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수 (조선)

조선시대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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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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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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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수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음서로 관직에 나아갔습니다. 임진왜란 시기에는 세자를 호종하며 국난 극복에 참여했고, 여러 고을의 군수를 지냈습니다. 관직 재직 중 사망했으며, 훗날 아들의 출세로 높은 관직에 추증된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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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2

[이대수 출생]

조선 중기의 문신 이대수가 태어났다.

1542년 11월 3일(음력 10월 16일), 조선 중기의 문신 이대수가 태어났다. 본관은 한산 이씨이다.

1580

[음서로 관직 진출]

39세의 나이에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여 전연사별좌로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다양한 직책을 거치며 경력을 쌓았다.

1580년(선조 13) 39세의 나이에 음서로 선발되어 전연사별좌(典涓司別坐)로 보임되었다. 이후 장원서별좌(掌苑署別坐), 사옹원직장(司甕院直長),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 감찰(監察), 사평(司評) 등을 역임하며 관직 생활을 이어갔다.

1592

[임진왜란 중 세자 호종]

임진왜란 발발하자 성천에서 세자(훗날 광해군)를 호종하며 행재소에 나아가 익위로 임명되어 국난 극복에 동참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대수는 성천(成川)에서 세자(훗날의 광해군)를 따라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익위(翊衛)로 임명되었다.

1596

[안성군수 체직]

안성군수로 재직 중 군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다는 비변사의 청으로 인해 체직되는 일을 겪었다.

1596년(선조 29) 안성군수(安城郡守)로 재직 중이었으나, 군무를 감당하지 못한다는 비변사의 청으로 체직되었다.

1597

[곡산군수 및 고부군수 역임]

안성군수 체직 이후 곡산군수, 고부군수 등 여러 고을의 군수로 임기를 채우며 지방 행정 경험을 쌓았다.

안성군수 체직 이후 곡산군수(谷山郡守)로 나가 임기를 채웠으며, 다시 고부군수(古阜郡守)로 4년 동안 재직한 뒤 면직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1613

[사후 좌찬성 추증]

사후 아들 이현영이 귀하게 되자, 높은 관직인 좌찬성으로 추증되어 가문의 영광을 더했다.

이대수가 사망한 이후, 그의 아들 이현영(李顯英)이 이조판서에 오르는 등 귀하게 되자, 아버지인 이대수는 사후 좌찬성(左贊成)으로 추증되었다.

[삭녕군수 재직 중 사망]

삭녕군수로 재직하던 중 1613년에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611년(광해군 3) 삭녕군수(朔寧郡守)로 나갔으며, 1613년(광해군 5) 3월 18일(음력 2월 18일) 재직 중 72세의 나이로 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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