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구 (의병장)

num_of_likes 96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no image
독립운동가, 의병장 + 카테고리

이정구는 충남 천원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07년 정미7조약 이후 시작된 의병 투쟁에 1909년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친일파 처단과 일본군 수비대 사살 등 항일 무력 투쟁을 전개하며 활약했다. 결국 일제에 체포되어 종신유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해방 후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연표

1907

[정미7조약 체결 및 군대 해산]

일제가 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고 식민지화 정책을 가속화하자, 이에 분격하여 전국적으로 수많은 의병이 봉기하였다.

1907년 7월, 일제는 「정미7조약(丁未7條約)」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켜 우리 민족의 무력을 박탈하는 등 식민지화를 향한 발걸음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에 분격하여 당시 전국적으로 수많은 의병이 봉기하였다.

1909

[한봉서 의진 투신 및 의병활동 시작]

이정구 의병장이 반일 의병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목적으로 한봉서 의병장 의진에 투신하여 본격적인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이정구는 반일 의병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목적을 가지고 1909년 음력 4월 한봉서 의병장 의진에 투신하여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의병 군자금 징수]

의병자금 확보를 위한 비상 수단으로 청주에서 군자금을 징수하는 활동을 펼쳤다.

또한 의병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비상 수단으로 같은 해 음력 10월 청주에서 군자금을 징수하기도 하였다.

[친일 이장 박모 처단]

충북 청주군 백자동의 친일 이장 박모가 의병의 소재를 일본군 수비대에 밀고하여 동지 2명을 죽게 하자, 그 원수를 갚기 위해 이정구 의병장이 박모를 총살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충북 청주군(淸州郡) 백자동(百子洞)의 친일 이장 박모(朴某)가 일찍이 의병의 소재를 일본군 수비대에 밀고하여 동지 2명을 피살케 한 원수를 갚고자 그를 총살하였다.

[괴산 일본군 수비대 공격 및 무기 노획]

충북 괴산군 사치에서 동지 9명과 함께 우편물을 호위하던 일본군 수비대 2명을 사살하고, 군용 총, 총검, 탄약함, 수통, 탄환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같은 해 5월 10일에는 충북 괴산군(槐山郡) 서면(西面) 사치(沙峙)에서 동지 9명과 함께 일본군 수비대 2명이 우편물을 호위하고 통과하는 것을 확인하고 사격을 가하여 이들 모두를 사살하고, 군용 총 2정, 총검 2자루, 탄약함 2개, 수통 1개, 탄환 10발을 노획하였다.

[친일 밀정 박래천 처단]

청주 북강내이면 화죽리에서 헌병분견소 밀정으로 활동하며 매국 행위를 일삼던 박래천을 체포하여 처단하였다.

같은 해 8월 15일에도 청주 북강내이면(北江內二面) 화죽리(花竹里)에서 헌병분견소의 밀정으로 활동하면서 매국배족의 행위를 일삼고 있던 박래천(朴來舛)을 체포, 처단하였다.

1910

[공주지방재판소에서 종신유형 선고]

의병활동 중 체포된 이정구 의병장이 공주지방재판소 청주지부에서 종신유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다가 피체되어 1910년(체포 당시 34세) 3월 9일 공주지방재판소 청주지부에서 종신유형을 선고받았다.

[경성공소원에서 공소 기각 및 형 확정]

공주지방재판소의 종신유형 선고에 불복하여 공소하였으나, 경성공소원에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고, 이로 인해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공소하였으나 1910년 4월 5일 경성공소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5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정부에서 이정구 의병장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이정구 (의병장)
+ 사건추가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