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각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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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 군인, 관료,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 카테고리

이각은 임진왜란 초기 조선의 국방을 책임져야 했던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였으나, 적군 앞에서 군대를 버리고 도주한 비겁한 장수의 대명사로 기록된 인물입니다. 1570년 무과 급제 후 고위직에 올랐으나, 임진왜란 발발 직후 부산진과 동래성이 함락되는 위기 속에서 부하들과 백성을 저버리고 오직 자신의 안위와 첩을 챙기는 데 급급했습니다. 그의 도주는 조선 남부 방어선의 붕괴를 초래했으며, 결국 임금의 진노와 엄격한 군율에 따라 도순찰사 권율에게 체포되어 참형에 처해졌습니다. 충절을 지키다 전사한 송상현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그의 서사는 후세에 공직자의 무책임함이 부르는 비극적 말로를 경계하는 반면교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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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570

[무과 급제로 관직 입문]

국가 정기 시험인 식년시 무과에 을과 10위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하며 본격적인 무관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이때만 해도 전도유망한 군인으로서 국가의 안보를 책임질 재목으로 기대를 모았습니다.

조선 선조 3년인 1570년에 실시된 무과 시험에서 이각은 무예 실력을 인정받아 합격의 영광을 안았습니다.
당시 무과는 국가의 정예 장교를 선발하는 중요한 통로였으며, 을과 합격은 그가 뛰어난 신체 능력과 군사 지식을 갖추었음을 입증합니다.
이후 그는 여러 군직을 거치며 관직 생활을 이어갔고, 가문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승승장구했습니다.

1591

[경상좌병사 부임]

전쟁의 기운이 감돌던 시기, 경상좌도의 군권을 총괄하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라는 중책에 제수됩니다. 이는 영남 지역 방어의 핵심 보직으로, 그의 어깨에는 막중한 책임감이 실려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발발 약 1년 전인 1591년, 이각은 경상도의 동쪽 지역 방어를 담당하는 병사(兵使)로 발령받아 울산 병영에 주둔했습니다.
당시 일본의 침공 위협이 고조됨에 따라 조정은 그가 지역 방어 체계를 확고히 구축하기를 기대하며 임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임 이후 성곽 보수나 군사 훈련보다는 개인적인 치부에 더 관심을 가졌다는 비판을 훗날 받게 되었습니다.

1592

[전쟁 발발 인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 함대가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다는 보고를 접하며 전쟁의 시작을 맞이합니다. 지역 최고 지휘관으로서 그는 즉시 군사를 일으켜 대응해야 할 긴박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레고리력 1592년 5월 23일, 부산 앞바다에 수백 척의 일본 군선이 나타나며 7년 전쟁의 서막이 올랐습니다.
이각은 울산 병영에서 이 소식을 보고받았으나 신속한 대응 대신 적의 규모를 파악하며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 시기의 지체는 훗날 부산진성이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함락되는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부산진성 참극 방관]

부산진성이 일본군의 맹공을 받아 함락되고 정발 장군이 전사하는 과정을 인근에서 지켜보며 지원을 거부합니다. 충분히 원병을 보낼 수 있는 위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적의 기세에 압도되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첨사 정발이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동안, 상급 부대 지휘관인 이각은 자신의 군대를 온존시킨다는 핑계로 구원을 거부했습니다.
부산진성이 무참히 도륙당하는 소식을 듣고도 그는 성 안으로 진격하기보다는 뒤로 물러날 궁리를 먼저 했습니다.
이 사건은 이각이 지닌 장수로서의 자질과 용기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보여준 첫 번째 실책이었습니다.

[동래성으로의 입성]

부산진성이 무너진 후 동래부사 송상현이 지키는 동래성으로 들어와 방어 대책을 논의합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결사항전보다는 어떻게 하면 이 위기에서 벗어날 것인가에 대한 생각뿐이었습니다.

동래성은 부산의 배후이자 한양으로 향하는 길목이었기에 이각과 송상현의 협력은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송상현은 이각에게 병력을 합쳐 함께 싸울 것을 간청하며 성의 방어력을 높이려 애썼습니다.
이각은 겉으로는 협력하는 척했으나 성벽 아래 집결한 일본군의 규모를 보고는 극도의 공포감에 휩싸였습니다.

[외응 핑계의 성 탈출]

일본군이 성을 완전히 포위하기 직전, 성 밖에서 외부의 지원군과 호응하겠다는 구실을 대며 도망칩니다. 끝까지 함께하자는 송상현의 제안을 뿌리치고 그는 북문을 통해 비겁한 퇴각을 감행했습니다.

그는 '나는 성 밖에서 적의 배후를 치겠다'는 이른바 외응(外應)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자신의 도주를 정당화했습니다.
실제로는 적의 공격이 시작되기도 전에 가장 먼저 안전한 곳으로 몸을 숨기려 한 것이었으며, 지휘관의 이탈은 성 안의 사기를 바닥으로 떨어뜨렸습니다.
송상현은 그의 비겁함을 예견했음에도 홀로 남아 끝까지 성을 지키기로 결심하며 이각과 대조적인 길을 선택했습니다.

[소산역에서의 관망]

동래성을 빠져나와 북쪽의 소산역에 진을 치고 멀리서 성의 함락 과정을 지켜봅니다. 지원은커녕 적의 그림자만 보고도 더 멀리 달아날 준비를 하며 병사들을 단속하지 않았습니다.

이각은 소산역에서 동래성의 포연을 바라보며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가 거느린 병력은 경상좌도의 정예병들이었으나 지휘관의 도주로 인해 오합지졸이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적의 기마병이 근처에 나타났다는 소문만으로도 진영이 무너질 정도로 그의 지휘력은 마비된 상태였습니다.

[송상현의 전사 소식]

자신을 믿고 성을 지켰던 송상현이 치열한 전투 끝에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도주를 멈추지 않습니다. 동료의 죽음에 대한 애도나 복수심보다는 오직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는 것에만 집중했습니다.

동래성 전투는 조선군의 전멸로 끝났으며 송상현 부사는 죽음으로써 선비의 절개를 지켰습니다.
이 소식은 조선 전역에 전해져 큰 감동을 주었으나, 도망친 이각에게는 오히려 자신의 죄를 가중시키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이각은 송상현의 순국 소식을 전해 듣고도 부하들을 재촉하여 더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었습니다.

[울산 병영의 유기]

자신의 본거지였던 울산 병영으로 돌아오나, 이곳조차 지킬 의지 없이 물자와 식량을 버려두고 다시 달아납니다. 지역 방어의 거점이 지휘관에 의해 스스로 파괴되거나 방치되는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병영은 수많은 무기와 식량이 비축된 전략 요충지였으나 이각은 이를 적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병영에 도착하자마자 필요한 귀중품만 챙겨 다시 경주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이로 인해 경상좌도의 군수 물자는 고스란히 일본군의 전리품이 되어 그들의 북상을 돕는 꼴이 되었습니다.

[경주 지역으로의 패퇴]

경주에 도착하여 잠시 머물렀으나 이곳의 수비군조차 자신의 도주 행렬에 가담시키며 방어선을 무너뜨립니다. 그의 존재는 가는 곳마다 패배주의를 전염시키는 독소와 같았습니다.

경주는 영남의 핵심 도시였으나 병사인 이각이 도망쳐 오자 도시 전체가 혼란에 빠졌습니다.
현지 수령들과 백성들은 이각이 버티고 싸워주길 바랐으나 그는 도리어 백성들에게 피난을 종용하며 위기를 부추겼습니다.
이후 경주 역시 큰 저항 없이 일본군에게 유린당하게 되었고, 이각은 계속해서 북쪽으로 발길을 재촉했습니다.

[첩을 데려오는 만행]

나라가 위기에 처하고 백성들이 죽어가는 와중에도 자신의 첩을 구하기 위해 군사를 따로 보내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그의 비겁함과 무책임함이 절정에 달한 사건으로 사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성룡의 '징비록'에 따르면 이각은 도주하는 와중에도 경주에 두고 온 애첩이 생각나 군사들을 보내 그녀를 데려오게 했습니다.
군사들이 적과 싸우기 위해 피를 흘리는 동안 지휘관은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는 데 군사력을 낭비한 것입니다.
이 파렴치한 행위는 훗날 그가 체포되었을 때 가중 처벌을 받게 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조정의 패전보 접수]

한양 조정에 경상좌도의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졌다는 소식이 보고되며 이각의 책임론이 부각되기 시작합니다. 선조와 조정 대신들은 이각의 행방에 의문을 품으며 진상을 조사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초기 보고에는 이각이 전사했을 가능성도 언급되었으나, 이내 그가 살아서 도망쳤다는 첩보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조정은 전방 지휘관이 성을 버리고 도주했다는 사실에 경악하며 극도의 분노를 표출했습니다.
이는 전시 상황에서 군기를 확립하기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대 사안으로 다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헌부의 탄핵]

사정 기관인 사헌부가 이각의 죄상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즉각적인 파직과 엄벌을 요구합니다. 그의 도주 행위가 군율을 문란하게 하고 국가의 기강을 흔들었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사헌부 대간들은 이각이 적을 보자마자 겁을 집어먹고 도망친 것은 만 번 죽어도 마땅한 죄라고 성토했습니다.
특히 송상현의 충절과 대비되는 그의 비겁함을 강조하며 전군에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로써 이각은 도망자 신분에서 국가의 대역죄인으로 공식 규정되었습니다.

[선조의 처형 교지]

임금인 선조가 이각을 체포하는 즉시 현장에서 처형하라는 엄명을 내립니다. 이는 무너진 군기를 바로잡고 다른 장수들에게 경고를 주기 위한 결단이었습니다.

선조는 이각의 행태가 조선군의 사기를 꺾는 치명적인 배신 행위라고 보았습니다.
교지에는 '이각의 머리를 베어 경상도 곳곳에 효수하여 장수들의 경계로 삼으라'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전쟁 중 임금이 현지 지휘관에 대해 즉각 처형 명령을 내린 것은 매우 이례적이고 강력한 조치였습니다.

[권율의 추격 임무]

도순찰사로 임명된 권율이 이각을 추적하여 처단하라는 구체적인 임무를 부여받습니다. 권율은 엄격한 성품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이각의 비겁함을 단죄할 적임자로 선택되었습니다.

권율은 임금의 명을 받들고 영남 북부 지역으로 군사를 급파하여 이각의 은신처를 수소문했습니다.
당시 이각은 이미 병력을 대부분 잃고 소수의 수행원과 함께 민가에 숨어 지내고 있었습니다.
권율은 이각을 잡는 것이 외적을 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군기 확립의 핵심이라고 보고 추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선산 지역으로의 이동]

추적을 피해 대구 북쪽 선산 지역까지 도망쳐 숨어 지냅니다. 한때 위풍당당했던 병마절도사는 이제 초라한 도망자 신세가 되어 하루하루를 두려움 속에 보냈습니다.

이각은 인근 백성들의 신고를 두려워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동하며 숨어 다녔습니다.
하지만 그가 지나온 길마다 도주 중에 저지른 추태들이 소문으로 퍼져 있어 그의 위치는 금세 탄로 났습니다.
도주 행렬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보물 상자를 챙기는 등 탐욕스러운 모습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민가에서의 은신]

선산의 한 민가에 숨어 지내며 마지막까지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려 시도합니다. 그러나 이미 민심은 그를 떠났고, 현지 관원들에 의해 그의 정확한 소재가 파악되었습니다.

백성들은 나라를 버리고 도망친 장수를 보호해주기는커녕 증오의 시선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각은 민가 벽장 뒤에 숨거나 변복을 하는 등 필사적으로 정체를 숨기려 애썼습니다.
권율의 추격군이 마을을 포위하면서 그의 도망자 생활도 종지부를 찍게 되었습니다.

[이각의 비참한 체포]

권율이 보낸 집행관들에게 붙잡혀 오랏줄에 묶이는 수모를 당합니다. 체포되는 순간에도 그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거나 변명으로 일관하며 구걸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성을 버린 것이 아니라 후일을 도모하려 했던 것'이라는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집행관들은 임금의 교지를 엄중히 낭독하며 그를 단호하게 압송했습니다.
체포 소식은 인근 군영에 빠르게 퍼졌고, 많은 병사가 그의 몰락을 보며 군율의 엄중함을 실감했습니다.

[참형 집행과 최후]

선산 군영 마당에서 군례를 갖춘 후 목이 베이는 참형에 처해집니다. 그의 죽음은 전시 상황에서 임무를 저버린 지휘관이 맞이하게 될 가장 비참한 결말을 상징했습니다.

권율의 감독하에 집행된 참형 현장에는 많은 장수와 병졸들이 집결하여 그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이각의 머리는 소금에 절여져 전방 부대로 보내졌으며, 이는 적을 보고 도망치는 자에 대한 경고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전쟁 발발 한 달여 만에 이각의 파란만장하고도 비겁했던 생애는 막을 내렸습니다.

[재산 몰수 조치]

처형 이후 그의 모든 재산은 국고로 몰수되었으며 가족들은 연좌제에 의해 고난을 겪게 됩니다. 지휘관 한 명의 비겁함이 본인뿐만 아니라 가문 전체를 몰락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조정은 이각이 평소 축적했던 부정한 재산들을 모두 찾아내어 군비로 활용하도록 조치했습니다.
그의 후손들은 조상의 수치스러운 이름 때문에 관직에 나가는 길이 막히는 등 사회적 매장을 당했습니다.
역사서에는 그의 이름이 영원히 기록되어 후대의 무관들에게 경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1604

[역사적 반면교사 확정]

임진왜란 공신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이각의 사례가 다시금 언급되며 군율 확립의 중요성이 강조됩니다. 그는 조선 역사상 가장 실패한 장수의 전형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선무공신 선정 당시, 대신들은 이각과 같은 자가 있었기에 초기에 나라가 위태로웠음을 상기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징비록' 등을 통해 후세에 전해지며 공직자의 책임감에 대한 교훈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이각이라는 이름은 위기 상황에서 리더가 보여서는 안 될 모든 부정적인 모습의 집합체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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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각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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