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경시제

현한 황제,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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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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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한 황제,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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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경제의 6대손이자 후한 광무제의 족형인 유현. 신나라 멸망 후 녹림군에 의해 추대된 현한의 황제이다.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실정으로 적미군에 의해 폐위되고 살해당했으나, 후에 광무제에 의해 회양왕으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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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녹림군 합류]

유현이 녹림군의 농민반란에 합류하여 평림병의 안집연을 맡으며 활약을 시작했습니다.

22년, 녹림군의 농민반란이 발발하자, 유현은 진목과 요담이 이끄는 평림병에 합류하여 안집연을 맡았습니다. 이는 그가 후에 황제로 추대되는 기반을 다지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23

[경시장군 추대]

녹림군의 네 분파가 연합하여 신나라의 관리를 살해한 후, 유현을 경시장군으로 추대했습니다.

23년 정월, 녹림군의 주요 네 분파인 용릉병, 하강병, 신시병, 평림병이 모두 합세하여 신나라의 전수대부 진부와 전수속정 양구사를 살해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유현은 녹림군의 지지를 받아 경시장군으로 추대되며 지도자로서의 입지를 강화했습니다.

[현한 황제 즉위]

녹림군 지도자들의 지지를 받아 유현이 현한의 황제로 즉위하고, 연호를 경시로 선포하며 한나라 재건을 공식화했습니다.

23년 2월, 녹림군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장군들 간의 지휘 통일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전한 종실 중에서 황제를 추대하기로 결정되었고, 유현은 신시병과 평림병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경쟁자였던 유인이 내분을 우려해 물러나자, 유현은 황제로 즉위하며 한나라를 재건하고 연호를 '경시'로 개원했습니다.

[완성 수도 이전]

유인의 활약으로 완성을 함락한 후, 유현이 남양군 완성에 입성하여 이곳을 현한의 수도로 삼았습니다.

23년 5월, 대사도 유인이 완성(宛城)을 함락시키는 큰 전공을 세웠습니다. 이에 6월, 경시제 유현은 남양군 완성에 입성하여 이곳을 현한의 새로운 수도로 선포하고, 종실과 장군들을 열후로 봉하며 정권을 안정화하려 노력했습니다.

[유인 숙청]

경시제는 높은 위상을 얻은 유인에게 질투심을 느껴 그를 주살하고, 유사로 대사도를 교체했습니다.

수도 완성을 함락시키는 등 큰 공을 세운 유인의 위명이 높아지자, 경시제는 그를 질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유인을 주살하고 광록훈 유사를 대신 대사도로 삼아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자 했습니다. 이 사건은 현한 내부 갈등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왕망 살해 및 신나라 멸망]

장안에서 발생한 난리 속에서 신나라의 황제 왕망이 살해당하고, 그의 머리가 완성으로 보내져 효수됨으로써 신나라가 멸망했습니다.

23년 9월, 녹림군의 공세 속에 장안에서 대규모 난리가 발생하여 신나라의 황제 왕망이 살해당했습니다. 왕망을 죽인 공빈취는 그의 머리와 황제의 인수를 현한의 수도인 완성으로 보냈고, 경시제는 왕망의 머리를 완성 저자에 효수하여 신나라의 종말을 공식적으로 선포했습니다. 이로써 15년간 지속된 신나라의 역사는 막을 내렸습니다.

[낙양 함락 및 천도]

현한이 낙양을 함락하고, 신나라 잔당과 자칭 황제를 토벌한 후, 수도를 낙양으로 옮겨 정국 안정화를 시도했습니다.

23년 10월, 낙양이 함락되면서 신나라의 주요 인물인 왕광과 애장이 사로잡혀 참수되었습니다. 같은 달, 분위대장군 유신은 여남군에서 황제를 자칭한 유망과 그의 대사마, 승상 등을 모두 제거하며 반란 세력을 진압했습니다. 이어진 정국 안정화를 위해 경시제는 수도를 완성에서 낙양으로 천도했습니다.

24

[공신들의 왕 봉작과 내부 갈등]

경시제는 종실과 공신들을 왕으로 봉하며 권력 분배를 시도했으나, 유씨가 아닌 자의 왕 봉작을 둘러싸고 주유 등의 반대가 있어 내부 갈등의 불씨를 키웠습니다.

24년, 승상 이송과 조맹이 공신들을 왕으로 봉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그러나 좌대사마 주유는 전한 고조의 유훈을 들어 유씨가 아니면 왕이 될 수 없다고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경시제는 일단 종실들을 먼저 왕으로 봉한 뒤, 왕광, 왕봉, 주유(교동왕 직위 사양), 장앙 등 이성 공신들을 제후왕으로 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주유는 끝까지 왕 작위를 사양하며 내부의 불만을 드러냈고, 이는 현한 정권의 불안정한 토대를 보여주었습니다.

[경시제의 실정]

경시제는 유약한 성격으로 정사를 장인 조맹에게 위탁하고 사치와 방임으로 일관하며 민심을 잃었습니다. 이로 인해 곳곳에서 원망과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황제 즉위 후 경시제는 유약한 성격 탓에 정사를 돌보지 않고 궁정 생활에 탐닉했습니다. 그는 모든 권한을 장인 조맹에게 위임했으며, 조맹의 방종을 간하는 신하를 직접 베어 죽이는 등 폭정을 일삼았습니다. 이로 인해 이일, 주유, 왕광, 장앙 등 주요 장수들이 각지에서 전횡을 부렸고, 궁중에서는 비정상적인 관작 남발로 '부뚜막에서 불 때면 중랑장'이라는 풍자가 돌았습니다. 이러한 실정으로 관중의 민심은 경시제에게서 완전히 떠나 사방에서 원망과 반란이 들끓게 되었습니다.

[장안으로 천도]

낙양 천도 4개월 만에 경시제는 장안으로 다시 수도를 옮겼습니다.

24년 2월, 경시제는 낙양에서 다시 장안으로 천도했습니다. 왕망이 패망할 당시 미앙궁만 불타고 다른 궁궐들은 온전히 남아있었기에, 기존의 궁실 시설을 그대로 사용하여 정착했습니다. 이는 빈번한 수도 이전으로 혼란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적미군 침공 시작]

현한의 실정으로 민심이 이반된 틈을 타 적미군이 관문을 넘어 침공을 시작하며 경시제 정권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했습니다.

24년 12월, 현한 정권의 혼란과 실정을 틈타 농민 반란군인 적미군이 드디어 관문을 넘어 관중 지역으로 침공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경시제 정권의 몰락을 가속화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25

[유영 옹립 세력 진압]

방망과 궁림이 전한 황태자 유영을 황제로 옹립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경시제는 이를 진압하고 유영을 포함한 관련자들을 모두 처형했습니다.

25년 정월, 방망과 궁림이 전한의 황태자였던 정안공 유영을 황제로 추대하며 임경에서 수천 명의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경시제는 승상 이송 등을 파견하여 이들을 격파하게 했고, 정안공 유영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처형하며 내부의 반란 시도를 강력히 진압했습니다.

[적미군에 패배 및 내홍 심화]

이송과 주유가 적미군에 대패하고, 왕광과 장앙 등 장수들도 등우에게 패하며 장안으로 돌아와 정권의 군사적 위기가 심화되었습니다.

25년 3월, 현한의 주요 장수 이송과 주유가 홍농군 모향에서 적미군과 교전했으나 크게 패배했습니다. 또한 하동을 지키던 왕광과 장앙도 등우에게 패하여 장안으로 돌아오면서, 경시제 정권은 군사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내부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습니다.

[장수들의 배신과 장안 탈출]

적미군과의 전투 패배 후, 장앙 등의 장수들이 경시제를 배신하고 장안을 약탈하며 공격해왔습니다. 경시제는 대패하여 처자와 함께 신풍으로 달아났고, 이는 정권의 붕괴를 가속화했습니다.

25년 3월의 적미군 패배 이후, 장앙, 신도건, 요담 등 일부 장수들은 장안에서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들은 경시제를 협박하여 장안을 약탈하려 했으나, 경시제가 이를 눈치채고 신도건만을 처형했습니다. 이에 장앙, 요담, 호은은 군사를 일으켜 장안을 공격했고, 경시제는 대패하여 다음 날 아침 처자와 백여 명의 측근들과 함께 장인 조맹이 있는 신풍으로 도피했습니다. 이 사건은 현한 정권의 내부 붕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내부 숙청과 장안 완전 상실]

신풍으로 달아난 경시제는 왕광 등을 의심하여 진목과 성단을 처형했고, 이로 인해 왕광이 장앙에게 합류하는 등 내전이 심화되었습니다. 결국 장안은 완전히 적미군 측에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신풍으로 도피한 경시제는 왕광, 진목, 성단 등이 장앙과 공모했다고 의심하여 진목과 성단을 숙청했습니다. 이에 왕광은 두려워 장안으로 도망쳐 장앙에게 합류했고, 경시제의 편에 선 이송과 조맹이 장안을 탈환하려 했으나 한 달여의 전투 끝에 패배했습니다. 결국 경시제는 장안을 완전히 상실하고 장신궁으로 거처를 옮기며 더욱 궁지에 몰렸습니다.

[적미군의 장안 함락과 경시제의 도주]

적미군이 장안에 육박하자 왕광 등 배신한 장수들이 합세하여 성을 공격했습니다. 결국 이송의 동생 이범의 배신으로 성문이 열리고 적미군이 입성하자 경시제는 홀로 달아났습니다.

25년 9월, 적미군이 고릉까지 진격해오자, 왕광과 장앙 등 경시제를 배신했던 장수들이 적미군에게 항복하여 함께 장안성을 공격했습니다. 이송이 출전했으나 대패하여 생포되었고, 그의 동생 이범이 형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성문을 열어주었습니다. 적미군이 장안에 입성하자, 경시제는 모든 것을 버리고 홀로 달아나며 현한 정권의 사실상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적미군에 항복]

장안 함락 후 도주했던 경시제는 유공의 설득으로 적미군에 항복하고, 유분자에게 옥새를 바치며 제위에서 물러났습니다.

25년 10월, 장안 함락 후 도주했던 경시제는 시중 유공의 설득과 적미군의 장사왕 봉작 약속에 따라 항복을 결정했습니다. 사록을 따라 장락궁에 이르러 적미군의 황제 유분자에게 옥새와 인수를 바치며 제위에서 물러났습니다. 처음에는 죽음의 위기에 처했으나, 유공과 사록의 간청으로 번숭의 개입하에 목숨을 건지고 외위후에 추증되었다가 장사왕에 봉해졌습니다.

[경시제 피살]

적미군의 약탈로 민심이 경시제에게 향하자, 장앙의 부추김을 받은 사록에 의해 경시제가 교살당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적미군이 삼보 지역을 약탈하며 민심을 잃고, 오히려 백성들의 마음이 폐위된 경시제에게 다시 향하는 기미를 보이자 적미군은 경시제를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했습니다. 결국 25년 10월, 장앙의 부추김을 받은 사록에 의해 경시제는 교살당하며 짧고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시신은 충신 유공에 의해 몰래 수습되었습니다.

[회양왕 추증 및 장례]

후한 광무제가 경시제를 회양왕으로 추증하고, 산시 장안현 동쪽 패릉에 정중히 장사지냈습니다.

경시제 피살 이후, 후한 광무제는 전 중국을 통일한 후 경시제를 회양왕으로 추증했습니다. 이는 경시제가 한나라의 종실로서 신나라 멸망에 기여하고 잠시나마 황제위를 이었음을 인정하는 조치였습니다. 그의 시신은 지금의 산시 장안현 동쪽에 위치한 패릉에 정중히 장사지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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