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 (치천왕)

전한 황족, 제후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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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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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황족, 제후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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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천왕 유현은 중국 전한의 황족이자 제후왕이다. 전한 고조의 손자이며 제도혜왕 유비의 아들로, 문제 시기 무성후로 봉해진 후 치천왕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오초칠국의 난에 가담했으나, 난이 진압된 후 자결하여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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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후 봉작]

전한 문제의 치세에 형제들과 함께 열후로 봉해져 무성후가 되었다. 이는 제북왕 유흥거의 반란과 자살 이듬해에 이루어진 조치였다.

전한 문제 재위 4년(기원전 176년), 제북왕 유흥거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자살한 이듬해에, 문제 황제는 유현을 비롯한 형제들을 열후로 봉하였다. 이때 유현은 무성후(武成侯 또는 武城侯)의 작위를 받았다.

[치천왕 책봉]

제문왕 유칙의 사망으로 폐지된 제나라가 재분할될 때, 유현은 새로 세워진 치천국의 왕으로 책봉되어 극에 서울을 두었다.

전한 문제 재위 16년(기원전 164년), 전년에 제문왕 유칙이 후사 없이 사망하여 폐지되었던 제나라가 일곱 개의 나라로 재분할되었다. 이때 제도혜왕 유비의 아들들과 성양공왕이 봉해졌는데, 유현은 이 중 새로 세워진 치천나라의 왕으로 책봉되었다. 치천국의 서울은 극에 두어졌다.

[오초칠국의 난 가담 및 제효왕 포위]

경제 시기 제후왕의 영지 축소 정책에 반발한 오왕 유비의 오초칠국의 난에 동참하여, 교서왕, 제남왕과 함께 가담 의사를 철회한 제효왕을 제나라 서울 임치에서 포위했다.

전한 경제의 치세에 조조를 중심으로 한 조정이 제후왕의 영지를 줄이는 정책을 추진하자, 이에 반발한 오왕 유비가 교서왕 유앙을 설득하여 반란에 동참시켰다. 유앙은 제나라의 일곱 봉국 중 성양나라를 제외한 여섯 나라에 사람을 보내 거사에 참여하도록 권유했다. 이에 치천왕 유현도 가담하였으며, 가담 의사를 철회한 제효왕을 교서왕 유앙, 제남왕과 함께 제나라의 서울인 임치에서 포위하였다.

[오초칠국의 난 진압 및 자결]

조정 진압군에 의해 오와 초가 패망하고 제나라 구원군이 오자, 각국 왕들은 본국으로 돌아갔다. 결국, 교서왕이 자결하자 치천왕 유현 또한 자결로 생을 마감했으며, 치천나라는 그의 형에게 넘어갔다.

오초칠국의 난은 조정의 진압군에 의해 초나라와 오나라가 패망하면서 막을 내렸다. 난포와 조양이 이끄는 구원군이 제나라를 구원하러 오자, 반란에 가담했던 제후왕들은 각기 흩어져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교서왕 유앙이 조정의 명령에 따라 자결하자, 치천왕 유현 역시 자결하였다. 유현의 죽음 이후 치천나라는 그의 형인 제북왕 유지에게 넘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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