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호 (작가)

작가, 작사가, 화가, 예술가, 언론인, 교수,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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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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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대중문화사에 한 획을 그은 다재다능한 예술가.

• 동양화, 서예, 시, 극작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 '신라의 달밤', '이별의 부산정거장', '님은 먼 곳에' 등 수많은 히트곡을 작사.

• 영화배우, 시나리오 각본가, 영화 기획가로도 활동하며 영화계에 기여.

•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을 역임하며 방송 작가들의 권익 신장에 앞장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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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

[유호,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극작가이자 작사가인 유호(본명 유해준)가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1921년 11월 15일, 유해준이라는 본명으로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그는 훗날 대한민국 대중문화계의 거장 '유호'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1942

[동양화가로 화단에 첫 등단]

동양화가로 화단에 첫 발을 내디뎠다.

유호는 1942년 동양화가로 처음 화단에 등단하며 예술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43

[극작가로 문단 등단]

극작가로서 문단에 등단하며 글쓰기 재능을 선보였다.

1943년, 유호는 극작가로서 문단에 등단하며 예술 활동의 영역을 확장했다. 그의 작품은 휴머니즘과 페이소스가 공존하는 특징을 보였다.

1944

[서예가로 등단]

서예가로 등단하여 다재다능한 예술적 면모를 과시했다.

1944년 서예가로 등단하며, 유호는 동양화와 극작에 이어 서예 분야에서도 재능을 인정받았다.

1945

[방송 및 언론계 진출]

경성중앙방송 국장과 경향신문 편집부 차장을 역임하며 언론계에도 발을 들였다.

1945년, 유호는 경성중앙방송의 예하 국장을 지내고 경향신문 편집부 차장으로 활동하며 언론 분야에서도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1946

[시인으로 등단]

시인으로 등단하며 문학적 역량을 넓혔다.

1946년, 유호는 시인으로 등단하며 그의 다채로운 예술 활동 영역에 문학을 추가했다.

1947

[《신라의 달밤》 작사, 작사가 데뷔]

가수 현인의 노래 《신라의 달밤》을 작사하며 대중음악 작사가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이 곡은 지금까지도 큰 사랑을 받는 명곡으로 손꼽힌다.

1947년, 유호는 현인의 히트곡 《신라의 달밤》을 작사하며 대중음악 작사가로 성공적인 데뷔를 알렸다. 이 곡은 한국 대중음악사에 길이 남을 명곡으로 평가받는다.

1949

[경향신문 문화부 차장 및 히트곡 작사]

경향신문 문화부 차장을 역임했으며, 가수 현인의 <비내리는 고모령>, <여인애가> 등 다수의 히트곡을 작사했다.

1949년, 유호는 경향신문 문화부 차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럭키 제작사의 <비내리는 고모령>, <여인애가> 등 인기 가요의 가사를 썼다.

1950

[영화배우 및 시나리오 각본가 데뷔]

영화 《여인애사》에서 조연으로 출연하며 영화배우로 데뷔하고, 동시에 시나리오 각본가로도 활동을 시작했다.

1950년, 유호는 영화 《여인애사》에 조연으로 출연하며 영화배우로서 스크린에 등장했고, 이와 함께 영화 시나리오 각본가로서도 활동을 시작하며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1954

[경향신문 문화부 부장 및 명곡 작사]

경향신문 문화부 부장으로 승진하고, <이별의 부산정거장>을 포함해 여러 명곡을 작사했다.

1954년, 유호는 경향신문 문화부 부장이 되었고, 유니버살레코드사에서 제작한 현인의 <이별의 부산정거장>, <이별의 언덕>, <가을인가 가을>, <무정부루-스>, <명동에레-지> 등 다수의 대중가요 가사를 썼다.

1957

[영화 기획가 및 각색가 데뷔]

영화 《황혼열차》를 통해 영화 기획가 겸 영화 각색가로 데뷔하며 영화 제작 분야로까지 영역을 넓혔다.

1957년, 유호는 영화 《황혼열차》로 영화 기획가와 영화 각색가로 데뷔하며 영화 제작의 전반적인 과정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961

[경향신문 편집국 국장 취임]

경향신문 편집국 국장으로 승진하며 언론계 고위직에 올랐다.

1961년, 유호는 경향신문 편집국 국장 직위에 오르며 언론인으로서의 경력을 최고조로 이끌었다.

1962

[일요신문 편집국 국장 역임]

일요신문 편집국 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같은 해 퇴임했다.

1962년, 유호는 일요신문 편집국 국장으로 재직했으나 같은 해 직위에서 퇴임했다.

1963

[서라벌예술초급대학 전임교수 임용]

서라벌예술초급대학 전임교수로 임용되어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1963년, 유호는 서라벌예술초급대학 전임교수가 되어 1964년까지 재직하며 교육 활동에도 참여했다.

1964

[한국독립당 문화예술행정특보위원 임명]

한국독립당 문화예술행정특보위원으로 위촉되어 정치 행정 분야에도 관여했다.

1964년 11월, 유호는 한국독립당 문화예술행정특보위원으로 위촉되어 문화 예술 정책 분야에 대한 자문 역할을 수행했다. 1965년 6월에 퇴임했다.

1968

[중앙대 교수 및 TBC 전속작가 활동]

중앙대학교 전임교수와 TBC 동양방송 전속작가로 활동하며 교육과 방송 분야에서 입지를 다졌다.

1968년, 유호는 중앙대학교 전임교수로 임용되어 1969년까지 재직했고, 동시에 TBC 동양방송의 전속작가로 활동하며 다양한 방송 콘텐츠 제작에 참여했다.

1974

[서울예술전문학교 전임교수 임용]

서울예술전문학교 전임교수로 임용되어 예술 교육에 기여했다.

1974년, 유호는 서울예술전문학교 전임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1980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 취임]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에 선출되어 한국 방송작가들의 권익 보호와 위상 강화에 크게 기여했다.

1980년, 유호는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1986년까지 재직하며 방송작가들의 권익 신장과 한국 방송 문화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1982

[동국대학교 객원교수 임용]

동국대학교 객원교수로 초빙되어 예술 교육에 힘썼다.

1982년, 유호는 동국대학교 객원교수로 임용되어 1983년까지 학생들을 가르쳤다.

1992

[한국방송작가교육원 원장 및 협회 고문]

한국방송작가교육원 원장과 한국방송작가협회 고문으로 위촉되어 후학 양성과 협회 발전에 기여했다.

1992년, 유호는 한국방송작가교육원 원장으로 취임하여 1998년까지 재직했고, 동시에 한국방송작가협회 고문으로 위촉되어 협회 운영에 대한 자문 역할을 수행했다.

2019

[유호, 향년 97세로 별세]

향년 97세로 서울가톨릭대학교 성모병원에서 별세했다.

2019년 5월 6일, 한국 대중문화계에 큰 족적을 남긴 유호는 97세의 나이로 서울 은평구 서울가톨릭대학교 성모병원에서 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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