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성군

왕족, 정치인, 무신, 군인

num_of_likes 0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26:21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no image
왕족, 정치인, 무신, 군인
report
Edit

조선 전기, 세종대왕의 손자이자 세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왕족 귀성군 이준은 20대에 무과에 급제하고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며 병조판서에 오르는 등 눈부신 활약을 펼쳤습니다. 28세의 어린 나이에 영의정까지 역임하며 조선 최고 권력의 정점에 섰으나, 왕권 교체기의 정치적 격랑 속에서 역모에 휘말려 유배당하고 39세의 나이로 비극적인 생을 마감했습니다. 빠르게 타올랐다 스러진 그의 드라마틱한 삶은 후대에 재평가되며 명예를 회복했습니다.


본 문서는 위키백과 귀성군 문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편집되었으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배포됩니다.

연관 연혁
  1. 등록된 연관연혁이 없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1441

[임영대군의 아들로 탄생]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는 할아버지 세종에게, 자라서는 큰아버지 세조에게 총애를 받으며 왕족으로서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1441년 1월 20일, 조선 한성부에서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할아버지 세종에게, 자라서는 큰아버지 세조에게 총애를 받았다.

1466

[무과 급제 및 도총관 임명]

뛰어난 능력으로 등준시무과에 갑과로 급제하며 무인으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았고, 곧바로 도총관에 임명되며 젊은 나이에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1466년 등준시무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도총관이 되었다.

1467

[이시애의 난 진압과 병조판서 역임]

이시애의 난이 발생하자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남이 장군과 함께 성공적으로 난을 진압하며 탁월한 군사적 역량을 입증했습니다. 이 공로로 27세의 젊은 나이에 병조판서에 제수되었습니다.

이듬해 1467년 남이와 함께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 총사령관에 임명되고 난을 진압한 공로로 27세의 나이로 병조판서에 제수되었다. 그 해 남이에게 그 직을 넘겼다.

1468

[최연소 영의정 등극]

28세의 나이로 조선 최고 관직인 영의정에 임명되며 파격적인 승진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그의 뛰어난 능력과 왕실의 깊은 총애를 짐작하게 합니다.

1468년 음력 7월 17일에 28세의 나이로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정치적으로는 훈구파에 가까웠지만, 신진세력 및 사림파와도 가깝게 지냈다.

[예종 즉위 시 섭정 역할 수행]

큰아버지 세조가 왕위를 선위하고 사촌 동생 예종이 즉위하자 영의정으로서 잠시 섭정을 맡으며 국정을 운영했습니다.

1468년 9월 큰아버지 세조가 선위하고 사촌 동생이자 손윗동서인 예종이 즉위하자 영의정으로써 잠시 섭정했다.

1469

[부친상으로 영의정직 사퇴]

아버지 임영대군이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상을 치르기 위해 영의정 직위에서 물러났습니다.

1469년 1월 아버지 임영대군이 훙서(薨逝)하자 아버지상을 치르기 직전에 영의정 직위에서 물러났다.

1470

[역모 연루 및 유배형 선고]

최세호가 "귀성군이 왕의 재목"이라 발언한 것이 역모로 몰리면서 함께 죽임을 당하고, 귀성군은 유배를 가게 되어 화려했던 정치 인생에 그림자가 드리워졌습니다.

1470년 최세호가 귀성군이 왕의 재목이라고 한 것을 정인지가 역모로 엮어서, 1월 14일에 최세호와 권맹희는 죽임을 당하고, 귀성군은 유배를 가게 된다.

1479

[유배지에서의 비극적인 죽음]

유배 생활 9년 만에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며 비극적인 생을 마감했습니다. 총애받던 왕족에서 최고 권력자에 올랐다가 유배지에서 생을 마치는 그의 운명은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습니다.

그로부터 9년 후 1479년 1월 28일에 3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1674

[숙종 대 명예 회복]

사망 후 한동안 복관되지 못하다가 숙종 시대에 이르러 영의정 김수항 등의 건의로 복관 조치가 이루어져 명예를 회복했습니다.

한동안 복관되지 못하다가 숙종 때의 영의정 김수항 등의 대신들에 의해 복관 조치 처분되었다.

1872

[고종에 의해 충무 시호 추시]

고종에 의해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받아, 그의 공적과 인품이 사후에라도 인정받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또한 고종에 의해 충무(忠武)의 시호를 받았다.

[고종 대 양자 입적을 통해 후사 계승]

고종 때 종친들의 건의로 무안대군의 현손인 회원군 이쟁을 양자로 삼아 그의 대를 잇게 함으로써, 끊겼던 후사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훗날 고종 때 종친들의 건의로 1872년(고종 9) 12월 4일 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의 대를 무안대군(撫安大君) 이방번(李芳蕃)의 현손인 회원군(會原君) 이쟁(李崢)을 양자로 삼아 잇게 하였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댓글 게시판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