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민 (십국)
황제, 군주, 창업군주, 중국 인물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21:09
북한의 초대 황제이자 후한 고조 유지원의 동생인 유민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젊은 시절 음주와 도박을 즐기다 황제에 즉위했으나, 후한 멸망 후 북한을 건국하여 고군분투했습니다. 국력이 약해 요나라에 굴욕적인 외교를 펼치고 후주와의 전투에서 대패하여 농민으로 위장해 도망치는 등 흥미로운 일화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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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5
오대 십국 시대 북한의 초대 황제이자 후한 고조 유지원의 동생인 유민이 태어났다. 본명은 유숭으로, 젊은 시절 음주와 도박을 즐기고 얼굴에 문신을 새겼다는 기록이 사서에 남아있다.
950
후한의 건우 3년, 추밀사 곽위의 반란이 일어나 후한의 수도 대량(현재 하남성 카이펑 시)이 점령되었다. 이로 인해 은제 유승우는 도망치다 반란군에 붙잡혀 살해당했고, 곽위가 후한 조정을 장악하게 되었다. 유숭은 곽위가 자신의 아들 유윤을 황제에 옹립할 계획을 알고 군대를 움직이지 않았다.
951
[유민의 북한 건국]
곽위가 스스로 황제에 올라 후주를 건국하고 유숭의 아들 유윤을 살해하자, 유숭은 이에 분노하여 타이위안에서 스스로 황제로 즉위, 북한을 건국하고 이름을 유민으로 개명했다.
951년 곽위는 마침내 스스로 황제로 즉위하여 후주를 건국했다. 이 과정에서 곽위는 유숭의 아들 유윤을 살해했고, 이에 크게 분노한 유숭은 타이위안에서 스스로 황제에 올라 북한을 건국하고 이름을 유민으로 바꾸었다. 북한은 국토가 작고 백성들의 경제력이 궁핍했으나, 유민은 후한의 부흥을 목표로 삼았다.
[요나라와의 굴욕 외교 및 책봉]
유민은 국력이 약한 북한을 위해 요나라에 지원을 요청, 요나라 황제를 '삼촌 황제'로, 자신을 '조카 황제'로 칭하는 굴욕적인 외교를 펼쳤고, 요나라는 유민을 대한 황제로 책봉했다.
북한은 국토가 작고 경제력이 궁핍했기에, 유민은 후한 부흥을 위해 요나라의 지원이 절실했다. 그는 요나라에 굴욕적인 자세를 취하며 요나라 황제를 '삼촌 황제', 자신을 '조카 황제'로 부르는 외교 관계를 맺었고, 이에 요나라는 유민을 '대한 황제'로 책봉하며 북한을 지원했다. 요나라의 지원을 바탕으로 북한은 후주에 대한 군사 행동을 자주 일으켰다.
954
[후주 공격 대패와 유민의 도주]
유민은 곽위의 사망을 틈타 후주를 공격했으나, 후주 세종 시영의 군대에 대패하여 농민으로 위장해 도망쳤다. 이 패배로 북한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건우 7년(954년), 유민은 곽위의 사망을 기회 삼아 후주를 공격했다. 그러나 후주 세종 시영이 이끄는 군대에 크게 패배했고, 유민은 농민으로 위장하여 겨우 도망쳐 살아남았다. 이 전투는 북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으며, 이후 후주를 공격할 여력을 잃게 만들었다.
955
후주와의 전투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은 북한은 국력이 크게 쇠락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유민이 병으로 사망했고, 묘호는 세조로 추서되었다. 그의 아들 유균이 제위를 계승하여 북한의 다음 황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