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령후

고려 왕족, 후작,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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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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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족, 후작,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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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인종과 공예왕후의 둘째 아들입니다. 모후 공예왕후의 편애로 왕태자로 추대될 뻔했으나 인종이 불허했습니다. 의종 즉위 후 의종과 갈등하며 역모 무고 사건에 휘말려 유배를 겪었습니다. 도량이 넓어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으나, 정치적 격변 속에 비운의 삶을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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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

[대령후 왕경 출생]

인종과 공예왕후 임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모후인 공예왕후는 형제들 중 유독 그를 편애하여 왕태자로 삼고자 했으나, 인종이 이를 허락하지 않아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대령후 왕경은 1130년 인종과 공예왕후 임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모후인 공예왕후는 형제들 중 유독 그를 편애하여 왕태자로 삼고자 했으나, 인종이 이를 허락하지 않아 이뤄지지 않았고, 이 때문에 의종 즉위 후 의종과 갈등하게 되었습니다.

1148

[후(侯)로 책봉]

의종 2년, 후(侯)로 책봉되었습니다. 그는 도량이 넓어 많은 사람의 추종을 받았지만, 이 때문에 환관의 모함과 왕실 내 갈등에 휘말리게 됩니다.

1148년(의종 2년) 후(侯)로 책봉되었습니다. 대령후는 도량이 넓어 사람들이 그를 많이 추종하였으며, 이러한 명성 때문에 의종과의 갈등과 역모 모함의 빌미가 됩니다.

[역모 무고 사건 발생]

환관 정함의 모함으로 왕경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역모가 꾸며졌다는 무고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많은 관련자가 유배되거나 처벌받았으며, 대령후와의 친분을 이유로 여러 대신과 신하들이 연좌되었습니다.

환관 정함이 대간을 모함하려 산원 정수개를 꾀어 대성, 대리 이빈 등이 의종에게 원한을 품고서 왕경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무고했습니다. 의종은 속아 관련자들을 제거하려 했으나 김존중의 주청으로 조사를 거쳐 정수개와 이빈이 유배됩니다. 정서는 대령후와 친분을 맺고 함께 놀았으므로 김존중의 참소로 의종에게 보고되었고, 정서 외 양벽, 김의련, 유우, 이시가 수감되기도 했습니다. 대령부를 없애고 그의 종 김참과 악공 최예도 유배되었습니다. 정서, 최유청, 이작승 등 여러 인물들이 이 사건으로 인해 유배 또는 좌천되었고, 그 죄상이 정부 문서에 기록되었습니다.

1157

[대령후, 천안부로 유배]

의종의 끊이지 않는 의심과 도참설 신봉으로 인해 대령후는 천안부로 유배당했습니다. 태후가 그를 구제할까 우려한 의종은 태후를 보제사로 옮긴 후 탄핵을 윤허했습니다.

1157년(의종 11년) 대령후는 천안부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최유청, 임극정, 김이영, 이작승 등 연루된 인물들도 다시 좌천되거나 유배지를 옮기게 됩니다. 의종은 평소 도참설을 믿고 동생들과 화목하지 못하여 그들에 대한 의심을 풀지 못했습니다. 이에 몰래 간신을 시켜 대령후와 임극정 등의 죄상을 탄핵하게 했으며, 태후가 그들을 구제할까 우려하여 먼저 태후를 보제사로 옮겨 놓고서 어쩔 수 없이 윤허한 양 꾸며대었습니다.

[의종 수레 화살 변고와 대령후 종들의 처형]

의종이 탄 수레에 화살이 떨어진 변고가 생기자, 적당 색출을 명하며 대령후 집안의 종들이 역모를 거짓 자백하여 처형당하는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많은 사람이 연루되어 처벌받았습니다.

의종이 탄 수레에 화살이 떨어진 변고가 생기자 의종은 적당을 색출하지 못했다 하여 재상들을 책망하는 조서를 내렸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이 연달아 체포되었는데, 대령후 집안의 종인 나언, 유성, 황익 등이 의심을 받고 혹독한 문초를 당하게 되자 거짓 자백을 하였습니다. 종친과 재상 및 백관 및 원로들은 대궐로 나아가 죄인을 체포한 것을 하례했습니다. 결국 나언, 유성, 황익 및 유성의 처를 목베고, 시위에 충실하지 못하였다 하여 견룡지유와 순검지유 14명을 시골로 유배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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