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구 (의병장)
독립운동가, 의병장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25:46
이정구는 충남 천원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07년 정미7조약 이후 시작된 의병 투쟁에 1909년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친일파 처단과 일본군 수비대 사살 등 항일 무력 투쟁을 전개하며 활약했다. 결국 일제에 체포되어 종신유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해방 후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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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
[정미7조약 체결 및 군대 해산]
일제가 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고 식민지화 정책을 가속화하자, 이에 분격하여 전국적으로 수많은 의병이 봉기하였다.
1907년 7월, 일제는 「정미7조약(丁未7條約)」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켜 우리 민족의 무력을 박탈하는 등 식민지화를 향한 발걸음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에 분격하여 당시 전국적으로 수많은 의병이 봉기하였다.
1909
[한봉서 의진 투신 및 의병활동 시작]
이정구 의병장이 반일 의병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목적으로 한봉서 의병장 의진에 투신하여 본격적인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이정구는 반일 의병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목적을 가지고 1909년 음력 4월 한봉서 의병장 의진에 투신하여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또한 의병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비상 수단으로 같은 해 음력 10월 청주에서 군자금을 징수하기도 하였다.
[친일 이장 박모 처단]
충북 청주군 백자동의 친일 이장 박모가 의병의 소재를 일본군 수비대에 밀고하여 동지 2명을 죽게 하자, 그 원수를 갚기 위해 이정구 의병장이 박모를 총살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충북 청주군(淸州郡) 백자동(百子洞)의 친일 이장 박모(朴某)가 일찍이 의병의 소재를 일본군 수비대에 밀고하여 동지 2명을 피살케 한 원수를 갚고자 그를 총살하였다.
[괴산 일본군 수비대 공격 및 무기 노획]
충북 괴산군 사치에서 동지 9명과 함께 우편물을 호위하던 일본군 수비대 2명을 사살하고, 군용 총, 총검, 탄약함, 수통, 탄환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같은 해 5월 10일에는 충북 괴산군(槐山郡) 서면(西面) 사치(沙峙)에서 동지 9명과 함께 일본군 수비대 2명이 우편물을 호위하고 통과하는 것을 확인하고 사격을 가하여 이들 모두를 사살하고, 군용 총 2정, 총검 2자루, 탄약함 2개, 수통 1개, 탄환 10발을 노획하였다.
[친일 밀정 박래천 처단]
청주 북강내이면 화죽리에서 헌병분견소 밀정으로 활동하며 매국 행위를 일삼던 박래천을 체포하여 처단하였다.
같은 해 8월 15일에도 청주 북강내이면(北江內二面) 화죽리(花竹里)에서 헌병분견소의 밀정으로 활동하면서 매국배족의 행위를 일삼고 있던 박래천(朴來舛)을 체포, 처단하였다.
1910
그러다가 피체되어 1910년(체포 당시 34세) 3월 9일 공주지방재판소 청주지부에서 종신유형을 선고받았다.
[경성공소원에서 공소 기각 및 형 확정]
공주지방재판소의 종신유형 선고에 불복하여 공소하였으나, 경성공소원에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고, 이로 인해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공소하였으나 1910년 4월 5일 경성공소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5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