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섭 (시인)
시인, 대학교수, 번역가, 문학평론가, 정치인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23:57
김광섭은 일제강점기부터 활동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그의 시는 식민지 시대 지성인의 고뇌와 민족 의식을 담았으며, 해방 후에는 한국 문단의 큰 별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성북동 비둘기〉로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려 '이산문학상'이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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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
김광섭은 1905년 9월 22일 대한제국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났습니다.
1917
김광섭은 1917년 3월 함북경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월과 일은 정확히 명시되지 않았으나, 3월 졸업으로 추정됩니다.
1919
1919년 9월 21일, 김광섭은 경성중앙고보 3학년 재학 중 3년 연상인 이순학(당시 18세)과 결혼했습니다.
1921
1921년 2월, 김광섭은 경성중앙고등보통학교 4학년 2학기를 모두 수료했습니다. 정확한 일자는 명시되지 않았습니다.
1921년 3월, 김광섭은 경성중동고등보통학교 5학년으로 전입학했습니다. 정확한 일자는 명시되지 않았습니다.
1923
1923년 3월, 김광섭은 경성중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정확한 일자는 명시되지 않았습니다.
1927
[시 〈모기장〉 발표 및 창작 활동 시작]
《경성중동고보 동창회 회지》에 시 〈모기장〉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창작 활동과 문단 활동을 시작, 한국 시단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일본 유학을 떠나기 직전인 1927년, 김광섭은 《경성중동고보 동창회 회지》에 시 〈모기장〉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창작 활동과 문단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31
[와세다대학교 입학 및 중동고보 교사 재직, 문단 활동]
일본 도쿄 와세다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으며, 동시에 모교인 중동고보 영어 교사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도 힘썼습니다. 같은 해 《문예월간》 동인으로 활동하며 지적인 서정의 시편들을 발표해 주목을 받았습니다.
1931년, 김광섭은 일본 도쿄 와세다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또한 자신이 1923년에 졸업했었던 중동고보의 영어 교사로 재직하기도 했습니다. 이 무렵 《문예월간》 동인으로 시작품 《고독》, 《푸른 하늘의 전락》, 《고민의 풍토》 등을 발표했습니다.
1933
[극예술연구회 참가 및 문인 교류]
「극예술연구회」에 참가하여 서항석, 함대훈, 모윤숙, 노천명 등 당대 문인들과 교류하며 문학적 깊이를 더했습니다.
1933년, 김광섭은 「극예술연구회」에 참가하여 서항석, 함대훈, 모윤숙, 노천명 등과 교류했습니다.
김광섭은 1933년 8월, 일본 도쿄 와세다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정확한 일자는 명시되지 않았습니다.
1938
[첫 시문집 《동경》 출간]
첫 시문집인 《동경》을 출간하며 시인으로서의 입지를 다졌습니다. 이 작품은 식민지 시대 지성인의 고뇌를 담아 문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1938년, 김광섭은 첫 시문집인 《동경》을 냈습니다.
1941
[민족 사상 고취 혐의로 체포 및 투옥]
경성중동고보 학생들에게 민족 사상을 고취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6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수감되며, 일제에 대한 저항 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1941년 12월, 김광섭은 경성중동고보 학생들에게 민족 사상을 고취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재판에서 특별 보안법 위반죄 적용으로 징역 6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습니다.
1945
[8·15 광복과 함께 해감]
수감 3년 8개월 만에 일본의 패망과 함께 8·15 광복을 맞이하며 해방의 기쁨과 함께 해감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수감 3년 8개월(44개월) 차이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는 을유 해방(8·15 광복)이 도래하였고, 이로 인해 자국의 해방과 함께 해감되면서 풀려났습니다.
1948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이루어졌습니다.
1949
1949년 시집 《마음》을 출간했습니다.
1955
1955년 11월부터 이듬해 1956년 12월까지 약 1년 1개월 동안 경무대 대통령 비서실 공보국 국장 등을 지냈습니다.
1957
1957년 시집 《해바라기》를 출간했습니다.
1961
1961년 8월부터 1962년 8월까지 약 1년 동안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등을 잠시 역임했습니다.
1965
1965년 시집 《이삭을 주울 때》를 출간했습니다.
[뇌출혈로 쓰러짐]
야구 경기 관람 중 뇌출혈로 쓰러지는 큰 시련을 겪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더욱 깊어진 통찰력으로 창작 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1965년 4월 15일 목요일, 야구 경기 관람 도중 갑자기 뇌출혈로 인하여 쓰러졌습니다.
1969
[대표작 〈성북동 비둘기〉 발표]
그의 대표작이자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린 명작 〈성북동 비둘기〉가 수록된 시집 《성북동 비둘기》를 발표했습니다.
1969년 시집 《성북동 비둘기》를 출간했습니다. 이 시집에 대표작인 〈성북동 비둘기〉가 실렸으며, 이 시는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렸습니다.
1969년 9월 21일, 금혼식(결혼 50주년)의 간소 피로연 및 하루 앞당긴 65세 생일 잔치 등을 조촐히 치렀습니다.
1970
1970년 3월 1일, 김광섭은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습니다.
1970년 10월 6일, 김광섭의 부인 이순학 여사가 향년 69세로 사망하여 상배(喪配)했습니다.
1971
1971년 시집 《반응-사회시집》을 출간했습니다.
1974
1974년 《김광섭시전집》을 출간했습니다.
1975
1975년 시집 《겨울날》을 출간했습니다.
1975년 12월 1일 월요일, 만 48년간의 시문학 분야에서 공식적인 본격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1977
1977년 3월 1일, 김광섭은 대한민국 건국포장을 받았습니다.
[사망]
향년 73세로 타계하여 한국 문학계에 큰 슬픔을 안겼습니다. 그의 작품은 한국인의 가슴 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1977년 5월 23일, 김광섭은 향년 73세로 죽었습니다.
1989
[《이산문학상》 제정]
그의 12주기를 기려 《이산문학상》이 제정되어 그의 문학 정신과 업적을 후대에 기리는 중요한 상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김광섭의 사후 12주기인 1989년에 그의 정신과 문학을 기리기 위해 《이산문학상》이 만들어져 〈문학과지성사〉의 주관으로 시행되고 있습니다.
2008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선정]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중 문화, 종교, 언론 부문 인물로 선정되어 그의 공헌을 재조명했습니다.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의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을 선발할 때,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 중 문화, 종교, 언론 부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