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 (1859년)
대한제국 관리, 외교관, 독립운동가, 법률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26:23
이준은 대한제국 시기의 관리이자 외교관, 독립운동가입니다. 평리원 검사로 재직하며 부정부패 척결에 앞장서는 등 강직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독립협회, 개혁당 등 개화파 활동을 통해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습니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파견되어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려 노력하던 중 순국했습니다. 사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그의 헌신은 오늘날까지 기려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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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
1859년(철종 9년) 1월 21일 함경남도 북청에서 이병관과 청주 이씨 부인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조선 추존 군주 환조의 아들인 완풍대군의 18대손입니다. 어려서 한학을 익혔고 성장해서는 고향 북청 학원을 설립, 교육 사업에 종사했습니다.
1895
[독립협회 활동 시작]
서재필의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활동하며, 갑오경장 이후 일본 와세다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했습니다. 귀국 후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개화파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1895년, 서재필의 독립협회에 가담해 활동했으며, 갑오경장시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자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했습니다. 귀국 후에는 독립협회와 상동교회의 활동을 재개하였습니다. 상동교회는 당시 전덕기 목사를 중심으로 개화파 청년들이 많이 모인 장소였습니다.
함흥에서 종 9품인 참봉직에 있다가 1895년 법관양성소에 입학하였습니다.
1895년 법관양성소를 1회로 졸업하며 법률가로서의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1896
[강직함으로 면관된 검사시보 이준]
한성재판소 검사시보로 임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황족의 토지 강탈 사건을 수사하며 강직한 모습을 보였으나, 상관을 고소했다는 이유로 33일 만에 면관되었습니다.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시보가 되었습니다. 황족 이재규가 친일 내각과 협잡하여 논밭 문서를 위조하고 백성들의 토지를 강탈하자 징역 10년을 구형했습니다. 법부가 은사 대상자 명단을 정해놓고 그대로 작성할 것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고 상관인 형사국장 김낙헌을 고소하였습니다. 법부는 부하가 상관을 고소했다는 이유로 이준을 체포했으나, 애국계몽단체 회원들과 백성들의 요구로 3일 만에 석방되었습니다. 이준은 석방 직후 법무 대신과 평리원 재판장 이하 관리들 모두의 면직과 처벌을 청원하며 나라의 현장을 바로잡고 국민의 분원을 풀어달라고 청원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이준은 법률가 임명 33일 만에 면관되었습니다.
1902
[애국계몽운동에 헌신]
민영환의 비밀 결사 개혁당에 가담하고 공진회 회장을 지냈으며, 유배 후 국민교육회 회장에 취임하여 보광학교, 오성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 계몽 운동에 힘썼습니다.
1902년 민영환의 비밀 결사 개혁당에 가담했으며, 1904년 공진회 회장을 지냈습니다. 공진회 활동으로 유배 생활을 한 뒤, 1905년 국민교육회 회장에 취임하고 보광학교, 오성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 계몽 운동에 힘썼습니다.
1905
1905년 1월 5일 보부상 단체를 모체로 1904년 발족한 공진회 회장 활동으로 황해도 황주 철도로 유배되었습니다.
1906
1906년 6월 17일 황주 철도 유배가 해제되었으며, 다음날인 6월 18일 평리원 검사(주임관 4등)로 임명되었습니다. 7월 31일에는 특별법원 검사를 겸임했습니다.
1907
[헤이그 특사 파견]
고종의 밀사 자격으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될 특사로 선정되어 블라디보스토크로 출항,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로 향했습니다.
1907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제국차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상동교회 전덕기, 이동휘, 이회영 등은 고종의 밀사를 파견하기로 계획했습니다. 고종에게 신임장을 받아 특사로는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이준이 정해졌습니다. 이준은 고종의 신임장을 들고 만주의 이상설, 러시아의 이위종과 차례로 합류하여 헤이그로 향했으며, 5월 21일 블라디보스토크로 출항하여 6월 2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하였습니다.
[헤이그 특사 순국]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어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려 했으나, 영일 동맹으로 인한 영국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헤이그의 숙소에서 순국했습니다.
헤이그에서 제국차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되어 을사조약 체결이 일본의 강제에 의한 것이었음을 폭로하려 했으나, 영일 동맹으로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의 방해로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고종이 폐위되고 순종이 즉위하는 고종 양위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준은 헤이그의 숙소에서 1907년 7월 14일 순국했습니다. 오랫동안 할복 자결로 알려졌으나, 1956년 조사 결과 병사한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1962
이준은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받았으며, 유해는 본래 헤이그에 묻혀 있다가 1963년 봉환되었습니다. 서울 장충단 공원에 동상이 세워져 있고, 헤이그에는 이준 열사 기념관과 이준열사기념교회가 건립되어 그의 헌신을 기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