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화영

독립운동가, 정치인, 목회자, 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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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화영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후 정치인, 감리교 목사이다. 3.1 운동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해 세 차례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 조선민족당 당수,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 등을 역임하며 신생국가 건설에 힘썼다. 건국대학교의 전신인 조선정치대학관을 설립하는 데 기여했다.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고,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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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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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

[출생]

오화영이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났다.

황해도 평산 금암면 대촌리에서 오석조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본관은 고창이다.

1906

[개신교 개종]

만주에서 돌아온 후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1906년 만주에서 돌아온 그는 미국 남(南)감리교의 기이남(奇二男, Rev W.G.cram)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1909

[전도사 활동 시작]

남감리회 소속 전도사로서 개성, 원산 등지에서 전도 활동을 시작하였다.

1909년부터 남감리회 소속 전도사로서 그는 전도 활동을 시작하였다. 개성 서구역(1909~1911), 개성 북부교회(1911~1913) 전도사를 거쳐 1913년 9월 원산 상리교회로 자리를 옮겼다.

1914

[집사목사 안수]

김영학, 최태곤 등과 함께 앳킨스 감독에게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4년 8월 23일 김영학·최태곤 등과 함께 앳킨스(Atkins) 감독에게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8

[협성신학교 졸업 및 장로목사 안수]

감리교 목사들의 사관학교 격인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가 되었으며,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7년 서울 도렴동 종교(宗橋)교회로 부임한 그는 이듬해 10월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8년에는 감리교 목사들의 사관학교 격인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의 목사가 되었다.

1919

[3·1 운동 참여]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3·1 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적극적으로 참가했다가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 판결에서 그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목회 활동을 한 적이 있는 개성과 원산의 지역 만세 운동을 조직한 것이 확인되어 비교적 중형을 받은 것이다.

1920

[징역형 선고]

3·1 운동 참여와 지역 만세 운동 조직 혐의로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1919년 3·1 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적극적으로 참가했다가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 판결에서 그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목회 활동을 한 적이 있는 개성과 원산의 지역 만세 운동을 조직한 것이 확인되어 비교적 중형을 받은 것이다.

1922

[만기 출옥]

이갑성과 함께 3·1 운동 관련 징역형을 마치고 만기 출옥하였다.

1922년 5월 5일 그는 이갑성과 함께 만기출옥 했다.

1926

[조선민흥회 참여]

조선민흥회 창립총회 준비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대외 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1926년 10월 말에 열린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 창립총회에 준비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27

[신간회 활동]

신간회 창립대회에서 간사로 선출되고 이어 서무부장 및 경성지회 검사위원에 선임되었다.

이듬해 2월 15일 개최된 신간회 창립대회에서는 간사 35명 중 1인으로 선출되었으며 이어 서무부장, 경성지회 검사위원에 선임되기도 했다.

1929

[기독신우회 참여]

기독신우회 평의원으로 참여하여 기독교인들의 사회참여 확대에 힘을 보탰다.

또 1929년 6월에 창립된 기독신우회(信友會)의 평의원으로 참여해 기독교인들의 사회참여를 확대하는 일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1932

[광주학생운동 관련 옥고]

조선물산장려회 고문으로 활동하였고, 광주학생운동과 관련하여 두 번째 옥고를 치렀다.

1932년에는 조선물산장려회 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광주학생운동과 관련, 두 번째 옥고를 치렀다. 이 일로 그는 이듬해 9월 수표교 교회에서 사임하였다.

1937

[흥업구락부 사건 연루]

실업단체로 위장한 기독교계 민족운동단체인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세 번째 옥고를 치렀으나,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전향하지 않았다.

흥업구락부 사건에도 연루되어 모두 3번 옥고를 치렀다. 1925년 3월 22일, 그는 서울 사직동 신흥우(申興雨) 집에서 결성된 흥업구락부에 참여하였다. 실업단체로 위장한 흥업구락부는 1920~1930년대 기독교계의 민족운동단체였다. YMCA 총무 출신의 신흥우가 이상재·윤치호를 중심으로 YMCA·감리교 등 기독교계 인사들로 조직했다. 이 단체가 미국의 이승만과 연결되어 있음을 포착한 있던 일제는 1937년 가을 신흥우·장덕수·유억겸 등 청구구락부 관계자들을 먼저 잡아들였다. 이어 이듬해 5월 흥업구락부 간부회원 60여 명을 대거 검거하였다. 이들 중 52명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에 오화영도 연루돼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신흥우 등 대다수는 전향서를 쓰고 풀려난 뒤 친일로 돌아섰으나 오화영은 끝까지 지조를 지켰다.

1945

[해방 후 정치 활동 시작]

8.15 해방과 함께 한국지사영접위원회에 참여하고 건국준비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조선민족당을 결성해 당수로 추대되는 등 정치무대에 전면에 나섰다.

1945년 8.15 해방과 함께 그는 정치무대 전면에 나섰다. 그 시작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반들을 환영하기 위해 구성된 한국지사(志士)영접위원회 참여였다. 그는 허헌 등과 함께 위원으로 참여하였으며 임정세력을 적극 지지하였다. 이어 건국준비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조선민족당을 결성해 당수로 추대되었다.

1946

[조선정치대학관 설립]

건국대학교의 전신인 조선정치대학관을 세워 이사, 관장을 지냈으며, 1949년에는 조선정치대학 학장이 되었다.

1946년에는 건국대학교의 전신인 조선정치대학관을 세워 이사·관장을 지냈으며 1949년에는 조선정치대학 학장이 되었다.

1947

[민족자주연맹 참여]

중간파 세력의 결집체인 민족자주연맹에 참여하여 통일 국가 건설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1947년 12월 중간파 세력의 결집체인 민족자주연맹에 참여했다.

1948

[남북협상 참여]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에 참여하기 위해 북한으로 향했다.

이듬해 4월에는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에 참여하기 위해 북행길에 올랐다.

1950

[제2대 민의원 의원 당선]

서울 종로구에서 제2대 민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곧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1950년 5월 30일 서울 종로구에서 제2대 민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채 한 달도 안 돼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북한군 퇴각 때 납북되었다.

[한국전쟁 중 납북]

제2대 민의원 의원 당선 직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북한군 퇴각 시 납북되었다.

1950년 5월 30일 서울 종로구에서 제2대 민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채 한 달도 안 돼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북한군 퇴각 때 납북되었다.

1956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참석]

납북 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결성대회에 주석단으로 참석하여 최고위원, 상무위원,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56년 7월 2~3일 열린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결성대회에서 주석단의 1인으로 참석해 최고위원 3인 중 1인, 상무위원 11인 중 1인, 집행위원 29인 중 1인으로 선임되었다. 동단체는 한국전쟁 당시 납북된 인물들을 비자발적으로 동원된 선전 단체였다.

1960

[사망 및 안장]

평양 근교의 애국열사릉에 묻히며 8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2002년 통일신보 보도에 따르면, 오화영은 1960년 9월 2일 사망해 평양 근교의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1989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 공헌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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