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충 (1078년)
왕족, 문신, 정치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21:05
왕충은 1078년에 태어나 1159년에 사망한 고려 중기의 왕족이자 문신, 정치가이다. 태조 왕건의 사촌 동생 왕만세의 7대손으로, 과거에 급제한 후 다양한 관직을 역임하며 국정에 참여했다. 특히 진양통판 재직 시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웠으며, 이후 이부상서, 추밀원사, 평장사를 거쳐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에 오르며 활약했다. 사후에는 '강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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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8
1078년에 고려 중기의 왕족, 문신, 정치가인 왕충이 태어났다. 그는 고려 태조 왕건의 사촌 동생인 영해공 왕만세의 7대손이며, 상사봉어 왕이민의 아들이다.
1112
[진양사록 겸 장서기 임명]
과거 급제 후 양온승동정을 시작으로 여러 벼슬을 지냈으며, 고려 예종 7년에 진양사록 겸 장서기에 임명되었다.
어려서 학문을 열심히 연마하여 수령의 눈에 띄게 되었고, 과거에 합격한 뒤 전례에 따라 양온승동정이 되었다.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1112년(예종 7) 진양사록 겸 장서기가 되었으며, 그 뒤 제안부록, 대원부전첨 등으로 나아갔다.
[왜구 토벌 공훈]
국자감 박사가 되어 내직으로 돌아왔고, 진양통판으로 부임하여 해안가로 침입하는 왜구 해적을 토벌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전중내급사가 되었다.
국자감 박사가 되어 내직으로 돌아왔으며, 이후 진양통판으로 부임하였다. 진양통판으로 재직할 때 해안가로 올라오는 왜구 해적을 성공적으로 토벌하여 공훈을 세웠고, 이 공로로 전중내급사에 임명되었다.
1142
1142년(인종 20) 지공거에 임명되어 과거 시험을 주관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어서 빠르게 승진하여 이부상서가 되는 등 핵심 관직에 올랐다.
1144
1144년 추밀원사 판삼사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왕이 청렴한 관리를 추천하라는 명을 내리자, 그는 왕명을 받들어 함유일을 천거하였다. 함유일은 후에 공부상서에까지 승진하였다.
1145
이듬해인 1145년에 수사도(守司徒) 겸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승진하는 등 고위 관직에 올랐으며, 이어서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역임하며 국정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1146
1146년(의종 즉위년)에 평장사(平章事)로 임명되었으며, 덕망 높은 노신에 대한 우대의 표시로 궤장(几杖)을 하사받아 존경을 표하는 특별 대우를 받았다.
1149
1149년에 고려의 최고 재상직인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라 치사(致仕)하였다. 이는 그의 오랜 공직 생활과 높은 공로를 인정받아 영예롭게 공직에서 물러났음을 의미한다.
1159
1159년에 왕충이 사망하였으며, 그 공로를 기려 사후에는 '강렬(剛烈)'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는 그의 강직하고 위엄 있는 생애를 기리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