과했다. 이회는 고향 사람이라는 점을 이용해 적군에게 거짓 정보를 흘려, "관군의 식량이 떨어져 병사를 물릴 것이며, 자신은 고향을 등지고 오래 있었으니 적군과 함께 대사를 도모하려 한다"고 속였다. 반란군이 그의 말을 믿어 포위를 느슨하게 하자, 이회는 즉시 출격하여 적군을 크게 격파했다. 그는 도주하는 적군을 반강(槃江)까지 추격하고 동쪽으로는 장가(牂牁)와 연접하며 제갈량과 호응하여 남만 평정에 큰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그는 한흥정후(漢興亭侯)에 봉해지고 안한장군(安漢將軍)의 관직을 더해 받았다.
227
[남만 재반란 진압 및 자원 확보]
남만 정벌 이후에도 남만족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고 수비 대장을 살해하자, 이회는 직접 토벌에 나서 반란 무리를 근절시켰다. 그는 유력자들을 성도로 이주시켰으며, 해당 지역에서 소, 군마, 금은 등을 공물로 받아 군용 물자를 충당하여 촉한 재정에 기여했다.
제갈량의 남만 정벌 이후 촉한의 군대가 돌아간 뒤, 남만족은 다시 반란을 일으켜 수비하던 대장을 살해했다. 이에 이회는 직접 토벌에 나서 흉악한 반란 무리들을 뿌리 뽑았다. 그는 남만 지역의 유력자들을 성도(成都)로 이주시킴으로써 반란의 재발을 방지하는 한편, 수(遂)와 복(樸) 지역에서 밭가는 소, 군마, 금과 은, 무소 가죽 등을 공물로 납입하도록 하여 촉한의 군용 물자를 지속적으로 충당했다. 이 조치로 당시 촉한의 군사 비용에 부족함이 없도록 재정적 기여를 했다.
229
[교주자사 해임 및 건영태수 겸임]
건흥 7년(229년), 교주가 오나라에 종속되면서 이회는 교주자사 직에서 해제되었다. 이후 건영태수를 겸임하게 되어 본래의 고향 지역으로 돌아와 거주하게 되었다.
건흥 7년(229년), 교주(交州)가 오나라에 종속되면서 이회의 교주자사 직책은 해제되었다. 대신 그는 건영태수(建寧太守)를 겸임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자신의 본군(本郡)인 건영으로 돌아와 거주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한중(漢中)으로 이주하여 여생을 보냈다.
231
이회는 건흥 9년(231년)에 사망하여 파란만장했던 생애를 마감했다. 그의 아들 이유(李遺)가 그의 뒤를 이었다. 그의 조카 이구(李球)는 훗날 촉한 멸망 시 제갈첨(諸葛瞻)을 수행하여 등애(鄧艾)에 맞서 싸우다 면죽(綿竹)에서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