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원 (1831년)
조선 왕족, 문신, 관료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25:32
조선 후기 왕족이자 문신 이재원은 남연군의 손자이자 고종의 사촌 형으로,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주요 관직을 역임했습니다. 정시문과 급제 후 사헌부 지평, 홍문관 응교, 성균관 대사성 등을 거쳐 도승지, 이조참판, 예조·형조판서 등을 지냈습니다. 흥선대원군 실각 후에도 관직을 유지했으며, 갑신정변 당시 영의정에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생전에는 문신으로 활동했으나, 사후 고조부 사도세자가 왕으로 추존되면서 왕족으로 편입되어 '완림군'에 추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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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1
[이재원 탄생]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왕족인 완림군 이재원이 한성부 북부 관광방 계동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남연군의 장손이자 고종의 사촌 형이며 흥선대원군의 조카입니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왕족인 완림군 이재원(李載元)이 한성부 북부(北部) 관광방(觀光坊) 계동(桂洞)의 계동궁(桂洞宮)에서 태어났습니다. 자는 순팔(舜八), 시호는 효정(孝貞)이며 본관은 전주 이씨입니다. 남연군 이구의 장손이자 고종과 흥친왕, 완은군의 사촌 형이며, 흥선대원군의 조카입니다. 계동궁은 그의 집이자 연령군, 은신군의 제사를 모셨습니다.
1848
[음서로 첫 관직, 영릉참봉]
음서 제도를 통해 처음으로 영릉참봉에 임명되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불과 한 달 만에 사직했습니다.
음서 제도를 통해 관직에 올라 1848년(헌종 15년) 5월 영릉참봉에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한 달 만에 사퇴했습니다.
1850
1850년 12월 선릉참봉에 임명되었습니다.
1853
[정시문과 급제와 철종의 특별 예우]
철종 4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습니다. 철종은 그가 은신군 가문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특별히 승지를 보내 치제하게 하는 등 파격적인 예우를 베풀었습니다.
1853년(철종 4년) 철종이 친히 춘당대에서 주관한 응제에서 부(賦)에서 1등하여 특별히 직부전시(초시, 복시에 응시하지 않고 바로 대과에 응시할 자격)의 명을 받았습니다. 같은 해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습니다. 철종은 그가 은신군 가문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겹경사라 하여 은신군 사판에 승지를 보내 치제하게 했습니다.
1854
1854년 사헌부 지평이 되었고, 1855년에는 사헌부 장령이 되었습니다.
1857
[학술기관 요직 역임]
홍문관 응교, 1857년 홍문관 교리, 성균관 사성 등을 거치며 주요 학술 및 교육기관의 요직을 두루 경험했습니다.
이후 홍문관 응교, 1857년 홍문관 교리, 성균관 사성을 거쳐 빈전 도감 당상(殯殿都監堂上)이 되었습니다.
1863
1863년 3월 이조참의가 되었고, 같은 해 7월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그해 말 행 호군으로 전임되었습니다.
1864
[흥선대원군 집권기 중용, 도승지 임명]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동지경연사로 승진했으며, 승진 기념으로 집안의 면세전을 임금에게 바치자 바로 행 승정원 도승지에 임명되었습니다.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중용되어 1864년(고종 1년) 1월 동지경연사로 승진했습니다. 1월 12일에는 승진 기념으로 자신의 집안에 내려오던 면세전(세금이 면제된 토지)을 임금에게 바치자 바로 행 승정원 도승지에 임명되었습니다.
[핵심 관직 연속 역임]
도승지 임명 후 그해 3월 도승지 겸 사헌부 대사헌, 4월에는 종친부 유사당상, 동지돈녕부사, 이조참판 등 요직을 거치며 권력의 중심부에서 활약했습니다.
도승지 임명 후 그해 3월 승정원 도승지 겸 사헌부 대사헌, 4월 종친부 유사당상, 동지돈녕부사, 이조참판을 역임했습니다. 이어서 홍문관 부제학, 동지춘추관사, 규장각 직제학 등을 두루 거쳤습니다.
1865
[육조 판서직 두루 역임]
1865년 공조판서에 이어 예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냈고, 1866년에는 한성부판윤에 부임하는 등 핵심 부서의 판서직을 두루 거쳤습니다.
1865년 1월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가 규장각 직제학을 거쳐 8월 공조판서가 되었습니다. 9월에는 연생전의 서사관이 되었습니다. 그 뒤 예조판서·형조판서를 거쳐 1866년 한성부판윤으로 부임했습니다.
1867
[의정부 고위직 및 경복궁 중건 참여]
이조판서, 공조판서 등을 거쳐 의정부 우찬성에 올랐고, 1867년 예조판서를 역임했습니다. 1868년 경복궁 중건 때는 종정경으로 영건도감제조를 겸임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내직으로 돌아와 이조판서·공조판서·의정부 우찬성을 역임했습니다. 1867년 예조판서가 되었습니다. 1868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 할 때에는 종정경으로 영건도감제조(營建都監提調)를 겸임했습니다. 그 뒤 외직인 수원부 유수로 나갔다가 되돌아왔습니다.
1874
[흥선대원군 실각 속 관직 유지]
숙부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정치적 격변기에도 이재원은 별다른 정치색을 드러내지 않아 계속해서 관직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1874년 11월 숙부 흥선대원군이 실각했지만, 이재원은 별다른 정치색을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계속 관직에 있을 수 있었습니다.
1876
[지방 관찰사 및 유수직 역임]
흥선대원군 실각 이후 평안도 관찰사, 경기도 관찰사, 광주부 유수, 강화부 유수 등 여러 지방 요직을 역임하며 외직을 전전했습니다.
1876년 평안도 관찰사, 이어 경기도 관찰사 · 광주부 유수 · 강화부 유수 등 외직을 전전했습니다.
1879
[내직 복귀 및 신식 군사 훈련 담당]
1879년 공조판서로 다시 내직에 복귀했으며, 1881년 통리기무아문 개편에 따라 군무사당상경리사에 임명되어 신식 군사 훈련을 담당했습니다.
1879년 공조판서가 되고 1880년 예조 판서, 판돈녕부사를 거쳐 1881년 초 다시 강화부 유수로 나갔다가 그 해에 통리기무아문의 개편에 따라 군무사당상경리사(軍務司堂上經理事)에 임명, 교련국(敎鍊局)에 배치되어 신식 군사 훈련을 담당했습니다.
1884
[갑신정변 중 영의정 추대]
1884년 병조판서에 임명된 후, 그해 10월 갑신정변 당시 개화파에 의해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에 추대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변이 3일 만에 실패하자 관직을 사퇴했습니다.
1884년 초 이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습니다. 그해 10월 갑신정변 때 그는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과 내통하지는 않았지만 왕실에 호의적이었던 일부 개화파에 의하여 좌의정에 임명되고, 곧 영의정에 추대되었습니다. 그러나 3일 만에 정변이 실패하면서 관직을 사퇴했습니다.
1885
[독판내무부사 역임 및 유배]
갑신정변 이후에도 관직을 유지하여 1885년 독판내무부사를 지냈습니다. 1887년 예조판서 임명을 거부하여 충청도 평택현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났습니다.
갑신정변 때 영의정에 추대된 일은 처벌받지 않았고, 곧 영의정 심순택과 여흥 민씨 외척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파 정권에 의하여 이조판서에 임용되었습니다. 1885년 독판내무부사(督辦內務府事), 1887년 7월에는 예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불응하여 한때 충청도 평택현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나 판돈녕부사에 제수되었습니다.
1887
[흥선대원군 관련 사건에 연루]
1887년 흥선대원군의 사주를 받은 신기선이 고종을 이어시키려 한 사건에 연루되었으나, 혐의점이 없어 추국(조사)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1887년에는 흥선대원군의 사주를 받은 신기선(申箕善)이 고종을 이어시키려 하자 그에 연루되었으나 혐의점이 없어 추국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유배 후 관직 복귀 및 고위직 역임]
유배에서 풀려나 1887년 9월 판돈녕부사에 임명되었고, 이후 교태전 현판 서사관, 이조판서, 한성부 판윤, 판의금부사, 종정경 등 고위직을 다시 역임했습니다.
1887년 9월 석방되어 다시 판돈녕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쉽게 응하지 않았습니다. 1888년 4월 교태전(交泰殿)의 현판 서사관이 되었습니다. 그해 7월 이조판서를 거쳐 그해 한성부 판윤으로 나갔고, 1890년 11월 판의금부사를 거쳐 1891년 종정경, 판돈녕부사에 이르렀습니다.
1891
[완림군 이재원 사망]
병세가 위독하여 왕이 어의를 보내 간호하게 했으나, 차도가 없이 향년 61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저서로는 《입조록》이 있습니다.
1891년 2월 병세가 위독하여 왕이 어의(御醫)를 시켜 약물을 보내 간호하게 하였으나, 차도가 없이 그해 2월 19일에 사망했습니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 향년 61세였습니다. 저서로는 《입조록 (立朝錄)》이 있습니다.
['효정' 시호 추서 및 '완림군' 추봉]
사망 후 1891년 3월 '효정'이라는 시호가 추서되었습니다. 1898년 고조부 사도세자가 왕으로 추존되면서, 이듬해 9월 21일 군의 작위를 받아 '완림군'으로 추봉되었습니다.
1891년 3월 효정(孝貞)의 시호가 추서되었습니다. 1898년 고조부 사도세자가 왕으로 추존되면서 왕의 자손 4대를 승습하는 제도에 의하여, 1899년 9월 21일 군의 작위를 받고 완림군(完林君)으로 추봉되었습니다.
1899
1899년 상보국숭록대부에 추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