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경 (조위)
조위 관료, 정치인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21:00
조위 삼국시대 관료 왕경은 농민 출신으로 관직에 올랐다. 강하태수, 자사, 사례교위 등을 역임하며 청렴함을 보였다. 255년 강유와의 전투에서 패배했으나, 적도성을 지켜냈다. 260년 황제 고귀향공과 함께 사마소의 전횡을 막으려 했으나 실패하여 처형당했다. 그의 어머니는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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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
[조서 전투 대패와 적도성 수호]
옹주자사 왕경이 촉의 대장군 강유와 조서에서 싸워 크게 패했으나, 적도성을 지키며 강유의 포위에 맞섰다. 식량이 열흘분도 채 남지 않은 위기 속에서 진태의 협력으로 구제되었다.
255년 8월 2일, 정원 2년에 옹주자사 왕경은 촉의 대장군 강유와 조서에서 교전하여 대패했다. 왕경은 진태에게 강유의 움직임을 알렸으나, 진태가 도착하기 전에 전투를 벌여 만여 명의 병사만 겨우 건져 적도성을 지켜야 했다. 강유는 곧 적도성을 포위했고, 진태와 협력하여 강유의 퇴로를 끊으려는 움직임을 보여 겨우 구제되었다. 당시 적도성 내 식량은 열흘분도 채 남지 않았었다.
259
감로 연간에 왕경은 상서에 임명되었다. 상서는 고대 중국에서 중요한 관직 중 하나로, 황제를 보좌하고 국가의 주요 행정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았다.
260
[사마소 제거 계획 가담 및 간언]
고귀향공 황제가 전횡을 부리는 사마소를 제거하려 왕경을 불렀으나, 왕경은 위험성을 간언하며 만류했다. 그러나 황제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왕경은 계획을 사마소에게 알리라는 요청도 거부했다.
감로 5년(260년) 5월, 고귀향공 황제는 시중 왕침, 산기상시 왕업과 함께 왕경을 불러들여 권력을 전횡하던 사마소를 제거할 계획을 논의했다. 왕경은 노 소공의 예를 들어 황제의 위험한 계획을 간언하며 만류했으나, 황제는 목숨을 걸고 결행하려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이후 왕침과 왕업은 사마소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 했고 왕경에게도 동참을 요구했지만, 왕경은 이를 거부했다.
[고귀향공 시해 및 왕경 처형]
왕침과 왕업의 고변으로 사마소가 반격하여 고귀향공 황제가 시해당했다. 왕경은 황제 시해의 공모자로 몰려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반역죄로 처형당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 담담한 태도를 보였다.
왕침과 왕업이 단독으로 사마소에게 고귀향공의 계획을 밀고했고, 이를 알게 된 사마소가 반격하여 고귀향공이 도리어 시해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왕경은 태후의 조서에 따라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정위에게 넘겨졌고, 반역죄로 처형당했다. 사로잡혔을 때 왕경이 어머니에게 사과하자, 어머니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이 날이 언젠가 오리라 여겼다. 함께 죽게 되었으니 무슨 한이 있겠는가?"라고 답하며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265
태시 원년(265년), 서진의 무제(사마염)는 조서를 내려 처형당했던 왕경의 손자에게 낭중이라는 관직을 주었다. 이는 왕경 가문의 명예를 부분적으로 회복시키고, 그의 충성심을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조치로 해석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